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질 끌면 될 것도 안 되니까 >
청룡예술대상 당일.
오늘 참석자들 중 내 담당인 채희와 심민정은 이른 아침부터 준비에 여념이 없었으나.
난 준비하는 그녀들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회사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드리머의 컴백 직전인 지금, 그들에게 디테일한 피드백을 해줘야 했고.
이영진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고치는 걸 마냥 기다리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심민정의 차기작을 위해 다른 시나리오들을 살펴야 했으며.
또한 아디다스와의 계약과 관련해 본부장님과 의견을 주고받는 작은 회의를 해야 했다.
사실 전부 다 굳이 오늘 하지는 않아도 되긴 했는데.
샵에 가서 몇 시간이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게 은근히 고역이라서, 그냥 그 시간을 대체할 수 있는 일을 내가 직접 찾아서 바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나도 이제 운전할 짬이 아니듯, 샵에서 가만히 기다려야 할 짬도 아니지 않은가.
대놓고 이런 말을 하며 안 갔다간 채희한테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안 했지만···.
‘그리고 일한 기간으로만 따지면 운전할 짬은 맞구나?’
아무튼 난 바쁘다는 핑계로, 그녀들이 거의 다 준비되어갈 때쯤에서야 샵으로 향했다.
그리고 택시에서 내려, 위로 올라가려 할 때.
그녀들은 타이밍이 좋게도, 막 샵에서 나오고 있었다.
드레스와 하이힐, 그리고 귀걸이와 목걸이를 걸치고.
의상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되어 있어, 눈이 부실 정도로 예쁜 모습이었다.
그녀들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어 나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화보의 한 컷이나 다름없어 보일 정도.
‘누구 담당인지 참 빛이 나네.’
자리에 멈춰 서서, 웃으며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그녀들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오빠! 왜 이제 와요!”
“실장님!”
날 발견하자마자 입술부터 내밀며 투정에 시동을 거는 채희와, 웃으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심민정.
같은 상황 속에서, 같은 사람에게, 어쩜 저리 다른 행동을 보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난 실소를 내뱉으며, 다가오는 그녀들을 맞이했다.
“내가 사진 찍어서 다 증명했잖아. 할 거 많다고. 누가 안 오고 싶어서 안 온 줄 알아? 그래도 시상식 갈 땐 같이 가려고 일을 얼마나 빨리 처리했는데.”
채희에게는 한껏 당당한 태도로 말했고.
심민정에게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 특히나 더 예쁘···.”
예쁘다고 말하려 했는데, 말이 혀끝에서 딱 막혀버렸다.
눈앞에 갑자기 송하연이 얼핏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서.
다만, 여기까지만 말해도 뜻은 다 전해졌는지.
정채희는 득달같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나는요!”
그녀의 눈썹은 심술궂게 휘어져 있었다.
난 그녀의 심술 가득한 눈을 마주하며 정신을 차리고는 쓰읍, 잇새로 바람을 삼키며 답했다.
“넌 뭐··· 청순섹시?”
“흠흠.”
내 대답에 채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놀릴 지 약간 고민했었는데, 그냥 봐주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이 둘을 두고 누가 더 잘했네, 하며 언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인 참이다.
인터넷에서도 그런데, 그녀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경쟁심리가 피어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좋은 날이기도 하고.’
우리는 아직 수상이 확정이 되지도 않았는데도 들뜬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다들 각자의 품 안에 상 하나쯤은 안고 갈 거라는 걸,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으니까.
이 둘이 겹치는 부문은 , 딱 한 부문뿐.
그마저도 둘 다 메인이 되는 부문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그저 기쁜 마음으로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
송하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차 타고 가는 중이에요?]
-네 지금 채희가 옆에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계속 보고 있어서 힘드네요ㅠ
하연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뭘 의심하는데요?]
꽉 쥔 주먹을 입술에 갖다 붙인 채, 숨죽이며 기다리길 얼마.
이어서 온 답장을 보곤, “꺄악!”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웃으면서 톡하고 있으니까 여자친구 생긴 줄 아나 봐요.
소파에 앉아 있던 하연은 옆에 있는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처음부터 확신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저 착각인 줄 알았지.
