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52화 (152/170)

< 겉바속촉 시라송이의 차기작 >

심민정은 박한울이 손에 쥐여준 핸드폰으로 시나리오를 읽어나갔다.

흡입력은 물론이거니와, 지루할 틈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서사, 캐릭터, 대사, 소재, 모든 것이 훌륭했다.

아니, 다른 걸 다 떠나 그냥 이 영화를 꼭 찍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재밌을 것 같아.’

이렇게 시나리오를 보는 것도, 그리고 이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도.

심민정이 그렇게 마음을 결정하며 정신없이 시나리오를 읽고 있을 때.

지이잉- 손에 쥐고 있던 박한울의 핸드폰이 진동음을 울리며 액정에 톡이 띄워졌다.

[하연 씨 : 아직도 회식 안 끝났어요? 걱정되니까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

“···.”

송하연의 톡.

분주하게 움직이던 심민정의 손과 눈은 가만히 멈추었다.

시상식에 올 때 차 안에서 누구랑 그렇게 기분 좋게 톡을 주고받나 했는데.

그게 송하연이었던 모양이다.

고작 이런 톡 하나로 관계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감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다녀온 뒤 갑자기 휴가를 냈던 박한울, 그리고 휴가 뒤에 달라진 분위기까지.

민정은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박한울을 쳐다봤다.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다른 사람들한테 재난이 되려고 했었는데··· 반전은 없었네.’

아무래도 재난, 공포, 반전의 장르는 현실이 아닌, 영화로만 만족해야 할 듯했다.

“실장님.”

“아, 네, 민정 씨. 다 보셨어요? 어때요?”

“너무 재밌더라고요. 이거 꼭 하고 싶어요.”

굳이 톡이 온 걸 봤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럴 땐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고 모른 척하는 게, 그에게 있어 가장 괜찮은 상황일 테니.

‘은근슬쩍 낭군님이라고 부르려고 했는데··· 이제 낭중님이라고 부르지도 못 하겠네.’

민정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정채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라도 알아챈 자신은 그녀보다는 상황이 나은 것 같아서, 조금은 위안이 됐다.

***

드디어 HJ엔터의 드리머가 컴백했다.

YU엔터의 미라클보다 조금 늦긴 했으나 활동시기가 겹치긴 했다.

팬덤들 사이로, 절대 질 수 없다는 기류가 흐르며 경쟁이 치열해졌으나.

피에스타에게 있어선 아무런 상관없는 소식들이었다.

그녀들은 이미 활동이 끝났으니까.

그리고, 한창 곡을 만드느라 바빴으니까.

강해정이 곡을 만들기 시작한 건, 활동기의 막바지 즈음부터였으나.

작업은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

“해정아, 너무 조급해하지 마. 잘 안 되면 천천히 해도 돼.”

곡이 마음처럼 쉽게 나오지 않자 멤버들은 기대 대신 걱정을 하게 됐고, 강해정은 그녀들의 걱정을 덜기 위해 잠시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그리하여 보게 된 것은 드라마.

연습을 하거나 인터넷을 하면 작곡에 대한 생각이 불쑥불쑥 머릿속에 차오를 테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드라마를 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시즌1.

강해정은 언젠가 꼭 보겠다며 벼르고 벼르던 이 유명한 드라마를 이제서야 접했고.

시즌1의 마지막회를 보고서는 머릿속에 번쩍번쩍 번개가 터져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그 유명한 영감···?’

해정은 머릿속에서 번쩍거리는 영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헐레벌떡 컴퓨터를 켜고 작곡 프로그램을 켰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정신없이 몰두하던 해정의 입에서 달뜬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 시간밖에 안 됐네?”

해정은 모니터를 바라봤다.

아직 손봐야 할 구석은 많지만 뼈대와 실루엣은 이미 완성이 됐다.

이렇게 만드는 데 든 시간은 겨우 한 시간.

그간 몇날며칠을 고생했는데, 영감을 얻고서는 고작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허무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해정은 모니터링 헤드셋을 낀 채로 자신이 만든 음악을 처음부터 다시 재생해 들어봤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박한울 실장님은 이 음악을 듣고 무슨 표정을 지으실까?

