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ESTAR >
강해정, 송하니, 이효진, 성윤지.
이 네 명이 뭉친 걸그룹의 이름은 ‘피에스타’로 정해졌다.
‘Fiesta’, 스페인어로 ‘축제’라는 뜻인데, 끝에 r을 붙여, ‘star’라는 뜻도 추가했다.
너무 구려서 과연 누구 아이디어인가 했더니.
“제가 지었어요. 괜찮죠?”
송하니였다.
뮤비 촬영 직전, 마지막으로 퍼포먼스를 점검하기 위해 연습실에 왔는데, 충격적인 전말을 알게 되었다.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싶어서 표정을 살펴봤더니.
그녀들은 퍽 만족스러운 모양인지 옅게 미소 지으며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산뜻하고 괜찮네.”
이름이야 뭔 대수랴.
냉정하게 말해서 현재 데뷔한 아이돌 그룹 중 네이밍 센스가 돋보이는 그룹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알맹이가 중요하지.’
난 이름 따위야 대충 넘어가고, 그녀들과 좀 더 대화를 나눴다.
본격적으로 점검에 들어가기 전에 안부를 묻는 정도의 담소로.
“연습 좀 해보니까 어때? 편곡된 버전이나 안무 같은 건 마음에 들어?”
그녀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고.
이효진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마음에 드는 것 같아요.”
누구보다 가수가 되기를 바랐으면서도 현실을 시니컬하게 바라봤던 YU엔터 출신의 멤버, 이효진.
그녀의 얼굴에선, 곧 데뷔할 아이돌 그룹의 맏언니로서 으레 짊어지고 있을 근심이 엿보이지 않았다.
이젠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고 완전히 희망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멤버들의 인성도 걱정할 필요 없었고, 곡과 안무도 마음에 들며, 회사도 대형 기획사니까.
게다가 이런 반응까지 보일 정도면 분명히 연습도 잘 됐을 터.
난 대놓고 물어봤다.
“자신 있는 모양이네?”
그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만족스러워하는, 한 그룹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효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 실력 말고도, 다른 것들이 너무 완벽해서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곡도, 안무도 저희랑 너무 잘 맞는 것 같거든요.”
그녀의 말에 송하니가 덧붙였다.
“그냥 저희가 너무 잘 맞기도 해요. 곡까지 저희한테 맞추니까 뭔가 더 확! 와닿는 느낌? 실장님이 말씀하신 시너지가 어떤 건지 이제 저희도 제대로 알 것 같아요.”
빚까지 져가며 그룹 제작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이는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이라는 투자의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보람, 그리고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만들어가는 제작의 즐거움.
이는 솔로 아티스트 제작과는 조금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여러 명이 더해져, 각자가 가진 재능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난 그녀들의 이런 밝은 기운에 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하지만, 막상 까보면 아직 연습이 덜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럼 확인해보면 되는 일.
“이제 볼 때 된 것 같은데. 바로 시작할까?”
내 말에 그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잡았고.
청순 발랄의 컨셉에 알맞게, 밝고 신나는 멜로디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또한, 그녀들의 표정과 더불어 그녀들이 내뿜는 기운 역시, 곡의 컨셉과 느낌을 한층 더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녀들과 나만 있는 연습실.
그녀들은 이곳의 유일한 관객인 나를 기어코 팬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자신 있을 만했네.’
난 그녀들이 브레이크 없이 뽑아내는 끼를 단독으로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정말 기대해도 될 것 같다.
***
방 안에서 홀로 대본 연습에 열중하던 최락현은, 잠시 대본을 덮어놓고 얼마 전에 있었던 미팅을 떠올려봤다.
제작사에서 온 연락, 그리고 시작된 오디션.
연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그들은 자신을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고, 심지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형조차 자신을 떨떠름하게 바라봤었다.
아무리 박한울 실장의 추천이 있다 하더라도, A급 배우를 제치고 자신을 캐스팅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스러웠을 터.
허나, 연기가 끝난 뒤엔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렇다고 막 충격을 받고 확신을 얻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자신과 저울질하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A급 배우일 테니까.
어찌됐든 결국 캐스팅이 되긴 했는데 나중에 형한테 들은 바로는, 역시나 박한울 실장님의 추천이 캐스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너 연기 잘하고 이 역할 잘 소화해내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A급 배우를 포기할 만큼 엄청 대단했던 건 아니야. 이 바닥에서 인지도랑 경력이 얼마나 중요한데. 박한울 실장님 추천 아니었으면 너 안 썼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자만하지 말고 더 열심히 연습해야 돼. 너 도와준 실장님 얼굴을 봐서라도.’
