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지금 무슨 말을 >
투어의 준비가 한창인 연습실.
공연용으로 편곡한 곡에 맞춰, 현지는 댄서들과 함께 거울을 보며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생각만큼 쉽지 않았어.’
편곡을 하는 것도 공연용에 맞춰야 했기에, 퍼포먼스와 더불어 공연장의 환경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는데.
나는 그런 쪽에는 조예가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죄다 맡기는 식으로 했지. 난 손도 못 댔다.
그러나 별로 개의치 않았다.
프로듀서라고 해도 꼭 무대 연출에 관한 것까지 조예가 깊어야 할 필요는 없다.
프로듀서의 업무라는 게 범위가 넓어서, 어느 프로듀서는 아이돌을 발굴, 제작까지 하는 마당이기도 하나, 어느 프로듀서는 곡만 쓰고 녹음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애초에 난 공식적으로는 프로듀서도 아니다. 이제 와 이런 걸 말해봤자 능력의 모자람에 대한 변명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정말로 음악에 대해 배운 건 단 하나도 없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래서 괜히 고집을 부리거나 자존심을 상해할 필요도 없었다.
잘하는 건 잘하는 사람에게.
난 프로듀서가 될 게 아니라, 회사의 대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내 능력 밖의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껍기만 할 따름이었다.
“하아. 어땠어요?”
10분짜리 퍼포먼스를 끝낸 현지가 뒤를 돌아 물었다.
그래, 이런 건 내 몫이다.
비록 공연용으로 편곡하며 연출을 기획하는 건 잘 못해도, 단순히 보고 평가하는 건 내가 또 잘하거든.
이 안목 덕에 현지를 발굴하기도 했지.
현지와 댄서들이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파트에 한해서는 댄서분들도 존재감을 좀 표출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그런 시도를 하며 배운 게 적지 않았다.
부족함을 인지하여 다른 직원에게 맡겼다고는 하나, 시선조차 떼겠다는 게 아니니까.
난 이번에 깨달은 것을 토대로, 그녀에게, 그리고 이 퍼포먼스에 접목할 수 있었다.
나도 조금은 더 성장했다고 봐도 되겠지.
“더블티의 주현상 씨 아시죠?”
홈엔터를 먹여살리는 현 시점 최고의 보이그룹, ‘더블티’.
그들의 중심이자, 리더인 주현상은 가히 사기적이라 해도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천재다.
패션은 물론, 작곡과 작사, 오리지널리티가 굉장히 진한 랩, 그리고··· 그냥 사람 자체가 멋있었다.
난 현지도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현지도 이제 무대장악력이 더 성장해서 댄서분들이 앞으로 나서도 인상이 흐려지지는 않을 거예요. 너무 정해진 대로 완벽하게 하지 말아도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첫 번째 후렴 파트에서는 관객들 호응을 이끌어야 하니까-“
역시 무대에 서본 경험이 많다 보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곧장 이해하는 듯했다.
내 말이 끝나자, 댄서들과 현지 모두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열기를 띠웠다.
눈이 빛나는 게, 마음 속 한구석에 자유롭게 무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나 보다.
하긴, 같은 방식으로 무대를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렇게 하면 어찌 지겹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난 그들이 쏟아내는 아이디어들을 귀기울여 듣다가.
진동이 온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송하연에게서 온 메시지.
[연습실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제 것도 봐주실 수 있어요? 저도 연습실 도착했거든요.]
송하연도 이제 투어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 콘서트와 투어를 워낙에 많이 했다 보니, 현지랑 달리 어느 정도 정해진 패턴이 있었다.
그래서 이토록 준비가 빠른 거고.
‘한 번 보는 것도 좋겠지.’
단순히 송하연을 돕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 베테랑의 경험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 공부가 될 테니까.
난 생각을 정리하고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좀 이따 들를게요.]
***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를 제작한 제작사, ‘워칭 필름’의 김정연 대표.
그녀는 연일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세상에···.”
이 바닥에 통용되는 ‘박한울을 잡으면 무조건 대박이 난다.’라는 진리가 다시 한번 맞아떨어졌다.
대박도 그냥 대박이 아니다.
그동안 원망스럽기만 했던 연예부 기자들도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작품을 홍보해주고 있었다.
국내 성적과 반응, 그리고 해외 성적과 반응을 모두 언급하며.