그리고 멤버들은 이 음악을 듣고 무슨 말을 할까?

“빨리 끝내고 돌아오면 좋겠다.”

멤버들은 지금 한창 연습에 몰두하고 있을 테니까.

***

성호 삼촌의 촬영 현장으로 가는 길.

사실 성호 삼촌을 응원하러 가는 게 아니라 최락현을 보러 가는 거였다.

‘한울아. 그놈 그거 다른 건 몰라도 재밌는 놈인 건 확실해.’

시상식이 끝난 뒤의 회식자리에서 삼촌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하는 건, 최락현의 인성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뜻과 같았다.

‘그럼 뭐 확정이나 다름없지.’

재능은 진작에 확인이 끝났으니까.

모든 게 다 끝났는데, 이렇게 현장까지 직접 가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이제 담당이 될 배우이기도 하니, 직접 만나서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는 김에 연기하는 모습도 좀 보고.

난 촬영장에 도착해, 최락현의 친형인 최창수 감독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이성호 선배님 뵈러 오신 거예요?”

“음···. 그것도 그런데, 최락현 배우랑 계약에 대해서 얘기 좀 나눠보고 싶어서요.”

누가 친형 아니랄까 봐, 최창수 감독님은 환하게 반색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마침 저기 오네요. 그럼 저희 못난 동생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만큼 인성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아요.”

칭찬일까, 험담일까.

난 피식 웃으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장한 표정과 걸음걸이로 내게 일직선으로 걸어오고 있는 최락현.

“최락현 씨, 오늘 계-“

계약에 대해서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오며 허리를 푹,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하하! 이성호 선배님 뵈러 오셨구나? 그런데 다음 씬은 성호 선배님이 아니고 제 차롄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한 번 보시겠어요? 그냥 영화가 어떻게 되는지 미리 볼 필요는 있잖아요. 저쪽에 편히 앉아 계세요.”

아무래도 너무 늦게 오긴 했나 보다.

좀 일찍 왔더라면 틀림없이 자기 연기를 보러 왔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자길 보러 왔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은가 보다.

내가 자기한테 관심이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지?

“하아···. 이 멍청한 놈, 진짜.”

옆에 있던 최창수 감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최락현은 그런 형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정말 성호 삼촌의 말대로, 재밌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그러죠, 뭐.”

난 큭큭,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됐을 때.

최락현은 내게 처음 오디션을 봤을 때처럼 긴장하는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양녕대군’ 그 자체가 되어, 온갖 감정들을 연기에 그대로 녹여내는 모습을 보였다.

‘역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니까?’

이게 첫 작품이라니,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좋은 시나리오와 좋은 스탭들, 그리고 좋은 배우를 만났기 때문일까.

그의 실력은 눈에 띄게 성장해 있었다.

“실장님, 그거 아세요? 저 방금 연기한 거, 제가 가진 실력의 반도 안 보여준 거예요. 제가 어제 연습에 너무 몰두하다가 그만 새벽 세 시가 넘어서 잤거든요. 와, 오늘 컨디션 최악이다, 증말.”

목을 좌우로 꺾으며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라? 안 믿으세요? 진짠데? 증거가 없으니까 뭐 보여줄 수가 있어야지. 믿지 마세요, 그럼. 대신 다음에 또 오시면 그땐 진짜 훨씬 더 완벽한 모습 보여드릴-“

“됐어요. 지금으로도 충분하니까.”

“···네?”

“제가 최락현 배우님의 매니저가 하고 싶은데, 혹시 생각 있으십니까?”

대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그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랗게 뜨며, 얼굴을 내게로 가까이 들이밀었다.

“진짜요? 이거 몰래 카메라 같은 거 아니죠? 저 그럼 진짜 무서운 모습 나올지도 몰라요?”

“진짜로요.”

“···단순히 회사 영입 제안도 아니고, 실장님이 직접 저 맡으시겠다는 말씀이시죠?”

“네.”

몇 번이나 긍정을 하자, 그의 얼굴은 얼핏 비열해 보일 정도로 미소가 만개했다.

