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43화 (143/170)

< 박송이 선배님의 조언 >

처음엔 박한울 실장과 식사나 함께 하며 조언을 구할 생각이었다.

그때면 오늘 자신이 연기하는 걸 본 뒤일 테니까.

그런데, 정채희의 연기를 보곤 생각이 바뀌었다.

“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함정에 빠졌다고? 그 말이야? 내가 죽을 거라고?”

그녀와 몇 작품이나 함께 하며 감탄스러운 연기를 참 많이도 봐 왔지만.

지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언제나, 언제나, 볼 때마다 더욱 발전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주연이라는 자리에 걸맞게 정말 모든 이들의 집중을 끌어당기는 괴물 같은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질투 나네···.’

또다시 성장한 그녀를 보니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미 그 재능을 지켜보는 것에 익숙해져서 이 정도면 탈력감이 들 만도 한데, 그러긴커녕 오히려 질투가 났다.

박송이의 시선은 정채희가 앉은 곳의 맞은편.

팔짱을 낀 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박한울에게로 향했다.

정채희가 가진 재능도 재능이지만, 이토록 놀라운 발전 속도에는 그의 영향이 컸을 게 자명했다.

박송이는 잠시 대사를 치는 것도 잊고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 박송이 씨?”

“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반나절 동안 힘겹게 진행된 대본 리딩이 끝났을 때.

정채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박한울의 옆에 붙었다.

그리고 자신을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아무래도 끝나고 같이 밥 먹자고 한 것 때문에 저러는 것 같은데.

이제는 밥으로 끝낼 생각이 싹 사라져버렸다.

좀 더, 적극적인 도움을 받고 싶었다.

자신도 정채희처럼 멈추지 않고 끝없이 발전하고 싶었으니까.

‘대신 쟤한테는 이따가 조언이나 해줘야겠네.’

아직 고생하고 있는 것 같으니, 친한 선배로서 이 정도 도움은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박송이는 이따 정채희에게 건넬 조언을 떠올리며 진하게 미소 지었다.

“저기요, 겉바속촉 씨.”

“예, 시라송이 씨.”

옆에서 털을 바짝 세우고 있는 고양이는 못 본 체하고, 박한울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혹시 오늘 많이 바빠요?”

“왜요? 식사-“

고개를 젓고는 그의 말허리를 뚝 잘랐다.

“안 바쁘면 우리 집으로 올래요? 맛있는 거 대접해드릴게요.”

옆에 있던 고양이의 눈이 커다랗게 키워졌다.

***

우리는 고깃집으로 가는 대신 박송이의 집으로 향했다.

박송이와 그녀의 매니저, 그리고 나와 채희까지.

박송이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고, 난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거절해도 되긴 했지만 어차피 그리 바쁜 일도 없었으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거다.

‘역시··· 집이 엄청 좋네.’

경력이 짧지 않은 스타다운 집.

사실 박송이의 매니저와 채희까지 올 필요는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같이 들어오게 되었다.

“정채희. 잠깐 들어와 봐.”

우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박송이가 채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채희에게 나쁜 말은 하지 않겠지.

그냥 따로 할 얘기가 있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거실에는 나와 박송이의 매니저가 함께 남겨졌다.

“박실장님.”

그가 나를 불렀다.

“네.”

그는 채희와 박송이가 들어간 방을 힐끗 바라보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희 송이 잘 챙겨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잘 챙겨주긴요.”

말로는 이렇게 겸양을 떨었으나, 하나하나 따져보면 도움을 준 게 그리 적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녀에게 선뜻 도움을 주려는 이유는··· 음.

어차피 채희랑 같은 작품을 찍기 때문에?

그녀가 연기를 잘하면 같이 출연하는 채희에게도 이득이 돼서?

‘아니.’

사실 이는 명목상의 이유일 뿐, 그냥 나와 어느 정도 친분이 쌓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도움을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하하. 잘 챙겨주시는 거 맞아요. 송이도 겉으로만 저렇게 틱틱거리지, 박실장님께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내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직접 말했던 적도 있고, 언제나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만약 아무 고마움도 느끼지 않았으면 괘씸해서 절대 안 도와주지.

내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그는 말을 덧붙였다.

“송이가 정말 열심히 하는데 전 박실장님처럼 도와줄 수가 없거든요. 그런 안목이 없어서. 송이가 앞으로도 채희 씨랑 같은 작품을 할 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작품 안 하더라도 앞으로도 잘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이건 매니저가 그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는 걸 거다.

