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54화 (154/170)

< 기적이 일어났다 >

현지의 고백.

갑작스러웠고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나 또한 그동안 현지에 대한 떨림이 없었던 게 아니다.

당연히 혼자 생각해본 적이 있었고, 매니저와 담당 가수라는 관계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생각을 더 이어나가지 않았던 것뿐이다.

요즘 송하연과 썸을 타고 있다지만,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담당 연예인이 아니라는 사실 덕분이지 않을까. 설령 관계가 조금 어색하고 이상해지더라도 부담이 그리 높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현지처럼 이렇게 직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해버리면 담당이고 뭐고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되어버린다.

이미 고착화된 관계가 고백으로 인해 깨져버리게 되었으니.

“지금···.”

“지금 바로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 마음을 너무 전하고 싶어서 말씀드린 거예요.”

그녀는 내 말을 막아버렸다.

어차피 머릿속이 하얗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긴 했다.

“그럼 전 가볼게요. 편히 쉬세요.”

이렇게 하고 그대로 가버린다고?

설마 했는데, 그녀는 정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걸 끝으로 방을 나섰다.

난 꼼짝도 못하고, 그녀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좀 더 대화라도 이어갔으면 모를까, 깔끔하게 고백만 하고 나가버리니 오히려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지?’

사귀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대답도 필요 없다니.

그렇다고 하여 그녀의 고백을 장난으로 넘기거나 없었던 일로 치부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게 그렇게 예의 없게 대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의 눈빛과 태도는 무척이나 진지했으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의 나라면, 마음이 그녀에게로 확 움직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송하연과 썸을 타며 조금씩 마음을 진전시키고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지금 그녀의 고백을 듣고 나서 마음이 흔들린 것만은 분명했다.

‘양심에 찔리게.’

그때.

침대 위에 두었던 핸드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현지에게서 온 연락인 줄 알고 헐레벌떡 달려가서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톡은 현지에게서 온 게 아니었다.

[하연 씨 : 오늘 일하느라 고생하셨어요. 이제 주무실 거예요?]

“아.”

지금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일말의 아쉬움으로 인해, 난 내 양심을 정면에서 마주볼 수 있었다.

아직은 둥글지 않고 세모난 모양인지, 가슴을 쿡쿡 찔러온다.

난 답장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그대로 놓은 채 침대에 엎어졌다.

내일 아침에, 잠들었었다고 답장을 보내야겠다.

***

“요즘 박실장님 왜 이렇게 일 열심히 하시는 것 같지?”

“무슨 소리야. 원래부터 엄청 열심히 하셨는데.”

“아니, 느낌이 달라졌잖아. 요즘 뭐에 쫓기는 것처럼 엄청 몰두하고, 막 일을 찾아서 하신다니까?”

내가 여기에 있는 줄 모르나 보다.

난 실소를 지으며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직원들의 말이 맞았다.

난 일에 더욱더 몰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아서.

여기가 무슨 중동도 아니고, 둘 다를 선택하는 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욕심이지 않나.

현지의 고백이 내게 어지간히 크게 다가오긴 했나 보다.

하긴, 웬만한 용기와 진심 가지곤 우리 같은 관계에서 먼저 고백하기는 엄청 힘들지.

과연 현지가 어떤 마음이었을 지를 헤아려보니, 자꾸 그녀의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다.

‘됐다···. 일이나 하자.’

그러나, 일도 일 나름.

지금 해야 하는 일정은 날 현실에서 도피시켜주긴커녕, 오히려 그 중심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난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마음을 굳게 먹고 걸음을 옮겼다.

***

아디다스의 미국 본사에서 우리에게 제안한 광고.

그 음악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송하연의 작업실에 모였다.

“오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말랑말랑한 미소를 띠우며 날 반기는 현지.

그러나 송하연은 기계적인 미소를 띠우며 어색하게 날 반겼다.

내가 호주에 다녀온 이후로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일 터.

‘내 잘못이지.’

송하연은 현지와 내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거고.

반대로 현지도 송하연과 내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거다.

그래서 난 그녀들을 평소처럼 태연한 태도로 대하려 노력했다.

“오늘부터 제대로 작업 들어가려고요. 제가 생각해놓은 밑그림이 있는데, 하연 씨는 아이디어 있으세요?”

평소보다 좀 더 사무적인가?