최락현은 형의 말을 떠올리며 조소했다.
“감독이란 사람이 생색은. 그냥 좀 좋게 좋게 말해주면 뭐 어디가 덧나나? 하여간 갑질이 아주 습관이야, 습관. 몸에 배였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최락현은 잠시 덮어두었던 대본을 펼쳤다.
그런데 그때.
열린 방 문을 통해, 형이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영화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형.
요즘엔 집에서 잠을 자기는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야. 연습은 잘 하고 있지? 게으름 피우지 마라?”
형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건네는 말에, 락현은 손에 든 대본을 펄럭펄럭 흔들며 말했다.
“아니 이거 안 보여, 이거? 거 참! 배우 집중하고 있는 중에 끊기나 하고 말야. 가만히 있으면 도움이라도 되지, 방해는 왜 방해야.”
최창수는 피식 웃으며 동생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너 현장에선 신인 배우답게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배우 됐다고 자존심 세우거나 사고 치지 말고.”
“환경이 받쳐줘야 배우 노릇도 할 거 아냐. 집중한다니까 또! 또! 말 거네? 어? 이런 환경에서 배우가 어떻게 집중을 하나? 내가 이래봬도 안 긁은 복권으로 이 바닥에서 소문이 쫘아악 깔렸어. 지금 얼마나 난리 난 줄 알아? 그 박한울 실장님이 인정한 사람이라고, 내가.”
최락현은 구겨진 미간과는 다르게 신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벌써 연락 온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니까? 제발 우리 회사 좀 들어와달라고 아주 사정사정을-“
“박한울 실장님은 들어오란 말씀 없으시고?”
“···지금 몸값 부풀리는 중이야.”
“퍽이나 그러겠다.”
다른 회사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아직 박한울에게 아무런 제안도 들은 게 없어서.
‘바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안을 받기는커녕, 그 조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씨! 연락 올 거라고! 어? 내기할래?”
“다른 작품에서도 박실장님이 추천한 배우가 어디 한둘인 줄 알아? 끝까지 연락 없으면 그냥 영화 끝나고 적당한 회사 들어가. 지금은 어떻게 혼자 할 수 있더라도 앞으로는 매니저 없으면 힘들 거야.”
최락현은 다른 배우들과 완전히 같은 취급을 하는 형의 말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다 회사가 있고! 난 없고! 그리고 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연기 잘할걸!?”
“선배님들이라고 해야지, 인마. 너 이런 말 하나하나가 습관 돼서 나중에 문제 생긴다니까?”
잠시 형제 간의 우애를 다지는 시간을 가진 최락현은 방 문을 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두고 봐. 나한테 제안 안 하곤 못 배기게 만들 테니까.”
사실, 박한울은 그냥 최락현이 성실히 임하는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지, 잠시 지켜보려던 거였지만.
최락현은 이것도 모른 채, 혼자서 투지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섀도우 복싱이었으나, 나쁜 효과는 아니었다.
***
넷플릭스 드라마,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 시즌2의 대본 리딩 바로 전날.
나는 채희와 함께 마지막으로 연습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난 그녀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집에 들어온 뒤로, 채희는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딱 하나, 짐작이 되는 이유가 있긴 했다.
‘아니, 확실하지.’
액션 스쿨을 다시 다니기 시작하며 식단 관리도 다시 시작했기 때문일 터.
난 시즌1 때 그녀를 관리했던 노하우를 토대로 이번에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진짜 악마가 따로 없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악독할 수가 있어요?”
난 어깨를 으쓱이며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이 뻔뻔한 태도가 오히려 더 화를 키운 모양인지, 그녀는 눈을 더욱 사납게 뜨며 말했다.
“’참 잘했어요’ 도장 10개 모으면 치킨이랑 떡볶이 맘대로 먹게 해준다면서요!”
난 상점 제도를 도입했고, 높은 기준을 만족시켜야만 도장을 찍어달라고 액션 스쿨 선생님께 말해놨다.
정말 엄격하게 해달라고 했으니, 도장을 모으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을 터.
결국 그녀는 도장 10개를 모으자마자,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이 밝은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말은 바로 해야지.
“야, 내가 언제 ‘맘대로’라고 했어? 그냥 치킨이랑 떡볶이 먹게 해준댔지.”
후라이드 닭다리 두 개와 종이컵 두 컵 분량의 떡볶이를 보상으로 내려줬다.
솔직히 이 정도면 그리 적은 것도 아니지 않나?