나도 이런 재능이 없었으면 아예 매니저 일을 때려쳤거나, 아니면 저렇게 도움이 되고 아쉬운 사람에게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겠지.

마음을 더 쓰면 좋고, 그게 아니어도 손해를 보는 건 아니니까.

난 새삼스레 내가 가진 재능에 감사하며,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됐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겠네.’

지금까지도 부지런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일했지만.

요즘 주변의 아티스트들이 모두 궤도에 올라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던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아니 당분간만이라도 좀 더 바쁘게, 좀 더 주변을 둘러보며 능력을 키워나가야겠다.

‘하연 씨 콘서트도 보러 가야지.’

응원도 할 겸, 공부도 할 겸, 그리고 피드백을 할 게 있으면 피드백도 주고.

내가 혼자서 이렇게 작은 결심을 세우고 있을 때.

채희와 박송이가 들어갔던 방의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채희가 얼굴을 새빨갛게 달궈진 채로 쭈뼛쭈뼛 걸어 나왔다.

“음?”

안에서 뭘 했길래 저런 얼굴이 되었을까 생각하며 그녀를 빤히 쳐다봤는데.

채희는 제 뒷목을 문지르며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시라송이 씨, 쟤 왜 저래요?”

“글쎄요?”

박송이는 어쩐지 음흉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말 안 해줄 거면 저도 안 도와드릴 거임.”

“···진짜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말해봐요. 왜 저러고 있는지. 애가 이상해졌잖아요. 안에서 대체 뭔 얘기를 했길래.”

아직도 뒷목을 문지르며 시선을 바닥에 처박고 있지 않은가.

내가 그런 채희를 향해 턱짓하며 말하자, 박송이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런 게 있어요. 무슨 선후배끼리 얘기 나눈 것까지 다 알려고 그래요? 그쪽 모쏠이죠?”

“참나. 갑자기 얘기가 왜 그쪽으로 새요? 뭐, 모쏠이라고 치죠.”

나는 코웃음을 치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후,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배도 고픈데.”

자연스러웠을 거다.

“이봐요. 제가 연기 지도 좀 해드릴까요?”

아니, 자연스럽지 않았나 보다.

젠장.

***

식사를 마치고, 박송이에게 아주 자세하고도 혹독한 피드백을 준 뒤.

나와 채희는 박송이의 집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오빠, 진짜 모쏠이에요?”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럼 언제 사겼었는데요? 제일 길게 사귄 건요? 마지막은?”

난 그녀의 질문 폭탄에, 역으로 질문하며 받아쳤다.

“넌 아까 박송이 씨랑 방에서 뭔 얘기했는데?”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운전하느라 전방을 향했던 시선을 살짝 옆으로 옮기니, 그녀는 아까처럼 빨개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에, 궁금증이 커진 나는 더 재촉했다.

“뭐냐니까?”

“···간단한 조언이요.”

“무슨 조언?”

“···대사요.”

점점 질문할수록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자, 난 그냥 답을 듣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고, 내게 향하는 질문을 막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그래, 오늘만큼은 조용히 가는 것도 좋겠다.

나는 깨지지 않는 정적 속에서 계속 차를 운전했고, 얼마 안 가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잘 들어가. 오늘 수고했어. 리딩에서도 좋았고.”

꼼지락거리며 안전벨트를 푼 그녀는, 나를 흘끗흘끗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저···.”

아까 방에 들어간 다음부터 어마어마하게 답답해져버린 그녀에게, 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아까부터 진짜 왜 그래? 똥마려운 사람처럼. 아니··· 진짜 똥마려워서 그래? 그럼 진작 말하-“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한 말에, 채희는 내 말을 자르며 버럭 소리쳤다.

“아니! 쫌! 진짜!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한결 같아요?”

“···뭐가?”

“그러니까 모쏠이지!”

성격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은데, 그다지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했던 게 좀 더 나았을지도?

“모쏠 아니라니까.”

도끼눈을 뜬 그녀는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실수한 건가···?”

그래도 여자니까, 똥마렵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

“나올 것 같냐고 물어볼걸.”

아무튼 바쁘게 옮기는 저 걸음걸이를 보아하니, 급하긴 했던 모양이다.

***

지방에서 열리는 현지의 공연들이 모두 무사히 끝났고, 이제 첫 번째 해외 투어 국가인 일본으로 출국할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요 며칠 동안 난 더욱 바쁘게 보내야 했다.

사흘간 일본에 가는 거라서 그 준비도 해야 했고, 출국하기 전에 처리할 일들을 모두 처리해야 했으니까.

그래도 다행히 오늘은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송하연의 단독 콘서트 두 번째 날.