“이게 꿈이야, 생시야.”
꽃밭을 거닐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번들번들하게 빛났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시즌2.
무조건 시즌2를 제작해야 했다.
작가와 감독은 이 제작사에 소속돼 있기에 잡을 필요는 없었지만 배우들은 또 다르다.
그들이 다른 데 출연하기 전에 빠르게 협상을 하고 붙잡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소속 배우들을 가만히 두기 싫어하는 소속사들이 다른 작품에 넣어버릴지도 몰랐다.
김정연은 일단 기획사들에 전화를 돌리기 전에, 먼저 조수연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협상보다 먼저 작가가 지금부터 시즌2의 대본을 쓸 수 있을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얘기를 하다가 기한을 정해주는 편도 좋겠지. 작가들이란 마감이 정해지지 않으면 글이 잘 나오지 않는 경향이 있기도 하니까.
-네, 여보세요?
“작가님, 혹시 바쁘세요? 잠깐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찰나 사이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 김정연이 긴장을 삼키고 있을 때.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대표님이죠? 제가 받아볼게요.
“···장감독님?”
-네. 저희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지금 조 작가랑 시즌2 대본 기획 중에 있는데, 시즌2 제작하실 거죠?
“···!”
-제작하실 거면, 빨리 배우들부터 잡으세요. 다른 작품 들어가기 전에. 저희는 보름 안에 1화 나올 수 있도록 해볼게요.
어쩜 이리 생각이 똑같은지.
김정연 대표는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네, 감독님.”
***
영화 ‘구원자’의 활동이 모두 끝난 뒤부터, 이성호는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가족 여행을 간다든지, 지인들과 술을 마신다든지.
다시 가까워진 대표와도 더 많은 술잔을 기울였고, 등산과 낚시도 다녔었다.
그러나 역시 대배우는 그저 재능만으로는 되지 못하는 법.
노력과 더불어 열정의 불꽃도 꺼지지 않아야 했다.
도무지 열정이 식을 줄을 모르는 이성호는 슬슬 작품에 대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차기작을 고르기에 앞서, 우선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했다.
인기가 있었던 작품, 흥미가 가는 작품, 그리고 현재 인기 있는 작품들까지.
드라마와 영화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섭렵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를 10회까지 모두 몰아서 시청할 수 있었다.
“음.”
눈을 감고 여운을 즐겼다.
작품 외적인 것들이 머릿속에 계속 들어오는데, 그것들을 모두 쳐내고 작품 내적인 것에만 심취하기 위함이었다.
“좋은 작품이야.”
판타지가 가미된 건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 작품은 취향을 가리지 않았다.
그만큼 좋은 작품. 다른 말로 하면 걸작.
물론 걸작에 대한 기준과 정의는 분분하게 갈리겠지만, 이성호의 기준으로는 이 드라마 또한 충분히 걸작에 속했다.
“잘하네. 다들.”
배우들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본 건 영상뿐이었으나, 그 뒤로 많은 스탭들의 노고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감독이든 작가든, 그리고 다른 스탭들이든.
일부러 쳐냈었던, 작품 외적인 쪽으로 다시 생각을 뻗으면, 눈앞에 아른거리듯 그림들이 펼쳐졌다.
그들이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실력이 어떠한 지.
종래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꼬맹이였을 때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겹쳐서 떠올랐다.
“대체 얼마나 더 놀라게 만들려는 지.”
이 바닥에서 그 누구도 이렇게 성공작을 족집게처럼 고를 수 없거늘.
그는 예외였다.
그럼에도, 연예인들에게 자신의 안목을 내세워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잡으면서도, 그는 담당 연예인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었고, 진한 유대감을 쌓고 있었다.
이성호는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지 않았다.
“하여튼 박대표가 자식은 잘 키웠다니까.”
이성호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방금 전의 그 드라마로 말미암아, 가슴 속에 피었던 열정이 다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으니까.
가장 최근에 찍었던 ‘구원자’도 내용은 물론이고 결과 역시 마음에 쏙 들었으니.
이번엔 과연 어떤 작품이 찾아올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예, 선배님.
“어, 최팀장. 지금 통화 되지?”
***
현지의 연습을 봐주다가, 얼마간은 굳이 내가 없어도 된다고 판단하여 자리를 옮겼다.