“아니 그래도 상식적으로 맘대로 먹게는 해줘야죠! 어차피 다이어트 때문에 위 줄어서 얼마 먹지도 못 하는데!”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녀의 위는 내가 잘 안다.
저번 시즌1의 촬영이 끝난 당일, 우리는 제작진들과 함께 쫑파티를 했고, 그녀는 다람쥐처럼 볼을 터질 듯이 부풀리며 한 편의 먹방을 찍었었다.
식단 관리를 오래 지속했던 그때보다 지금의 위가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을 테니, 맘대로 먹게 해줬다간 대참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
난 더 이상 입씨름을 이어가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약간의 당근을 주기로 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내일 리딩 끝나면 소고기 먹으러 가자.”
이건 또 혹하는 모양인지,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작게 웅얼거렸다.
“···얼마나 먹을 수 있는데요.”
“2인분 먹게 해줄게.”
“···받고 비냉까지. 콜?”
“다이. 그냥 없던 걸로-“
“아!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 딱 2인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람이 왜 이렇게 단호하냐면서 불만스럽게 투덜대며 입술을 삐죽거렸는데.
그래도 고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도는지, 금방 미소를 되찾았다.
입술을 혀로 핥는 걸 보니 군침이 도는 모양이다.
난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까짓 거 몰래 먹고 안 먹었다고 속이면 될 텐데.’
그녀는 내게 투덜대고 조르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정말 딱 정채희다운 모습이었다.
“자, 그럼 이제 연습 시작하자.”
대본을 펼치며 말하자, 채희는 방긋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진짜 단순하기 짝이 없지.
***
다음 날, 채희를 차에 태우고 샵으로 향했다.
리딩이 끝나고 고기를 먹을 생각에 신이 났는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난 그녀를 보고 피식 웃으며 샵의 문을 열었는데.
여기에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왜 이제 와요? 빨리 좀 다니시지.”
박송이.
그녀가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녀의 뒤에 서서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매니저의 모습을 보아하니,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난 헛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늦다뇨? 우리가 언제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나요?”
“제가 언제 약속했다고 했어요? 좀 빨리 다니라는 거지. 오늘 리딩인데도 제가 더 빨리 준비하러 왔잖아요. 리딩장에 다른 선배님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잘나가는 신인일수록 이런 면에선 더 조심하는 게 좋아요. 뒤에서 또 어떤 말이 오갈지 모르는 거니까.”
그녀의 말에서 틀린 구석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 시간대로 준비해도 나름 일찍 도착하기는 할 텐데, 그래도 더 일찍 도착하는 편이 보기 좋기는 하다.
채희처럼 일찍 주연급이 된 스타라면 더더욱.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갑자기 여기 샵에는 왜 오신 거예요? 시라송이 씨가 다니시던 샵은 어쩌시고.”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채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연습은 많이 했니?”
시라송이라고 불러서 말을 씹는 건지, 아니면 그냥 말을 돌리는 건지 모르겠다.
채희는 그런 건 알 바 아니라는 듯, 박송이에게 쫄래쫄래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네! 근데 연습보다 식단 관리랑 액션 스쿨 다니는 게 더 힘들었어요. 어떤 일 있었는지 알아요? 제가 진짜 억울해가지고-”
채희의 말은 샵의 담당 선생님에게 손목이 끌리고 나서야 끊겼고.
나는 박송이의 매니저와 함께 의자에 앉아, 그녀들의 스타일링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둘 다 스타일링이 끝나고 샵에서 나갈 때가 되자.
박송이는 내게 툭, 던지듯이 말을 건넸다.
“저번처럼 오늘도 리딩 끝나고 밥이나 먹으러 가요.”
뭐, 나쁘지 않지.
나름 친하다면 친한 사이이기도 했고, 어차피 채희랑 고기 먹으러 가기로 했으니까.
박송이도 같이 가면 되겠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우리는 샵에서 나와, 각자의 차에 올라탔는데.
조수석에 앉은 채희는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연습을 하려는지, 대본을 펼치며 대사를 내뱉었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채희야, 그거 네 대사 아니잖아.”
저번에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던 것 같은데.
“조용히 해! 넌 앞으로 입 열지 마!”
“···그런 대사는 없지 않았어?”
“애드리브 연습인데요?”
“이상하게 왜 나한테 하는 말 같지?”
“자의식 과잉이에요.”
난 나지막히 탄성을 내뱉었다.
“오. 네가 그런 말도 알아?”
“···.”
돌아오는 건 고양이처럼 표독스러운 시선이었다.
아무래도 고깃집에 가서 비냉 한 접시 덜어주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 같았다.
< FIESTAR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