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채희 액션 데뷔 >
이번에 출연한 예능은 ‘달려라 인간아’.
SBC의 일요일 대표 예능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국내 인기만이 아닌, 해외 인기가 독보적이라는 것 때문.
우리 드라마는 넷플릭스 드라마이기 때문에 홍보에도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나는 한 켠에서 녹화가 시작되는 걸 조용히 지켜봤다.
오프닝 촬영지는 푹신한 잔디가 깔린 야외 공원.
프로그램 고정 출연진들끼리 오프닝을 하고, 그 뒤 채희를 비롯한 배우들이 나와 인사했다.
“네!? 채희 씨가 액션을 하셨다고요? 그것도 판타지 스릴러?”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채희를 바라보는 출연진들.
채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액션 스쿨에서 쥐어 짜이면서 연습해서 엄청 멋있게 했어요.”
출연진들은 다들 헛웃음을 지으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보통 자기 입으로 엄청 멋있다는 말은 안 하지 않나?”
“아무리 쥐어 짜도 관상에 액션이 하나도 없는데.”
“음. 채희 씨 연기력은 우리도 다 잘 알긴 하는데··· 대역이 아니라 정말로 채희 씨가 직접 액션을 하셨다고요?”
채희는 계속되는 출연진들의 의심에 호기롭게 말했다.
“그럼 보여드릴까요?”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흐름이었다.
미리 합의가 됐다면 연습을 했겠지.
나는 눈썹을 잔뜩 모으며 불안불안하게 지켜봤으나, 제작진들과 출연진들에겐 가려운 데 긁어주는 격이었다.
바닥도 푹신한 잔디가 깔려 있어 설령 넘어진다 해도 위험하진 않았다.
“좋다! 한 번 봅시다.”
“너무 위험하게 하진 마시고, 간단히 보여줄 수 있는 것만 해주세요.”
채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왔다.
“그럼 간단한 것부터 차례차례 보여줄게요. 촬영 끝난 지 좀 돼서.”
그녀는 1분 정도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는.
표정과 눈빛이 캐릭터에 동화되며, 촬영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출연진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숨죽이며 그녀를 지켜봤다.
비록 대사를 하진 않았으나 확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채희는 액션스쿨에서 배운 대로, 자세를 잡고는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바로 뒤돌려차기를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아!”
꽈당, 미끄러 넘어지지만 않았더라면 그래도 조금은 멋있었겠지.
“어이고! 괜찮아요!?”
“어어! 채희 씨!”
그녀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는 울상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파! 오빠! 아파!”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나를 바라보는 출연진들.
카메라의 렌즈도 이미 내 쪽으로 향한 지 오래였다.
난 그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는.
“아니 근데··· 뭐야? 채희 씨 액션 찍은 거 맞아요?”
“푸훕.”
채희는 넘어진 자세에서 그대로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항변했다.
“저 원래 진짜 잘했어요! 지금 바지가 불편해서 그런 거예요. 바닥도 미끄럽고, 신발도 미끄러워서 그런 거예요!”
사실이야 어찌 됐든 출연진들로서는 그저 웃길 따름이었다.
MC는 눈빛을 빛내며 날 끌어들였다.
“박한울 실장님. 채희 씨 말이 진짜예요?”
“···네. 촬영을 마친 지 좀 돼서 그렇지, 정말 찍을 땐 잘 찍었습니다. 기대하셔도 될 거예요. 믿기진 않으시겠지만.”
채희는 내 말에 도끼눈을 떴다.
자기도 창피한 줄은 아는지, 얼굴은 빨개질 대로 빨개져 있었다.
“마지막에 사족은 왜 붙여요!?”
“그럼 애초에 한다고 하질 말든가. 한다고 했으면 네가 잘했어야지. 방금 그 모습을 봤는데 너라면 믿겠니?”
“그래도요!”
이런 우리의 모습이 우스운 모양인지, 출연진들은 전부 웃음을 터뜨리며 보고 있었는데.
MC는 이중에서 유일하게 웃지 않으며 오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박송이에게 물었다.
“저 두 분, 원래 저래요?”
박송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매일 저래요. 그냥 루틴 같은 거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
예능 촬영과 인터뷰, 그리고 제작발표회까지 마쳤을 때는 이미 인터넷에 채희의 액션에 대한 기대감으로 떠들썩해져 있었다.
예능은 아직 방송이 되지 않았으나, 인터뷰로 인한 기사들과 예고편은 인터넷에 쫙 풀렸으니까.
[넷플릭스 판타지 액션 스릴러 드라마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 정채희 액션 데뷔.]