“크흐흐흐."

인성, 괜찮은 거 맞겠지?

***

시상식, 드리머의 컴백, 거기에 ‘최락현’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신인배우 영입까지.

인터넷은 연일 HJ엔터로 시끌시끌했다.

우리의 행보로 화제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이때.

나는 채희의 촬영 현장을 찾았다.

촬영하는 채희를 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오늘은 다른 목적도 있었다.

“저기요, 시라송이 씨.”

“왜요, 겉바속촉 씨.”

눈을 치켜뜨며 까칠하게 반응하는 게 언제나 내게 유쾌한 재미를 주었다.

타격감이 좋다고나 할까.

“대체 언제까지 겉바속촉이라고 부를 거예요?”

“그쪽이 지금 먼저 시라송이라고 불렀잖아요!”

난 일부러 티 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은 작품 있어서 추천해주려고 왔더니···.”

“···!”

“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런 일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네.”

내가 쩝,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몸을 돌리자.

턱! 하고 내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치사하게 진짜 이럴 거예요?”

“네? 치사?”

“···실언이었어요.”

혀끝까지 튀어나온 말을 목구멍 안쪽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 저 모습을 보니,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웃음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기에, 난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더 했다가는 정말로 성질을 돋울 것 같았으니까.

“이영진 감독님의 신작이 있어요. 심민정 씨랑 같이 박송이 씨도 주연으로 들어가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정말요? 어떤 캐릭터요? 아니, 장르는 뭔데요?”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 또렷하게 눈빛을 빛내는 그녀에게, 그 이상의 설명을 잇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에게 아예 메일을 보내주었다.

이미 이영진 감독님께는 허락을 구했으니까.

“아직 제작사도 안 정해지고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긴 한데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내 말에,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걱정 안 해요. 번갯불에 콩 볶는 것처럼 뚝딱뚝딱 진행될 게 뻔하죠. 나랑 심민정 씬데.”

“아직 시나리오 안 봤는데, 벌써 하기로 결정하신 거예요?”

“할 확률이 크니까 이렇게 말한 거예요. 그쪽이 추천해주고 그쪽 배우까지 넣는데 어련히 좋겠죠. 거기다 이영진 감독님 작품이니까 말 다했고.”

“···보면 볼수록 겉바속촉은 제가 아니라 송이 씨 같은데···.”

“뭐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날 엄청 신뢰하고 있지 않은가.

난 그녀의 앙칼진 반응에도 불구하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빠! 나 방금 연기한 거 안 봤죠? 나 보러 온 거 아니에요?”

씬을 끝내고 온 채희.

그녀는 뿔이 난 것 같은 말의 내용과는 달리, 얼굴은 방긋 웃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또 온 게, 저리도 반가운 모양이다.

“겉바속촉 시라송이 씨랑 얘기 좀 하느라고.”

“그쪽 별명을 왜 나한테 갖다 붙이냐고요!”

“이거 봐. 겉이 아주 바삭하지?”

“오! 그러고 보니 송이 선배님도 엄청 바삭하시네요?”

“야!”

조금은 아쉽게도 느껴졌다.

이 촬영이 모두 끝나면, 이렇게 셋이 촬영장에 모이는 일은 당분간 없을 테니까.

‘그래도 언젠간 또 모일 수 있겠지.’

예컨대, 시즌3 촬영이라거나.

다음 시즌을 할 지 안 할 지,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건 성적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니겠나.

내 예상대로 해외에서 대박이 터진다면.

우리는 각자 차기작을 끝내고 다시 모일 수 있으리라.

“왜 그렇게 아련하게 봐요? 징그럽게.”

“···이제 당분간 이렇게 셋이 못 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 뭐래요. 이영진 감독님 차기작에서 저 안 볼 거예요?”

“우리 셋 말하는 거잖아요. 우리 셋!”

박송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걸로 다 감상에 빠지네. 술 먹고 온 거 아니죠?”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위로를 해준 듯했다.

정말로 효과가 아주 확실한 게.

살짝 아쉬웠던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져버렸잖아.

< 겉바속촉 시라송이의 차기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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