그런데 착각이 오래도록 지속되고, 더욱더 깊어지면 그때부턴 더 이상 착각이 아니다.
하연은 이를 인정했고, 이틀간 함께 드라마를 보며 확신을 얻었다.
커피를 마시고, 드라마를 보고, 밥을 먹고, 집에 들어가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온 박한울.
아침 일찍, 그의 미소 띤 얼굴을 다시 보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마··· 다 눈치 채겠지?”
미국에서 공연이 끝나고 유현지와 박한울과 함께 공원을 걸었고.
지금은 심민정과 정채희가 함께 탄 차에서 웃는 얼굴로 자신과 톡을 주고받고 있다.
정채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볼 정도면, 다른 이들 역시 눈치를 못 챌 수가 없겠지.
우리의 묘한 기류는 미국에서부터 흐르고 있었으니까.
하연은 만족스럽게 씩-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보냈다.
대놓고 설레고 있는 캐릭터 이모티콘 하나.
너무 노골적이긴 했으나.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됐다.
“질질 끌면 될 것도 안 되니까.”
하연은 빈틈을 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
청룡예술대상의 레드카펫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고 들어서니.
장내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참 많이도 보였다.
조수연 작가, 김정연 대표, 구선학 감독, 윤형진 감독, 임대표, 박송이 등등.
이 자리가 정말 축제의 장이 맞기는 한가 보다.
절대 한 곳에 모이기 쉽지 않은 이들이 다 모여 있지 않은가.
우리는 반갑게 돌아다니며 조금이나마 회포를 풀었다.
다만, 기다리고 있던 한 명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고친다던 이영진 감독님.
어느 정도까지 진척이 됐는지, 잘 되고는 있는지 듣고 싶었는데.
‘좀 늦게 오시려나?’
어쩌면 오늘은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시상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으니까.
채희는 영화 <더 BAD> 테이블에 앉았고, 심민정은 <수세미> 테이블에 가 앉았다.
그리고 나도 최팀장님과, 뒤늦게 온 아버지와 본부장님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영진 감독님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와 <착한 역할> 테이블에 가 앉는 게 보였다.
그 주변에 앉은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대화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예 진척이 없지는 않은가 보다.
진척이 없었다면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그리 오래는 기다려줄 수 없을 것 같다.
오늘도 그랬듯, 난 계속 좋은 시나리오를 찾고 있었으니.
“한울아.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 네 덕이다.”
아버지가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씀을 이으셨다.
“노미네이트된 것들만 봐도 우리 회사가 주인공이잖냐.”
성호 삼촌과 채희, 그리고 심민정.
세 명의 배우들이 굵직굵직한 부문에 다 포진되어 있으니, 가히 우리 회사가 오늘의 주인공이라 할 만했다.
난 피식 웃으며 물었다.
“좋으세요?”
“좋지, 그럼. 아들이 이렇게나 능력을 펼치고 있는데.”
아.
배우들 때문에 기쁘다는 말이 아니라, 나 때문에 기쁘다는 거였구나.
내가 그들을 이끌다시피 했으니까.
살짝 민망해진 마음에 시선을 돌렸는데, 아버지는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계속 말씀하셨다.
“부족한 건 없고? 팀장은 언제 달고 싶냐. 원한다면 새로 팀 꾸려줄 수도 있어. 너만의 팀에서 네가 원하는 가수랑 배우들 마음껏 발굴하고 또 제대로 키워봐.”
‘나만의 팀.’
그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으나.
내 눈은 아버지를 향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심민정, 그리고 정채희.
그녀들을 보는 순간.
난 새로운 팀에 대한 설렘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따뜻함이 채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승진, 더 많은 아티스트, 더 많은 권한.
물론 나쁘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별로 끌리지 않았다.
‘우리 팀이야.’
나만의 팀은 아니지만, 우리의 팀이다.
난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아뇨. 지금은 이대로가 좋은 것 같아요.”
“이걸로 만족하는 거냐? 원하면 더 높이 올라갈 수도 있어.”
만족하냐고? 당연히 만족은 차고 넘치게 하고 있다.