“저번처럼 멜로디 몇 개 만들어놓긴 했어요. 한 번 들어보실래요?”

“네.”

그녀가 만든 멜로디 라인이 작업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고.

그 소리들은 그녀의 현재 상태를 대변해주듯 불안정했다.

“어때요?”

내 눈을 바라보며 묻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답했다.

“음. 첫 번째 거는 신인 걸그룹처럼 너무 통통 튀는 것 같아요. 두 번째는 밀도가 너무 높아서 신나는 느낌이 덜하고요. 그쪽에서 보낸 레퍼런스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코러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전자음도 잘 섞일 수 있게 베이스 톤도 바꾸고 일렉도 좀 더 비중을 높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어느새 진지해진 송하연은 내 말을 경청하며 듣더니, 만들어놓았던 멜로디 라인을 과감하게 뜯어고쳤다.

지금 그녀의 상태가 어떻든, 우리가 맞춰온 호흡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그녀는 내가 전달하려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했고, 바로 적용해나갔다.

“실장님, 레퍼런스에 맞추는 것도 좋은데 저희 개성도 좀 넣어야 할 것 같아요.”

“네. 사실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하죠. 두 분이 각자 잘 어울렸으면서 겹쳤던 게 하나 있거든요.”

“···’The Radio Is Playing’이요?”

현지가 송하연의 콘서트에서 자극을 받아, 현지의 요구에 맞춰 송하연과 내가 함께 만든 곡.

이보다 둘의 연관이 깊은 곡은 없었다.

“네. 그것처럼 후렴 부분에 보컬이 터져나오면 좋을 것 같아요. 관객들도 신나게 떼창할 수 있게 멜로디는 쉽고 인상 깊게.”

“그럼 이미지 연상하기 쉽게 임시로 키워드 같은 것도 정해볼까요? 그쪽에서 ‘축제’를 줬으니까, 우리는 저희 둘 듀엣만이 아니라 축제에 참여한 모든 분들이랑 전부 하나 되는 것 같이 ‘조화’도 좋을 것 같아요.”

“좋네요. 거기에 더해서 계절이나 날씨 같은 걸 넣어도 더 색깔이 명확해질 것 같지 않아요? 제가 생각했던 밑그림은 보슬비 내리는 거리에서 다 같이 웃으면서 옷 더러워지는 거 상관없이 뛰노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럼 그건 키워드로 줄이지 말고 살려볼게요.”

송하연과 나는 작업실에 들어올 때 살짝 어색했던 게 무색하게도 호흡이 척척 맞아들어갔다.

내 밑그림을 그녀에게 설명하면 그녀 또한 아이디어를 낸다.

우리는 머릿속에 노니는 교집합과 차집합을 정신없이 풀어놓았다.

그리고 중간에 진행이 살짝 막혔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하곤 웃음 지어 보였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뒤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작곡에 관련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현지가 신경이 쓰이는데.

아무래도 이 둘을 피하려 해서는 될 것도 안 될 것 같았다.

다른 이가 볼 때 어장관리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양심에 찔려 피하는 게 그녀들에게 더 못된 짓이 될 수도 있으니까.

***

내가 송하연과 유현지와 더욱 오랜 시간을 제대로 마주하기로 마음 먹으며 곡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사이.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의 시즌2 촬영도 오늘로 마지막이 되었다.

“오빠, 전 이거 끝나고 뭐 해요? 송이 선배님도 차기작 벌써 결정됐고, 심민정 선배님도 결정됐다면서요.”

분장이긴 하지만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 채희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글쎄. 이참에 할리우드라도 가버릴까? 요즘 마음에 차는 작품도 없는데.”

“할리우드요? 전 영어 잘 못하는데요?”

“그러니까 영어 과외를 받으면서 빡세게-“

“안 해! 절대 안 해요!”

채희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농담이었는데.

액션스쿨에서 훈련하고 식단 관리를 하며 지옥을 맛본 모양이다.

이번에 한 것처럼, 내가 정말로 엄청 빡세게 영어 공부를 시킬 거라 짐작한 거겠지.

“오빠. 전 한국인이에요. 그리고 요즘 한국 컨텐츠로도 세계에서 잘나가는데 굳이 할리우드 갈 필요 있어요? 전 무조건! 한국 작품 할 거예요!”

난 큭큭, 웃으며 물었다.

