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38화 (138/170)

< 성호 삼촌의 차기작 >

최근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일의 난이도가 그리 어렵지 않아서 피로하지 않았다.

현지의 무대를 봐주고, 가끔 송하연의 무대도 봐주는 건 전혀 힘들지 않았고.

걸그룹 애들의 곡을 준비하는 것 또한 힘들지 않았다.

피로는 누적이라고 했는데, 마음이 뿌듯하게 충족되는 일이 여간 많아서 그런가 보다.

그러한 일들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성호 삼촌에게 추천해줄 시나리오들을 틈틈이 살폈다.

그리고 하나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거다!’

이 진주를 찾는 과정은 여간 어려웠던 게 아니었다.

좋은 작품을 찾았음에도 조금 아쉬운 마음에 더 뒤지고 뒤지다, 겨우 찾아낸 거니까.

어쩌면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지. 몇 개만 더 찾아보고 그만 찾아볼 생각이었으니까.

어쨌든, 난 이를 찾아내곤 다른 걸 염두에 둘 필요조차 없다는 걸 직감했다.

그래서 그 길로 바로 성호 삼촌과 최팀장님께 동시에 연락해 자리를 마련했다.

“음. 이거야?”

가제를 보고는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성호 삼촌.

그럴 만도 한 게, 가제가 ‘양녕을 탐한 무녀’였기 때문이었다.

흔한 사극 영화인가 싶겠지.

최팀장님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감독님도, 제작사 이름도 낯선데··· 괜찮으려나?”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작사는 몰라도 최창수 감독님은 이름 있는 분이세요. 단편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 수상하신 분이거든요. ‘아침 해’라는 작품으로.”

“아! 최창수 감독님? 이름은 들어본 것 같아. 그분이시구나? 3년 전이었나, 4년 전쯤이었지?”

성호 삼촌은 아시나 보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4년 전이요.”

난 이것까지 알고 있던 건 아니었다.

먼저 이 시나리오를 본 다음에 감독 이름을 검색해서 알아본 거였다.

아마, 4년 전에 수상을 하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던 건 뻔한 사정들 때문이겠지.

이 바닥에서 흔하지 않나.

반짝하며 다크호스 대우를 받았다가 소리소문 없이 묻히는, 뭐 그런 흔하디 흔한 사정들.

그런데, 이 작품은 아니다.

확신하건대, 최창수 감독님은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비상할 게 분명했다.

난 기대감 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말을 이었다.

“세종과 양녕대군, 그리고 태종 이방원에 대한 이야기예요. 삼촌은 태종 역할에 딱 어울리고요. 이게 흔해 빠졌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제목에 나왔다시피 이야기의 중심 소재가 ‘무녀’거든요. 다들 아시죠? 관상을 중심 소재로 해서 대히트 쳤던 사극 영화. 그것처럼 이것도 대중들이 엄청 좋아할 거예요. 그냥 시나리오가 잘 빠지기도 했고.”

설명을 듣고도 그리 흥미가 일지 않는 얼굴이던 성호 삼촌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눈이 흥분으로 물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지.’

중심 소재도 중심 소잰데, 양녕대군을 조금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망나니인 건 맞지만 어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로맨틱하고 거친 남자처럼.

대중들이 볼 때 매력이 철철 넘치는 빌런 역할로 비쳐지고 있었다.

거기에 음악과 카메라와 같이, 연출에서 힘을 잔뜩 주면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이겠지.

‘요즘 또 매력 있는 빌런이 대세기도 하잖아?’

비록 성호 삼촌이 맡는 역할은 아니긴 했지만.

“이야. 이거 양녕 역할이 엄청 중요하겠는데?”

성호 삼촌도 바로 알아채서, 중간에 읽다 말고 씨익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제서야 최팀장님도 급격히 흥미가 생겼는지, 입술을 다시며 내게 물었다.

“주연은 그럼 네 명인 거지? 무녀랑 태종, 세종, 양녕까지.”

“원경왕후 민씨도 중요한 역할이라서 좀 후하게 잡으면 다섯 명이 주연이겠죠.”

좀 더 쓰면 어리까지 여섯 명이고.

“생각해둔 배우는 있어?”

“음.”

난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역할은 다 적당한 배우 분들이 있긴 한데, 양녕대군 역할로는 딱 떠오르는 분이 없네요. 오디션을 보거나 제작사 선택을 존중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 정 없다고 하면 추천해줄 수는 있지만, 내 기준에선 딱히 성에 차지는 않는 느낌이다.

이 역할은 그만큼 살리기가 힘드니까.

물론 이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한 정도로 연기력이 충분한 배우는 있어도, 자기만의 개성을 넣어 해석하지 않고 시나리오에서 표현된 이 캐릭터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배우는 찾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개성을 넣는다고 하더라도, 그 개성이 개망나니스러우면서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동시에 품어야 한다는 것.

‘쉽지 않지, 이게.’

둘 중 하나라면 몰라도, 이 역할에 맞게끔 둘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만약, 있다면···.

