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47화 (147/170)

< 더욱 높은 곳으로! >

YU엔터의 보이그룹, ‘미라클’.

이들은 데뷔 활동으로 상당히 괜찮은 성적을 얻어냈다.

물론 장찬수와 컴백 시기가 겹치는 바람에 대부분의 화제는 그쪽이 가져가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막 데뷔한 신인 치고는 아주 괜찮은 성적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휴식기를 가지지 않고 후속곡 활동 준비에 여념이 없었는데.

인기를 얻었다는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저번 활동과는 사정이 약간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헐.”

YU엔터의 연습실.

미라클의 멤버들이 숨을 헐떡이는 한 명의 멤버를 보며 말을 흘렸다.

그 멤버의 기량이 저번 활동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높아졌기 때문에.

“하아. 하아. 어때요? 좀 괜찮죠?”

씨익,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데뷔 활동을 하며 모두가 기량이 늘긴 했으나, 이렇게 눈에 확 띌 정도로 실력이 좋아진 멤버는 그 하나뿐이었다.

바로 최준성.

‘이제··· 봐도 되는 거였어.’

멋지고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를 보는 걸 금지당했던 준성이었으나, 최근 들어 다시 보기 시작했다.

힙합, 그리고 락, 또는 선배님들의 음악과 무대를.

그리고 그 덕에 그간 억눌러왔던 감정과 느낌이 폭발할 듯 솟구쳤다.

‘기본기는 어느 정도 쌓았으니까.’

금지당했었던 건 모두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겉멋만 부리려 했기 때문.

그러나 겉멋을 싹 빼고 기본을 열심히 다져왔으니,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정확히 댄스와 보컬의 테크닉 자체가 드라마틱하게 발전된 건 아니었으나,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최준성의 퍼포먼스를 받아들이는 느낌은 확실하게 달라졌다.

멤버들은 모두 놀라고 흥분된 표정으로 목소리를 터뜨렸다.

“야! 너 방금 엄청 멋있었어!”

“우리 컴백하면 더 뜨겠다. 이러다가 우리가 그 신인 라인들 중에 1등 먹는 거 아냐?”

“장찬수 선배님이랑 피에스타가 좀 강하긴 한데, 이 정도면 진짜 가능성 있을 것 같아.”

무대 위에서 한 명의 존재감이 커진 건, 같은 그룹의 멤버로서 조바심이 들거나 질투가 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이들은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다.

이들이 진정으로 경쟁할 상대는 그룹 밖에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힙합 베이스의 음악으로 데뷔한 홈 엔터의 신인 걸그룹, ‘웨타’.

그녀들은 안정적으로 데뷔 후, 리얼리티까지 방영하기 시작하며 화제성을 한창 높이고 있었지만.

웨타의 멤버들은 그저 기뻐하며 희희낙락하지 않았다.

숙소에서 마음 편히 잠 잘 틈도 주어지지 않는 혹독한 스케줄이 끝나가고, 이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길 즈음부터.

그녀들은 틈만 나면 자발적으로 연습실에 와서 자신들을 몰아붙였다.

회사에서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으나, 그녀들은 도통 들어먹지를 않았다.

-이런 식으로 묶으면 괜찮은 힙합 퍼포먼스 그룹이 될 것 같네요. 자기들을 얼마나 몰아붙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진 포텐만큼은 확실히 높아 보입니다.

박한울이 신호석 대표와 함께 회사에 와서 평가했을 때 했던 말.

-박실장님. 우리 회사의 연습생들은 연습량으로 다른 회사에 밀리지 않고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감안하신 거 맞으시겠죠?

-네, 대표님. 그걸 감안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다만, 데뷔해서도 하던 대로만 노력하면 의미가 없죠. 관성적으로 노력하는 게 아니라, 생각도 열심히 해서 경험을 녹여내면 아마 아주 좋은 그룹이 될 겁니다.

그가 묶어주었던 그 멤버대로 데뷔했고.

그녀들은 그때 그가 했던 말을 지금까지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회사가 하라는 대로만 따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좀 더 발전하기 위해서.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아.”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주 어려웠다.

‘재능이 없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 노력으로 때우라고?’

이러한 의심이 들 정도로, 마음 같이 되지가 않았다.

팀의 메인 래퍼이자 막내인 제니카.

그녀는 진이 빠진 듯 누워 있는 멤버들을 일견하며 입을 열었다.

“저희···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퍼포먼스 자체로만 보면 다른 그룹에 밀리지는 않는 것 같은데.”

리더는 제니카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힘들면 오늘은 이쯤 하고 쉴까?”