[대역 없이 배우들이 직접 찍은 리얼한 액션. 정채희와 박송이 또 뭉쳤다!]
-정채희가 액션이라고????? 읭????ㅋㅋㅋㅋ
-예고편 30번 보는 중인데··· 이게 대역이 아니라는 거지? CG도 아니고. 와··· 이번 건 진짜 좀 심하게 레전드 같은데?
-아니 언니··· 왜 섹시해? 왜 치명적이야? 왜? 왜 멋있어?
며칠 전 예능에서 채희와 함께 초반부터 개그 콤비가 되어, 촬영이 끝날 때까지 웃음거리가 됐는데도.
인터넷 반응을 보고는 다시 자신감이 차오른 모양이다.
녹화를 앞두고 채희가 내게 물었다.
“오빠, 여기서도 액션 좀만 해볼까요? 그땐 진짜 바지랑 신발이랑 바닥 때문에 그런 거고, 이번엔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도 망신당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우리는 홍보차 일본에 왔다.
본격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며칠간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인터뷰 몇 개와 한두 개의 예능에 짧게 출연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효과가 적진 않겠지. 채희가 일본에서도 워낙에 인기가 좋으니.
“참나···. 한 번 실수한 것 가지고.”
액션을 보여주겠다는 게 진심은 아니었는지, 툴툴거리기만 할 뿐 다시 한번 묻지는 않는다.
다행이었다.
또 며칠 뒤엔 중국에도 갈 텐데, 망신은 한 번이면 족하지.
곧이어 녹화가 시작됐고.
그녀는 푼수 같은 모습은 완전히 벗어던진 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한껏 단아하고 조신한 척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배우 정채희입니다.”
“···? 풉.”
물론 그 가식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녀의 원래 모습은 이미 일본과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케이치로.
그의 표정엔 절망도, 행복도, 뿌듯함도, 노곤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한 얼굴.
취업을 하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고, 연애와 결혼도 생각이 없었다.
별거 없는 인생, 그저 굶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면 그만 아니겠는가.
꿈이나 희망찬 미래 같은 건 진작에 다 버린 그는 그저 이렇게 연명하는 데 만족했다.
하지만 그런 케이치로라도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좋아하는 것도 있었고, 취미도 있었다.
요즘 그를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것은 한국의 대중예술문화.
한국의 음악과 무대, 드라마와 영화, 예능을 보는 게 취미이자 삶의 낙이었다.
그는 씻고 돌아와, 바로 핸드폰으로 넷플릭스를 켰다.
정채희와 박송이가 출연한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를 손꼽아 기다렸기에, 지금 그의 얼굴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반복되고 무료한 일상 속에 새로운 자극.
처음엔 드라마의 제목이 자신의 삶을 말하는 것 같아 미약한 거부감이 느껴졌었으나, 장르가 ‘판타지 액션 스릴러’라는 것과, 공개된 예고편을 보고는 거부감이 싸그리 사라졌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기대감뿐.
케이치로는 그렇게 이어폰을 꽂고 조용히 1회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1회를 보는 케이치로의 눈과 입은 수시로 꿈틀대며 반응했다.
그리고 마침내 1회가 전부 끝났을 때, 그는 눈에는 생동감마저 감돌며 활짝 미소가 지어졌다.
‘너무 재밌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재밌었기에, 그는 강한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2회를 시청했다.
공개된 것은 모두 10회.
내일도 아르바이트를 가야 해서 오늘 안에 다 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볼 수 있는 만큼은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잠을 한숨도 못 자고 아침까지 한 번에 몰아서 봐버린 것.
하지만, 그는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 대신, 가슴 속에 불꽃이 피어올라 활활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
이 드라마는 교훈을 주기 위한 의도도 없었고, 무언가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도 없었다.
그저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오락 드라마.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더 케이치로는 그 속에 자신을 대입하며 몰입할 수 있었다.
메시지를 주고자 했으면 거부감만 일어났을 테니.
‘잘 살아가기 위함’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캐릭터들의 행동과 가치관.
정채희와 박송이의 연기에 과하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들의 마음가짐이 자신에게까지 와닿았다.
눈빛과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진심이, 집중하던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저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10회를 내리 봤으니, 감동하여 여운을 심하게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허나, 삶을 대하는 자신의 사고가 좀 더 넓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투쟁···.’
‘포기라는 것은 한 번이라도 치열하게 투쟁해봤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 대사가 왜 이렇게 머릿속에 잊혀지지 않는지.
‘투쟁··· 해봤었나?’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보니.