‘여자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순정파 동네 양아치···?’

설령 이런 사람이 있다 해도 일단 연기를 잘해야 하니, 조건을 모두 완벽하게 충족하는 배우를 찾는 건 당장은 힘들지도 모르겠다.

“좋아. 난 느낌 왔어. 이걸로 할게.”

이내 시나리오를 끝까지 다 읽고는 호쾌하게 말하는 성호 삼촌.

내 추천과 그의 결정에, 최팀장님은 반대의 말을 꺼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난 캐스팅으로 추천할 만한 배우들을 편하게 입에 올렸다.

“양녕 말고는 다 추천할 수 있어요. 일단 세종 역할로는-“

***

운전을 하며 심민정이 있는 ‘수세미’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앞으로 현지와 함께 투어를 시작하면 스케줄이 많이 빡빡해질 테니, 그 전에 최대한 다른 담당 연예인들에게 시간을 낼 생각이었다.

‘이제 급한 일은 다 끝났으니까.’

현재 중반에 다다른 ‘수세미’의 인기는 다른 드라마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물론 심민정의 인기가 드라마의 시청률과 인기를 모두 견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1회 방영 당시, 시청률이 잘 나온 것을 토대로 계속 입소문이 퍼지고 SNS에서 화제가 되어가며 시청자의 이탈 없이 유입만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대본이 잘 써진 덕이지.’

출연자들의 연기 타입이 비슷해서 시너지도 좋았고.

[조수연 작가의 ‘수세미’, TV드라마 부문 상반기 최고의 화제적으로 점쳐.]

[‘수세미’의 초대박. 사회초년생들의 깊은 공감을 저격한 덕분일까?]

[케미 돋는 ‘수세미’ 7회. 네티즌 “웃다 울며 정신없이 보다 보니 끝났다.”]

[드라마 ‘수세미’, 캐스팅 전부 박한울 실장이 추천했다!]

-와 우리 회사 찍은 줄;;; 아니 배우들 현실성 미친 거 아님?ㅋㅋㅋㅋ 이건 감독이 다했네.

└감독도 물론 훌륭하신 분이지만 작가랑 배우 역할도 엄청 큰 거예요. 대사랑 배우들 연기 보면 저게 시켜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박한울 픽이 지린 거임.

-그 와중에 심민정 몰입감 뭐야? 진짜 되게 스무스하게 몰입시키네ㅋㅋㅋ 정신 차려보니까 치킨 씹는 거 멈추고 넋 놓고 보고 있었음ㅋㅋㅋㅋ

-박한울 픽 진짜 뭐죠? 이 사람 연예계 흑막 해도 될 듯;; 타율 미친 수준이네.

역시 배우들을 추천한 보람이 있다.

‘성호 삼촌 영화도 이렇게 다 추천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뭐, 적당한 배우로만 찾아도 대박이 날 만한 작품이라서 크게 걱정은 없었다.

그저 완벽하지 못해 약간 아쉬운 것뿐이지.

난 세트장에 도착해 스탭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활짝 핀 미소를 띠우고 있는 심민정의 앞으로 다가갔다.

“촬영 잘하고 있었어요?”

“아뇨. 기운이 안 나서요.”

“네? 왜요? 얼굴만 보면 지금 컨디션 좋으신 것 같은데.”

“네. 지금에서야 좋아졌어요. 실장님 오셔서. 하하!”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고 내 입에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소소하고 유쾌한 장난 덕분에 그녀가 있는 곳은 언제나 밝았다.

이 촬영장 역시 마찬가지.

당연히 시청률이 잘 나온 덕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쾌활한 분위기를 띠우고 있었다.

‘아, 촬영이 안 밀려서 그런가.’

조수연 작가가 대본을 빨리빨리 뽑아내고, 배우들은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으니 촬영이 밀리지 않을 거다.

촬영 장소 또한 대부분은 사무실에 한정돼 있어서 제약도 덜 받는 편이고.

“막히는 부분은 없으시고요?”

내 물음에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막히는 부분은 딱히 없어요. 미리 대사를 많이 맞춰봤으면 더 좋긴 했겠지만요.”

“···미안해요. 좀 바빴어서.”

“그런 말 듣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에요. 그렇게 급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도 잘 되고 있으니까요. 또 감독님이 디렉팅 해주시기도 하고, 배우들이랑 맞춰보는 재미도 있더라고요.”

그녀는 갑자기 생각났는지 탄성을 내며 말을 덧붙였다.

“아! 아쉬운 거 하나 있긴 해요.”

“뭔데요?”

“실장님 바쁜 것 같아서 심심할 때 찾기 어려운 거? 대기 시간 있을 때나 촬영 준비할 때 수다도 떨고 싶었고, 촬영 일찍 끝났을 때는 커피라도 마시거나 놀고 싶었거든요.”

“하하. 괜찮으니까 편하게 연락해요.”

“에이. 어떻게 그래요. 피곤하신데 저 때문에 괜히 안 피곤한 척하면 미안하잖아요. 저번에 전화드릴 땐 일하고 계신 것도 모르고 오래 붙들기도 했고.”