“아뇨.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저희가 끝없이 성장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느 정도까지 실력이 올라와야··· 아니, 그니까 그게-“

“막막하다는 거지? 어디까지 가는지도 모르고 계속 이런 식으로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원래 뚜렷한 목표 없이 몰아붙이기만 하면 더 금방 지치기 마련.

제니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다른 멤버들도 리더에게 시선을 던졌다.

대놓고 말은 못했으나 자신들도 내심 비슷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 자체는 박실장님의 말로 충분히 납득했는데, 막연한 것 또한 사실이니까.

리더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라. 그래도 최소한 우리가 만족할 만큼은 돼야지. 다른 걸그룹보다 우리가 잘하는 거, 솔직히 말해서 나도 동의하긴 해. 퍼포먼스로만 보면 피에스타 선배님들보다 우리가 더 잘할 거야. 그런데 유현지 선배님은?”

“아.”

“유현지 선배님은 안무가 쌤들이랑 비교해도 안 꿀리시잖아. 자기 색깔도 뚜렷하시고.”

유현지는 다른 아이돌과는 레벨이 달랐다.

그녀는 일류 안무가나 일류 댄서들과 비슷한 레벨에서 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직접 안무도 짠다고 들었다.

“박한울 실장님도 우리 포텐 높다고 하면서 말씀하셨잖아. 생각하면서 연습하고 경험을 녹여내라고. 그럼 아주 좋은 퍼포먼스 그룹이 될 거라고.”

제니카와 더불어 다른 멤버들 모두 눈을 반짝이며 쳐다봤고.

리더는 옅은 미소를 띠우며 말을 덧붙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할 거야. 아직 우리가 갈 길은 멀었다는 거. 박실장님 믿고서 열심히 해보자. 유현지 선배님만큼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랑 묶인 다른 그룹들은 이기는 게 좋잖아?”

제니카는 또렷하게 빛나는 리더의 눈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언니.”

하긴, 유현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실력으로 막연하다, 어쨌다,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됐다.

그녀 또한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계속 노력했다는 거니까.

***

영화 <착한 역할>의 이영진 감독.

이 영화까지 벌써 5편의 상업영화를 성공시킨 국내의 거장 중 한 명이지만.

그는 구선학 감독의 <더 BAD>와의 경쟁에서 밀린 뒤로 자신의 실력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 작품은 자신이 보기에도 ‘착한 역할’보다 더 좋은 영화였으니까.

물론 ‘더 BAD’의 퀄리티에는 조수연 작가와 정채희의 지분이 상당했으나, 어쨌든 자신이 대중들의 취향에 밀렸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적당한 데에서 만족했으면 절대 여기까지 못 왔을 위치.

이영진 감독은 최고가 되기를 언제나 갈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선배님.”

“바쁜데 부른 건 아닌가 모르겠어.”

“하하, 괜찮습니다. 아직 작품 구상 중이라서요.”

이영진은 구선학 감독을 불러 자리를 마련했다.

자신이 쓴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둘은 소주를 몇 순배 나누며 적당히 인사를 나눈 뒤,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벌써 작품을 쓰셨습니까?”

“그래.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

영화가 끝나고 곧바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모두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번 봐줬으면 좋겠어. 난 잘 모르겠어서 말이야.”

이영진 감독은 시나리오를 꺼내 구선학 감독 쪽으로 내밀었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항상 마음속으론 불안감이 함께 했다.

허나, 그건 창작자로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심정이기 때문에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넘겨 왔으나.

지금은 단지 그 정도가 아니었다.

‘확신이 안 들어.’

지금까지 5개의 영화, 그리고 이것까지 하면 이번이 6개째.

나쁜 성적을 거둔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아무래도 이번엔 나쁜 성적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선배님.”

“부담 갖지 말고 봐줘. 쓴 소리 들을 각오는 돼있으니까.”

구선학 감독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뇨. 이런 거엔 저보다 정확한 전문가가 한 명 있지 않습니까.”

“···박실장님?”

지금까지 안목이 빗나간 적 없는 인물.

경력은 짧았으나, 그 짧은 경력 안에 보여준 임팩트는 전설적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분 지금 한창 바쁘지 않겠어? 그리고 난 인연도 없는데.”

“제가 부탁드려보겠습니다. 그래도 저랑은 인연이 있으니까요.”

이영진이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해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자.

구선학은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들어 통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부탁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

“반갑습니다. 영화감독, 이영진이라고 합니다.”

이영진 감독님은 사람 좋은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감독님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윤본부장님께서 만사를 제치고 따라오셨다.