그녀들과 일하면서 만족을 못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러나 만족한다는 게 야망과 욕심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 제 담당 아티스트들에 집중하면 팀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 더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오히려, 가지를 더 늘렸다간 이도 저도 안 돼서 제가 만족 못 할지도 몰라요.”
아직 그녀들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더구나, 새로운 아티스트로 눈여겨보고 있는 이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겠다.”
“네, 아버지.”
아버지는 미소를 머금은 채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들끓는 듯한 눈으로 그녀들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 시상식은 끝도 아니며 변환점도 아니다.
그저 지나쳐가는 중간점일 뿐.
기쁨을 누리며 충분히 만족스러워하되.
여기서 욕심 또한 멈추면 안 되겠다.
***
시상식은 이변 없이 흘러갔다.
영화대상은 채희가 출연한 구선학 감독의 <더 BAD>가.
영화 남자최우수연기상 부문은 <구원자>에 출연한 성호 삼촌이.
그리고 채희는 <더 BAD>로 영화 여자신인연기상과,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로 TV 여자최우수연기상을 받게 됐다.
심민정은 로 TV 여자조연상과, <수세미>로 TV 여자신인상을 받았고.
아주 상 복이 터져버린 날이었다.
특히나 놀라운 건, 아직 신인 짬인 정채희가 TV 여자최우수연기상을 받으면서 아무런 논란이 없다는 것.
아버지와 본부장님을 비롯해, 우리는 입이 귀에 걸릴 듯 미소 지으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까는 이걸로 만족하냐느니 어쩌니 말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아주 더 없이 만족스러워하고 계셨다.
아버지도 기뻐하고 있으면서 무슨.
시상식이 모두 끝나고 장내가 모두 부산스러우며 시끌시끌할 때.
뒤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이영진 감독님.”
함께 영화를 찍은 자신의 팀원들은 어쩌고 나에게 왔는지는 내가 걱정할 바가 아니었다.
난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고, 그는 내게로 웃는 얼굴로 찾아왔으니까.
“완성했습니다. 어젯밤에 아이디어가 터져나오는 바람에 잠도 못 자고 왔군요. 하마터면 시상식에 늦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왔던 거였구나.
그런데, 잠을 하나도 못 잔 사람 치고는 그의 눈빛은 아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꽤 만족스럽게 나왔나 보지?
“매번 작품을 준비하면서도 속으로는 항상 불안감이 있었는데··· 이번엔 다르네요. 성공할 거란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영진 감독이 그토록 자신하는 역작.
궁금증과 흥미가 불쑥 치솟아 올랐다.
회식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지금 바로 보고 싶을 정도로.
“시간이 없어서 제본으로 뽑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바로 보내겠습니다.”
오히려 더 좋겠다.
핸드폰으로 보면, 회식 자리에서도 틈틈이 볼 수 있을 테니까.
***
공포, 반전, 재난의 장르를 담은 시나리오.
이건 원래 재난 하나뿐이었던 영화였다.
그런데 장르 두 개를 더 추가하니, 이야기가 아주 많이 다채로워졌다.
MT를 왔다가 펜션에 갇혀버린 동아리원들, 자꾸 이상한 일이 발생하며 의심과 이기심이 피어나고.
캐릭터의 과거들을 서로서로가 들추며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니, 캐릭터성과 텐션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회식 자리에서 틈틈이 볼 수 있겠다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난 회식 내내 시나리오를 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영진 감독과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었다.’, ‘박한울 실장이 저렇게 정신없이 읽는 걸 보니 틀림없이 대박일 거다.’, ‘우리 회사 얼마나 잘 되려는 지 모르겠다.’ 등등.
그러나 난 그 말들에 조금도 반응할 수가 없었다.
읽는 걸 멈출 수 없었고,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었으니까.
심민정과 함께 뚜렷하게 떠오르는 배우 한 명.
그녀가 시나리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박송이.’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채희와 둘이서 보여줄 수 있는 케미는 죄다 보여준 것 같아, 같이 작품을 그만 할 때가 되기도 했고.
‘촬영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까 시기가 얼추 맞긴 하겠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민정 씨.”
“네!”
난 심민정을 내 옆으로 불렀고.
내 핸드폰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한 번 읽어볼래요?”
< 질질 끌면 될 것도 안 되니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