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39화 (139/170)

< 기회 한 번만 주시면 안 될까요? >

가제, ‘양녕을 탐한 무녀’의 감독인 최창수.

그는 슬리퍼를 신고 터벅터벅, 빌라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우.”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으니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봐야 얼마 못 가겠지만, 그래도 잠시라도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그놈의 돈이 또 문제네.”

그는 작품을 계약한 제작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감독님, 저희가 최대한 투자를 모으고 있는데, 그리 넉넉하지가 않아요. 사극 영화가 또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서 캐스팅은 조금 이해를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양녕대군 역할이 좀 중요해서요. 다른 배역은 그렇다 쳐도 양녕만이라도 좀 힘을 싣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저희도 당연히 알죠. 이 작품에서 얼마나 중요한 배역인지. 그래서 최선을 다해보고 있는데 그 ‘적당한’ 분들이 페이가 좀 많이 세요. 잘생기고 연기 잘하고 젊은 분이 필요한 거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최대한 고려해서 캐스팅 보드를 뽑아보자고 말했지만, 그래봐야 C급, 아니 그 이하일 게 뻔했다.

“하긴··· 내가 그 급인데 뭘 바라냐.”

최창수는 짧게 혀를 차고 씁쓸하게 웃었다.

잘생기고 연기 잘하고 젊은 배우, 그러면서도 망나니 같은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사람.

페이가 세고 찾기 힘든 게 당연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좋겠네···.’

담배를 필터에 닿을 때까지 다 핀 뒤, 다시 힘빠진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가 집 문을 열었는데.

“뭐야. 형 집에 있었어?”

돼지 저금통을 커터칼로 가르며, 씨익 웃고 있는 친동생이 보였다.

“···.”

“형, 나 강의 들어야 돼서 책 사야 되는데 돈 좀 빌려줄 수 있을까? 알바해서 금방 갚을게.”

“아직 수강 신청도 안 했는데 벌써 책을 산다고?”

“하하하! 그런가? 아, 맞네. 내가 착각했다. 요즘 이렇게 정신머리가 없어, 내가.”

해맑은 척 뻔뻔하게 웃고 있는 양녕, 아니 친동생.

최창수 감독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너··· 일 하나 안 해볼래?”

“뭔데. 돈 많이 줘?”

군대에서 막 전역해 한국종합예술학교 연극영화과에 복학하려는 친동생이자, 실력은 꽤 있던 걸로 기억하는 배우 지망생.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더 양녕대군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

하늘에서 뚝 떨어지길 바랐는데, 알고 보니 방구석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

최창수의 동생, 최락현은 시나리오를 정신없이 탐독했다.

벌써 몇 번을 읽고, 몇백 번의 대사를 내뱉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읽고 뱉고, 읽고 뱉고, 상상하며 몰입하고.

심지어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역사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까지 했다.

“에이 씨. 뭔 놈의 말이 이렇게 어려워.”

입은 투덜대지만 그의 눈빛은 한없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집중해서 연습하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무음 모드였는데 언제 다시 진동 모드로 바뀌었는지.

집중을 깨뜨리는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받았다.

“누구세요!”

-오빠 전역했죠? 전역했는데 왜 연락을 안···.

“나 바쁘니까 끊어.”

최락현은 전화를 끊고 아예 핸드폰마저 꺼버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지도 않았기에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다.

그러나,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금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오로지 이 작품과 이 배역.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렇게 방구석에서 연습과 공부, 그리고 운동을 병행하며 모든 열정을 불태우길 몇 주.

제작사에 갔다가 돌아온 형은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락현아, 미안하다. 내 영화에 이성호 선배님이 출연하고 싶으시대! 너도 HJ엔터 박한울 실장님 이름은 들어봤지? 그분이 내 작품이 좋다고 하셨다더라. 이제 투자금도 엄청 들어오고, A급 배우들도 줄 설 거야.”

“···.”

형은 미안하다는 말을 굉장히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자기 영화가 잘될 거라니까 기쁜 건 당연한 거겠지.

최락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형이 닫고 나간 방 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잠시 정신이 나갔는지, 얼떨떨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멍을 때리다 보니, 갑자기 분노가 치솟아 올라왔다.

형이 잘되는 건 좋지만, 나는? 이제 와서 말을 바꾼다고?

한동안 입술을 씰룩거리며 방구석을 거닐다가, 방금 전까지도 계속 연습하느라 손에 쥐고 있던 시나리오에 신경이 뻗었다.