“앞으론 일하거나 피곤하면 그렇다고 할게요.”

“안 그러실 거면서···. 근데 다른 분들도 다 저처럼 심심할 때 찾아요?”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 쉬듯 말했다.

“채희는 시도때도 없이 연락하죠. 어휴···. 얘는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나 봐요. 빨리 시즌2 대본이 나와야 좀 괜찮아질 텐데.”

내 말에 그녀의 입에서 시원스러운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되게 편하게 연락하시네. 다른 분들이 다 채희 씨 부러워하겠다.”

“···?”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하고 있을 때.

“스탠바이하겠습니다!”

스탭의 목소리가 촬영 시작을 알렸다.

“아! 저 갔다 올게요!”

“네, 파이팅이요.”

“네!”

난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방금 전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픽, 실소를 흘렸다.

부러워하기는 무슨.

현지도 그렇고, 하연 씨도 그렇고, 오로지 사적인 목적만으로 연락하지는 않는다.

연락을 하더라도 일에 대해 물어보거나 논의할 게 꼭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에 관련해 얘기하다가 사담으로 넘어가기는 해도.

***

콘서트와 투어 때, 공연장에서 틀 VCR 촬영을 위해 현지와 나는 스튜디오에 나와 있었다.

콘티들을 보니 정말 덕후들의 심장을 있는 대로 후벼 팔 수 있는 내용들이라, 무척 기대가 됐다.

현장에서 반응을 이끌어낼 상황극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게 또 관객들에게 엄청 큰 재미가 되거든.

“하아. 오빠, 저 애교 잘 못하는데··· 이거 팬분들이 안 좋아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현지는 난감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팬들이 좋아할 줄은 꿈에도 모르는 모양이다.

난 걱정 붙들어 매라는 듯 함박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좋아하실 거야. 내가 장담할게.”

“그래요?”

“응. 무조건.”

“···알겠어요, 그러면.”

그녀는 부끄러운 모양인지, 콘티를 계속 쳐다보면서도 연습을 하지 못 했다.

그저 콘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난 구태여 연습해야 하지 않겠냐 묻지 않았다.

‘이런 건 오히려 잘 못해야 더 잘 나오는 법이거든.’

난 흐뭇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이어지는 촬영을 지켜봤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쭈뼛쭈뼛하게 양손 검지로 볼을 쿡 찌르더니.

눈동자가 거칠게 떨리며 경직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저는 귀여워서 아이돌이··· 딱 어울려요.”

완벽해!

난 당장 박수를 치고 싶은 걸 꾹 참아냈다.

심지어 머리도 금발로 염색해서 팬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비쳐질 터.

벌써부터 관객석의 어마어마한 함성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컷! 나이스! 최곱니다!”

“···이게요?”

현지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오빠, 저 많이 굳었고 말도 더듬었는데, 이게 정말 오케이인 거예요?”

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더없이 완벽했어. 걱정 마.”

그렇게 촬영이 더 이어지고, 감독님한테 즉석에서 아이디어 몇 개를 슬쩍 제시하며 촬영을 하길 얼마간.

스탭들이 세트장 안의 소품을 바꾸고 있을 때, 채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 왜.”

-맥주 한잔 콜?

“나 일해.”

-누가 지금 먹재요? 끝나고 오라는 거죠.

늘 그렇듯, 오늘도 자기 심심하니까 놀아달라고 떼를 쓰는 거였다.

아니, 사실 전화가 올 때부터 이미 그 목적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심심하니?”

-완전요! 진짜 죽을 것 같아요.

“그럼 스케줄이라도 하던가. 예능 하나 잡아줘?”

-맥주 한잔 하자니까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예능은 무슨 예능?

“아니, 네가 심심하다니까 하는 소리 아냐.”

그렇게 몇 번이나 말이 새어 나간 끝에, 대화의 주제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어차피 오늘 이것만 하면 끝이기도 하고, 급한 일들도 다 처리했으니 맥주 한잔 정도는 괜찮겠지.

“알았어. 끝나고 갈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무심코 뒤를 돌아봤는데.

“···! 깜짝이야···.”

현지가 가까이에 서서 빤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 아무 일 없어도 편하게 연락해도 돼요?”

“음? 어··· 뭐. 그래.”

“그럼 저희 투어 다닐 때도 심심하면 같이 놀자고 해도 되는 거죠?”

“당연하지. 대신 컨디션에 무리 안 가는 선에서.”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그녀의 미소를 마주하고 있자니,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 아까 카메라 앞에서 대놓고 애교를 보여주는 것보다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웃는 모습에 더 눈길이 가는 듯했다.

“많이 놀러다녀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니고요. 사진도 많이 찍어요.”

투어를 다니는 거지, 관광을 다닐 계획은 아니다만.

대답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 그러자.”

어차피 일하러 가는 건 똑같은데, 느낌이나마 놀러다니는 기분이 들면 더 좋을 테니까.

< 성호 삼촌의 차기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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