뭐, 나야 특별한 경우라 다른 매니저들과는 달리 인맥을 다질 필요는 없었으나, 윤본부장님은 좀 다르니까.

“하하! 이영진 감독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잘 지내셨죠?”

“윤팀장··· 아니, 이제 본부장이지? 축하가 늦어서 미안하네.”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연락을 못 드려서 그런 거죠. 본부장 되고 너무 바빴어서···. 죄송합니다.”

이게 사회생활인가 싶다.

아무튼 잘됐지.

윤본부장님이 있으니,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숨막힐 일은 없겠다.

사실 부탁이라지만 난 기대를 갖고 이 자리에 왔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찾을 수 없어, 민정 씨의 차기작을 고르는 데 애를 먹고 있었는데.

이영진 감독님의 작품이라면 내가 먼저 부탁해서라도 읽어봐야지.

“박한울 실장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시나리오 좀 읽어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장르는 재난입니다.”

더군다나 심민정이 원하는 재난 영화.

나는 씨익 웃으며 시나리오를 건네받았다.

“제가 오히려 영광이죠.”

난 더 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바로 시나리오를 펼쳤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천천히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려냈다.

한겨울, 매년 가던 계곡 인근의 펜션에 MT를 간 대학교 동아리원들이 어마어마한 폭설에 갇혀버리는 내용으로.

재난과 생존을 다루고 있었다.

‘일단 소재 자체는 나쁘지 않아.’

비록 엄청난 스케일의 재난 영화는 아닐지라도, 이렇게 작은 스케일에서 주는 재미도 분명히 있었다.

이영진 감독 또한 이를 잘 알기 때문에, 한정된 등장인물과 한정된 공간에서 줄 수 있는 재미들을 많이 뽑아내고 있었고.

다만.

‘···딱히 큰 매력은 없네.’

거기까지였다.

재미도 있고, 관객들에게 ‘웰메이드’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대박이 터지지는 않을 영화.

‘뭐라고 말해야 되지?’

어떻게 말을 꺼낼 지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덮었는데.

“···.”

“···.”

고개를 들어보니,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어서 이런 분위기인 줄 알아차리지 못했나 보다.

어쩌면 내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 일부러 조용히 한 것일 수도 있고.

“그래서···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영진 감독이 컵에 따른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에 물었다.

저 정도 커리어를 가졌으면서도 일개 매니저인 내 평가 앞에서 긴장을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자존심을 세우실 것 같지는 않네.’

난 적당히 돌려 말하려던 생각을 고쳤다.

그리고 그냥 들었던 생각을 모두 솔직하게 내뱉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문득 머릿속으로 심민정이 했던 말이 스쳤다.

-재난, 반전, 공포. 셋 다는 아니더라도 이런 요소들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짜릿하잖아요. 지금은 이렇게 뭔가 확 뒤집어지는 게 땡기는 것 같아요.

‘그래, 짜릿한 맛이 부족한 거야.’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게 답을 보채지 않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확신이 서린 단단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장르를 추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반전이라거나, 공포라거나.”

“반전이랑 공포 말입니까?”

“잘하면 완성도랑 임팩트를 모두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말은 곧, 지금의 시나리오는 완성도와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얘기와 다름없었으나.

이영진 감독님은 당장 반박하는 대신, 손으로 턱을 쓸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입꼬리를 쭈욱 끌어올렸다.

마치 부족했던 조각을 드디어 찾아낸 것처럼.

그의 눈동자는 흐릿한 불안감 대신, 자신감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가뜩이나 배우들의 역할이 중요했었는데, 이젠 더 중요해지겠군요.”

“예. 장소와 인물이 한정적이기도 하고, 상황도 특수하니까요. 배우들의 연기력이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겁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 ‘급한 일’이 뭔 지 못 알아채는 사람은 이중에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저 머릿속에는 보석 같은 아이디어가 번쩍거리며 빛을 뿌리고 있겠지.

나는 그가 떠나기 전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아이디어의 단초를 줬는데, 나도 얻는 거 하나쯤은 있어야지 않겠어?

“감독님. 혹시 최근에 드라마 좀 보셨습니까?”

“···’BJ김만수’랑 ‘수세미’를 특히나 재밌게 봤습니다.”

그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심민정이 출연한 드라마.

역시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른 베테랑답게, 그는 내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다행이네요.”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우리는 심민정의 출연을 직접적으로 약속하진 않았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지만, 그 아이디어가 적용된 시나리오가 좋을 지 안 좋을 지는 아직 모르는 거기도 하니까.

우리는 그저, 암묵적으로 뜻을 나눴을 뿐이었다.

< 더욱 높은 곳으로!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