시나리오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최락현은 너무 억울하고 짜증이 난 나머지, 문을 열고 버럭! 소리쳤다.

“이런 씨! 나 시켜준다고 했잖아! 좆 빠지게 연습했는데 이제 와서 하지 말라는 게 뭔 개 같은 소리야!”

“야. 원래 이 바닥이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그래. 내가 단편국제영화제에서 상 받고 4년 동안 아무것도 못한 거 보면 모르냐?”

“됐고! 양녕대군 내가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아무튼 미안하게 됐다. 억울하면 너도 스타 되고 찾아오든가.”

최락현은 한동안 형에게 욕이란 욕은 다 퍼붓기도 하고, 매달리듯이 애원하기도 했지만.

전부 무용지물. 빌어먹을 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락현 또한 이대로 낙담하며 주저앉지 않았다.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예비역에게 있어, 불가능이라는 건 없었으니까.

‘방법은 찾으면 되는 거야.’

최락현은 곧바로 HJ엔터테인먼트의 주소를 검색했다.

***

「소속사 HJ엔터테인먼트, "유현지의 첫 번째 단독 콘서트가 ‘2회’로 진행되는 양일 모두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대규모 공연장으로 손꼽히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이었기 때문에 신인 여성 솔로로선 의미가 남달랐는데, 과연 유현지의 팬덤의 화력은 대단했다.

온라인 예매처를 통해 진행된 유현지의 이번 공연 예매는 동시접속자만 약 5만 명을 기록하며, 예매개시 직후 1분 만에 양일 준비된 좌석 모두가 순식간에 매진을 기록했다.」

난 기사를 읽으며 흐뭇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팬덤 화력이 끝내주긴 한다니까.’

다른 아티스트들에 비해 열렬한 팬들이 유난히 많다 보니 티켓이 매진될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매진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내가 팬들 열정을 너무 과소평가했네.’

-아;;;; 진짜 오바다;;;; 아···. 진짜··· 이건 아니지···. 우리집 인터넷 1기가 짜린데··· 실패하는 건 아니지 않나 진짜?

-첫 콘!!!! 이건 무조건 가야짘ㅋㅋㅋㅋㅋ 아 이걸 대체 어떻게 놓치지? 난 핸폰으로 했는데도 한방에 되던뎈ㅋㅋㅋ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 떴을 때 모니터 뿌실 뻔. 근데 모니터라도 뿌실 걸 그랬어. 내 멘탈이 뿌셔질 것 같아.

-성공 나이스~^^ 순조롭네요. 전 이틀 다 예매 성공했습니다~^^

티켓팅으로 희비가 엇갈린 팬들의 반응을 즐겁게 살피며 퇴근길에 올랐다.

1층으로 내려와, 야외 주차장으로 향하려 했는데.

사옥 입구 쪽에서 울리는 큰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박한울 실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양녕 할게요! 저 진짜 잘할 수 있거든요?”

경비원에게 붙잡힌 채,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남성이 보였다.

그에게 시선이 사로잡히자, 그는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기회 한 번만 주시면 안 될까요? 딱 한 번··· 아! 아! 아저씨! 아파요! 잠깐만요! 지금 얘기하잖아요!”

여기가 제작사도 아닌데 다짜고짜 나를 찾아와서 ‘양녕’을 하겠다며 억지를 부리는 저 태도.

눈에 불을 켜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과, 어쩐지 날라리와 망나니의 중간 그 어디에 놓여 있는 듯한 분위기.

그리고 벌어진 어깨와, 썩 괜찮은 얼굴과 신체 비율.

‘으음.’

고민은 짧았다.

‘시간이 남기도 하고··· 저렇게 원하니까.’

난 그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말했다.

“그럼 잠깐 뵐래요?”

경비원들의 손에서 힘이 풀리자, 그는 구겨진 옷을 탁, 털며 말했다.

“거 봐요! 저 배우 맞다니까는.”

그리고 내게 다시 시선을 옮기며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일단 양녕에 어울린다고 하기엔 무게감이 너무 없고, 날티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기대가 되기는 했다.

“따라오세요.”

“넵!”

난 그와 함께 비어 있는 연습실로 들어갔다.

그 시나리오는 어떻게 구한 건지, 어디에 출연한 적은 있는지, 여러 가지를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일단 이게 먼저였다.

“지금 바로 보여주실 수 있죠?”