“영화랑 드라마 중에 뭐 하고 싶은데?”

“이번엔 TV드라마요. 좀 힐링되는 걸로. 그동안 너무 감정소모 심한 것만 한 것 같아서.”

그냥 편하게 촬영하고 싶은 거 아니고?

“요구사항이 너무 많은데? 설마 타이밍 좋게 그런 대본이 나오려고? 못 찾을 수도 있으니까 다른 것도 말해봐.”

“음. 그럼 엄청 맛있는 거 많이 먹는 드라마.”

“···.”

그럴 거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그렇게 되면 또 지루함을 참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저번에도 심심하다고 매일매일 귀찮을 정도로 찾지 않았나.

‘그냥 내 맘대로 골라줘야겠다.’

영화든 드라마든 가리지 않고.

내가 고른 걸 얘도 마음에 들어하면 그대로 진행하는 거고, 아니면 다른 거 찾으면 되겠지.

“이제 제 차례예요. 신들린 연기 할 테니까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세요!”

선전포고를 하듯 말하며,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그녀.

카메라 앞에 선 그녀는 날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어디 한 번, 신들렸다고 자신한 연기 좀 볼까?

턱을 괴고 옅게 웃으며 지켜보기 시작했고.

난 그 장면이 끝나는 순간, 얼빠진 듯 입을 벌리고 있는 감독님에게로 걸어갔다.

얼핏 보면 환희에 푹 잠긴 것 같기도 하다.

난 슬쩍 눈치를 보며 얘기를 꺼냈다.

“이 장면, 예고편으로 쓰면 딱 좋을 것처럼 나오지 않았습니까?”

정수진 감독은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두 번 끄덕거렸다.

***

강해정이 작곡한 곡으로 피에스타의 후속곡이 정해졌으니.

프로젝트가 가동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안무를 의뢰하고, 가사를 받고, 헤어와 메이크업과 스타일을 정하고, 뮤비와 사진을 찍고···.

쉴 틈 없이 연습을 하며 회사의 시스템에 맞춰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컴백 날이 다가왔다.

“근데 있잖아, 얘들아.”

“네.”

“난 여기에 왜 와 있는 거야?”

간만에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월급루팡을 하고 있는 내 앞으로 그녀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더니.

날 데리고 비어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헐···.”

“···왜 항상 저희만 강하게 키우시는 거예요?”

“너무 무심하신 것 같아요.”

아니, 내가 언제 강하게 키웠다고.

난 그녀들의 반응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소녀들의 깊은 감성을 이해하는 건 너무 어렵지.

내가 언제 한 번 자극하긴 했었나 보다.

아무튼, 어차피 그녀들의 신곡에 대한 반응을 살펴볼 생각이었기에 그녀들과 함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아, 떨린다. 안 좋아하시면 어쩌지?”

“괜찮을 거예요. 티저 반응도 엄청 좋았잖아요.”

이효진과 성윤지의 대화.

이효진은 입술을 살살 깨물고 있었고, 성윤지는 나와 강해정을 흘끗 보며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정아. 너 근데··· 더 커진 거 아니야?”

“네? 언니, 뭐가요?”

“그··· 음···. 그··· 어···.”

송하니와 강해정의 대화.

송하니는 내가 신경 쓰이는지 눈을 데굴데굴 굴렸고, 강해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들으며, 송하니의 눈썰미가 제법 좋은 것 같다는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을 뿐.

“크흠.”

“어? 실장님, 지금 왜 헛기침하셨어요?”

“···내가 뭘.”

“와, 진짜···.”

“야, 이건 아니지 않냐?”

솔직히 난 무죄다.

자기가 먼저 얘기 꺼내놓고.

그렇게 송하니에게 경멸 가득한 눈빛을 받고 있는 나를 구제해주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실장님. 이제 시간 거의 다 된 것 같아요.”

강해정이었다.

‘착하기도 하지.’

그녀의 말마따나 시간은 거의 다 됐고.

이에, 그녀들은 다시금 긴장이 차올랐는지 입을 꾹 다물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떴다!”

강해정이 만든 괴물신인 피에스타의 신곡, .

한 시간 뒤, 신곡은 차트에 떡하니 이름을 올렸다.

[11. Officially I Love U – 피에스타]

기적이 일어났다.

< 기적이 일어났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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