어제는 중요한 씬을 찍는 심민정의 촬영 현장을 가야 해서 공연에 가지 못했지만, 오늘은 가능했다.

난 그녀의 공연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살짝 설레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뭐 입지?”

평소라면 이런 고민을 안 했을 텐데.

오늘은 왠지 꾸미고 가고 싶었다.

모쏠이냐고 자극하는 채희와 박송이 때문에 외모에 신경을 쓰려는 마음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난 진지한 눈으로 옷장을 뒤적거렸다.

***

송하연은 대기실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끓어오르는 화를 삭였다.

어제의 공연에서 조명이 너무 밝은 것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공연이 끝난 다음에 분명히 피드백을 전달했는데.

오늘 와서 보니 바뀐 것 없이 그대로였다.

분명히 어제 리허설 때도 말했었는데.

“후우-“

방금 전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와서 그런지, 대기실의 분위기는 한없이 차가웠다.

지그시 감았던 눈을 다시 뜨니, 최팀장님이 자신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팀장님. 어떻게 지금까지 완벽하게 공연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을 수가 있을까요? 아니, 지적을 해주는데도 안 고쳐지면 대체 어쩌자는 건지···. 저 사람들 자존심 세우고 아집 부리는 거 이대로 넘어가야 돼요? 저건 무능한 것도 아니에요. 알면서 안 하는 거니까.”

“일단 오늘 공연에 집중하자. 공연 끝나면 내가 잘 처리할게.”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팀장님도 화나셨을 텐데, 저 위로 안 해주셔도 돼요.”

팀장님의 말마따나, 관객들을 기쁜 얼굴로 맞이하기 위해 하연은 애써 화를 가라앉히려 했다.

그런데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박한울이 들어오며,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저 왔어요. 준비는 잘 하고 계셨어요?”

송하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실장님! 일찍 오셨네요?”

“네. 준비하는 데 방해될까 봐 공연 끝나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그냥 시작 전에도 인사하려고 왔어요. 저 방해된 거 아니죠?”

하연은 밝고 명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해라뇨. 응원하러 와주셨는데 당연히 힘 나죠. 여기 앉으세요. 음료수 드실래요?”

“좋죠.”

“그런데 오늘 평소보다 좀 더 멋있으신 것 같아요.”

“하연 씨 공연이라서 좀 챙겨 입어봤는데··· 안 어울려요?”

“되게 잘 어울려요.”

화를 가라앉히며 기분을 끌어올리려 했었는데,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저절로 그렇게 돼버려서.

***

채희는 집에서 대본을 연습하다 말고, 퍼뜩 떠오르는 흑역사에 온몸을 뒤틀며 고통받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흑역사가 아니긴 했다.

말을 꺼내려 했을 뿐, 실제로 꺼내진 않았으니까.

‘야, 남자들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뻔하고 노골적인 것도 오히려 되게 좋아하는 면이 있다? 그러니까 확 내질러버려.’

‘뭐, 뭘요? 그리고 남자라뇨? 제가 무슨 남자가 있다고. 저 아무도 없어요! 진짜예요! 저 관심 있는 사람 정말 없다니까요? 조금 고민이 되거나, 막 저도 잘 모르겠고 헷갈리거나, 뭐 그런 사람 정말 단 한 명도 없어요. 정말로요!’

‘어휴. 그래. 그런 사소한 건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아무튼, 그런 사람이 생기면 이렇게 말하라고.’

이어지는 박송이 선배의 말을 듣고는 기함하며 입을 떡 벌렸었다.

저번에 선물을 추천해줄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 역시 선배님은 상상을 초월했다.

선배가 전에 사귀었던 사람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선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마 사귀었던 사람이 다섯 손가락은 족히 넘어갈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를 사귄 경험이 없는 자신은 선배가 조언해준 대로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며, 남자를 여럿 사귀어봤을 것으로 추정되는 박송이 선배라면 모를까, 자신은 사귄 적도 없었고 그렇게 말할 자신도 없어서.

또한, 아직 잘 모르겠어서.

그런데 유심히 그의 반응을 살펴보니, 자신과 같은 모쏠인 것처럼 보여 왠지 자신감이 불쑥 차올랐고.

이에 충동적으로 말을 뱉으려 한 거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다행이지.

만약 정말로 그 말을 내뱉었다면 그 뒤로 어떻게 됐을지 아찔하기만 하다.

“근데 진짜··· 어떻게 됐···으려나···?”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넋을 놓던 채희의 얼굴은.

그때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박송이 선배님의 조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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