열심히 공부해본 적도, 취업하려 애썼던 적도, 다른 데 재능을 찾아보려 노력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케이치로는 다시 한번 핸드폰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한 번 해볼까?”
이 드라마의 엔딩처럼.
설령 유토피아는 찾지 못할지라도, 제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을 수는 있을 테니까.
적어도 시도라도 해보는 편이 시도조차 안 해보는 것보다는 백 번 나을 것이다.
***
드라마와 예능은 같은 날에 동시에 공개되었다.
-아 ㅆㅂ 드라마 다 보고 감성이랑 분위기 다 잡았는데 정채희 예능 나온 거 보고 확 깨졌네ㅋㅋㅋㅋㅋㅋㅋㅋ
-밤 새서 드라마 한 번에 몰아봤던 일본 청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보고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궁금해서 인터넷에 들어가봤더니 예능이 화제더군요. 그래서 봤습니다. 전 그냥 이대로 살려고 합니다. 잠시 뜨거워졌던 마음이 차갑게 식었습니다. 이제 아르바이트를 가봐야겠군요. 오늘은 많이 피곤할 것 같습니다.
-아 내 감동 돌려내···. 아니 대장님 분명히 드라마에선 카리스마 작렬하셨잖아요. 왜 갑자기 찐따가 되셨어요ㅠㅠㅠㅠ
-ㅋㅋ박송이 개웃기넼ㅋㅋ 박송이랑 박한울 저러는 거 엄청 익숙한가 봄ㅋㅋ 진짜로 저 모습이 기본값임?
최팀장님과 난 퇴근도 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계속 인터넷의 반응을 살폈다.
예능과 드라마가 동시에 공개돼서 그런지 반응들이 참 괴상했다.
아직 드라마를 안 보고 예능만 본 사람들은 마냥 귀엽고 웃기다고만 말할 뿐이었고.
예능을 안 보고 드라마만 본 사람들은 역대급 드라마라며 찬양 섞인 감탄을 아낌없이 쏟아냈으며.
드라마와 예능을 둘 다 본 사람들은 그 순서에 따라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반응들이 재밌네. 보는 맛이 있어.”
최팀장님은 큭큭 웃으며 말했다.
“저도 빨리 보고 싶네요. 어떻게 나왔을 지 저도 궁금하거든요.”
“나도 그래. 그래도 일단··· 대박인 건 확실한 것 같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능이든 드라마든 둘 중에 하나라도 망했으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둘 모두 같은 시간에 공개된 것도 어찌 보면 운이라고 봐야지.
감동을 깨서 안타깝기는 하나, 어쨌거나 채희의 이런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 때문에 상당히 빠르게 화제가 되고 있었다.
“한울아, 이거 해외에서는 어떨 것 같아? 유럽이랑 미국 쪽에도 먹힐까?”
난 그 대답에 확실하게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저도 봐야죠. 어떻게 나왔는지.”
“그래?”
“그래도 촬영을 지켜본 입장에서 대략 짐작하기로는··· 두 번째 시즌도 대본이 이런 퀄리티로 뽑히고, 연기랑 촬영도 비슷하게 진행되면 아마 그때부턴 반응이 크게 올 수도 있겠네요.”
아직 그쪽에 입소문이 퍼지려면 한 시즌으로는 부족했다.
채희와 박송이를 비롯해 이 드라마에 참여한 모두가 그쪽에선 인지도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시즌으로도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둘 수 있겠지만.
“···! 크게!? 어느 정도로 크게!?”
바라 마지않던 대답에, 그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갖가지 장면들이 상상되며 머릿속을 스치고 있겠지.
나는 그 물음에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본이라도 보고 말해야지, 아무것도 나온 게 없는 상태에선 아무리 나라도 막연하게 잘될 거라 넘겨짚으며 대략 짐작만 하는 것뿐이었다.
최팀장님은 쩝, 입맛을 다시고는 자리에 앉았다.
잠깐 흥분했을 뿐, 그 역시 지금 하는 짐작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전 이만 퇴근해보겠습니다.”
반응 모니터링도 어느 정도 했으니.
‘이제 나도 집에 가서 드라마 봐야지.’
드라마에 대한 호평일색인 반응을 보니, 나도 참기가 힘들었다.
지금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현실에서의 그녀와 작품에서의 그녀는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으니.
나 또한 채희의 팬들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그녀의 팬으로서 기대감에 부풀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채희가 감상을 물었을 때, 안 봤다고 말하면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울 것 같아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었다.
정말로 진짜.
< 정채희 액션 데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