송하연이 홀로 있는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니, 그녀가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줬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은 세세한 공연 기획에 대해 재잘재잘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희 팬분들이 제가 랩하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그래서 래퍼처럼 복장도 해보려고요.”
“아 그래요?”
래퍼라, 그거 재밌겠다. 그래봐야 4마디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팬들의 즐거움은 그때뿐만은 아니리라.
“그리고 지금 안무 맞춰보는 것도 있는데 그때 댄서 한 분한테 인형 옷 입혀서 하는 게 더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하하. 팬들이 좋아하시겠네요.”
내가 감탄하고 고개를 주억거릴수록 그녀의 목소리 톤은 높아졌다.
자랑이라도 하듯, 선생님께 칭찬을 바라는 학생처럼, 그녀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말하곤 했다.
난 그녀의 얘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하연 씨는 이런 걸 신경 쓰는구나, 하며. 그리고 나 또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왜 혼자 계셨어요? 안무 맞춰보는 거 있다면서요.”
문득 떠오른 의아함에 물었는데, 그녀는 민망한 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댄스가 생각만큼 잘 안 돼서 혼자 연습 중이었어요. 지금은 댄서 분들하고 같이 연습해봤자 의미가 없어요.”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하연 씨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가 봐요. 다른 게 다 완벽한데 춤까지 잘 추면 인간미가 없잖아요.”
“아···. 고마워요.”
작게 웃으며 바닥으로 시선을 향하는 그녀.
그런데, 그때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목걸이를 선물했는데, 착용하고 있지 않고 있다.
마음에 안 들었나?
내가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녀의 손이 내 시선이 닿고 있는 목으로 향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눈은 어느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내가 사과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걸이는··· 집에 있어요.”
내가 목을 쳐다본 이유를 눈치 챘나 보다.
역시 마음에 안 들었나 싶었는데.
이어지는 말에,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오늘 땀 흘릴 테니까 묻을까 봐서··· 그래서 두고 왔어요. 가방에 넣었다가 만에 하나 잃어버릴지도 모르기도 하고. 그냥 목에 차고 외출하는 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가방에 넣어 놓으면 계속 신경 쓰여서 다른 데 집중도 안 되고요.”
보통 같으면 변명을 늘어뜨리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조금 떨리는 목소리와,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저 눈빛을 보니, 구차한 변명이라는 생각은 눈꼽 만큼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해, 눈을 계속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을까.
나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을 다시 마주했고, 그녀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오밀조밀 작고 빨간 얼굴을 이렇게 보니, 머리를 거치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천천히 입이 열렸다.
“저-“
그때였다.
연습실의 문을 벌컥, 열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최팀장님.
그는 시원스러운 미소를 띠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박실장! 두 가지 소식이 있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헛숨이 삼켜졌다.
“음? 지금 바쁜 건 아니었지?”
아무 반응이 없는 우리 둘을 살펴보던 최팀장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내 옆에 앉은 그녀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엄청나게 중요한 소식인가 봐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
“어···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니라면 아닌데··· 좋은 소식인 건 맞아.”
최팀장님은 눈을 끔뻑이다가 내게 두 가지 소식을 전했다.
“넷플릭스 시즌2 확정됐어. 벌써 대본 작업 들어갔다고 하네? 그리고 성호 선배님께서 영화 찍고 싶으시대. 방금 연락 와서 시나리오 좀 골라달라고 말씀하시더라고. 하하! 좋은 소식이 이렇게 동시에 들어오니까 기분이 좋네.”
결국 내가 또 시나리오를 골라줘야 할 것 같았다.
시즌2에 성호 삼촌을 넣는 건 불가능하겠지? 대뜸 대본에 주연급을 넣을 수도 없고, 삼촌은 영화를 찍고 싶어 하시니까.
‘한동안 또 바쁘겠네.’
나는 최팀장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송하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보니 아직까지 얘기만 나누고 연습하는 걸 보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 이제 현지 보러 가볼게요.”
“···네.”
내가 연습실을 나서자, 최팀장님이 나와 같이 몸을 돌렸는데.
뒤따른 그녀의 목소리가 최팀장님의 발을 묶었다.
“팀장님, 공연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잠시 얘기 나눌 수 있죠?”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 목소리는 조금 서늘한 느낌을 풍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 내가 지금 무슨 말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