연기를 잘하는 게 우선이지.

다른 건 뒤로 미뤄도 괜찮을 일이었다.

“네.”

허나, 그는 입구에서의 그 자신 있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입맛만 다셨다.

긴장을 잔뜩 머금은 듯, 눈매는 겉으로만 날카로웠지, 정작 눈동자는 이리저리 굴려가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저래가지고 연기는 제대로 할 수 있겠나?

“저··· 화장실 좀 잠깐 갔다 올게요. 오줌이 너무 마려워서···. 하하. 괜찮죠? 금방 올게요, 금방.”

기대했었는데, 괜한 짓을 했나 싶다.

양녕대군이 아니라 그냥 동네 백수 형이나 양아치 역할을 하는 편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나.

아까는 당당함이라도 있었지,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니 양녕대군에 걸맞는 망나니 같은 분위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여기서 갑자기 내쫓을 수는 없으니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그는 다시 들어와 연기를 시작했다.

“충녕, 네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난 전부 다 알고 있다.”

가만히 수학하고 있던 충녕대군, ‘이도’에게 눈을 부라리며 확신 어린 어조로 말하는 세자, ‘이제’.

불안함과 배신감, 그리고 분노가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으면서도, 이를 연기하는 최락현에게는 ‘날티’, 혹은 ‘가벼움’ 따위는 좁쌀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부터 이레 동안 흉한 기운이 조정을 감돌 거라 했다. 확실한 말이니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무녀의 말을 철썩 같이 믿으며,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는 모습을 연기할 때에도.

그는 강인한 양녕에 걸맞는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철철 흘러 넘치고 있었다.

“어리, 오늘따라 더욱 미색이 뛰어나구나. 내 너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겠지만··· 괜찮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걱정 마라.”

장인의 거처에 신하의 아내를 뺏어와 들이며 꿀이 뚝뚝 떨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이제.

이쯤 되니, 난 그에게서 이 역할을 하지 못할 이유를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난 매니저일 뿐, 제작사 대표가 아니고, 캐스팅 디렉터가 아니기에 결정할 권한은 없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있었다.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 중에, 지금 눈앞에 있는 최락현보다 더 이 배역에 어울릴 이는 없다는 것을.

“아바마마! 신 세자, 이제이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오서는 충녕의 말에만 더 귀를 기울이십니까! 정녕 노쇠하여 세자인 신의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그래, 이건 잘할 줄 알았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망나니의 모습.

그야말로 완벽하지 않나. 아버지의 속을 터지게 만드는 아들 역할로 이렇게 적당할 수가 없었다.

이 대사를 성호 삼촌이 받는다고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너무 기대되지 않는가. 특별히 바쁜 일이 없는 이상, 이 장면을 찍을 땐 꼭 현장으로 구경 가야겠다.

“감사합니다!”

연기를 끝내고는, 입술을 깨물며 내 눈을 노려보다시피 하는 최락현.

난 잠시 그의 눈을 마주하며 고민했다.

‘데려와, 말아?’

일단 제작사에 추천해주는 건 정해진 수순.

그러나, 우리 회사와 계약을 맺는 건 조금 더 고려해봐야 할 문제 같았다.

연기는 끝내주게 잘했고 재능 또한 매우 탐이 났지만, 연기를 하지 않을 때 묻어나오는 날티 때문에 성실성과 인성에 대한 확신은 들지 않았다.

‘조금 두고봐야겠어.’

생각의 정리를 마치고 입을 열며, 연습실에 내려앉은 침묵을 깼다.

“제작사에 추천해줄게요.”

“···! 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고요. 아무튼 결정을 내리는 건 어디까지나 제작사지, 전 추천까지만이에요. 조언을 하나 덧붙이자면, 겉으로 보이는 가벼운 모습을 조금 빼야 그쪽에서도 신뢰를 할 것 같거든요. 혹시 증명된 방법이 있는데 하나 추천해줄까요?”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형님! 말씀만 해주십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일단은 알겠다고 할 것 같은 태세에 헛웃음이 나왔다.

난 고개가 저어지려는 걸 참아내며 물었다.

“혹시 태교 음악 좋아하세요?”

“네! 굉장히 좋아합니다. 제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즐겨 들었는데 전 특히 베토벤이-“

이럴 줄 알았지.

그냥 나오는 대로 내뱉고 있었다.

‘그냥 추천하지 말까?’

고민이 더욱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 기회 한 번만 주시면 안 될까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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