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29화 (129/170)

< 구남친 >

신년 해가 밝은 지 채 사흘이 지나기도 전이었다.

연말의 화제들이 빠르게 가라앉고 새로운 이슈들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때.

웬만한 이슈는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커다란 이슈가 터져버렸다.

[큐빅엔터 이황진 대표, 성매매 알선 논란. 검찰 조사 착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큐빅 엔터. 과연 진실은?]

[연예계의 어둠, 말레이시아 거부에게 성접대? 이황진 대표의 추악한 민낯!]

“와···.”

사무실에서 이정욱의 탄식만이 들렸다.

아니, 탄성인가?

아무튼 이는 아마 김대표님의 작품일 거다.

그게 아니면 갑자기 이렇게 터질 리가 없지.

최팀장님을 힐끗 쳐다봤는데, 나와 눈이 마주쳤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에 대해 윤본부장님께 귀띔을 받았는지 표정이 살짝 굳어 있다.

‘이런 방식이구나.’

YU의 일처리 방법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의 루머를 사주한 게 심증이었을 뿐이든 아니든, 어쨌거나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뿐이다.

기사들을 보면, 이미 정황은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으니 결코 조작은 아닐 터.

혹시나, 죄 없는 연예인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진 않을까 인터넷 반응을 살폈는데.

연예계에 이런 일이 하도 많이 일어나서 그런지, 다행이도 완전히 별개의 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정욱은 나를 흘끗 바라보다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실장님, 지금 연예계의 빛과 어둠이라고 실장님 이름도 거론되고 있는데요?”

“어? 나?”

“지금 새로 기사 떴어요. 연예계 관계자 A씨 증언이라고 하면서요. ‘얼마 전 루머가 있던 박한울 실장이랑은 완전히 대비되는 인물이다.’, ‘박한울 실장은 이번 루머 터졌을 때, 다른 데서 다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걱정했었는데, 이쪽은 다 쌤통이라고 고소해한다.’, 뭐 이런 식으로요.”

최팀장님의 얼굴에 픽, 미소가 걸렸다.

“그러네. 빛과 어둠 맞지. 수상소감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화제잖아. 무슨 근무환경이 그렇게 좋냐면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저쪽이 어둠인 건 그렇다 치고, 내가 빛이라니.

글쎄다, 다른 사람이 볼 땐 어떨지 몰라도, 스스로 생각해볼 땐 별로 와닿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뭐, 아무렴 어때.

좋게 봐주면 좋은 거지. 굳이 나서서 사람들 인식을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인터넷 반응이면 모를까, 여기서 얼굴을 맞대며 금칠을 받기엔 조금 쑥스러운 면도 있었기에.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3팀 분위기는 좀 어때요? 대충 보니까 안절부절못하던데.”

드디어 보이그룹이 데뷔 작업에 들어갔다.

시상식이 끝난 다음 날, 곧바로 티저를 올리며 데뷔를 홍보했고, 드디어 내일 음원이 발매된다.

그룹 이름은 ‘드리머(Dreamer)’. 꽤나 심플하고도, 뜻을 이리저리 갖다 붙이기에도 좋은 이름이었다.

최팀장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까 보니까 한팀장님이 접시에 물 받아 놓고 제발 대박 터지라고 기도하시더라고. 나 참.”

보이그룹 명가 홈엔터에서 프로듀싱을 받기도 했고, 나도 마지막에 함께 점검하며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한팀장님도 이쯤 되면 안심할 때도 됐는데, 역시 아티스트 한 명 한 명에 진심이시다 보니 쉬이 마음을 놓을 수 없나 보다.

그런 점에 더욱 정이 가긴 하지만.

***

YU엔터의 대표실.

김대훈 대표는 통화를 받으며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저한테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전 진짜 억울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큐빅 이황진 대표의 분노와 억울함이 공존하는 목소리.

한 번 떠봤을 때, 그는 오리발을 내밀며 모르쇠로 일관했었다.

하지만 시치미를 떼봤자 소용없었다.

이 바닥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눈치도 없으려고.

물증이 없으면 없는 대로, 나름대로의 해결 방식이 있었다.

김대훈 대표는 이대표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대체 저한테 왜 그런 말을 하시는 지 모르겠네요. 전 정말 아닙니다.”

이황진 대표 또한 똑같다.

물증은 없는데 심증이 있겠지.

다만 놓인 처지는 완전히 다른 게, 저쪽은 자기가 저지른 범죄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는 거고. 이쪽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거였다.

-···이런 개-!

마침내 시원스럽게 터지는 욕에 김대표의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대표님,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좀 자중하세요. 그래도 원정도박이랑 협박은 아직 안 걸렸잖아요.”

-···!

“아, 전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끊겠습니다. 부디 수사 성실히 받고 사람 되십쇼.”

뚝, 전화를 끊은 김대표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은 죄도 많은 사람이 한 번 경고를 했으면 귀담아들을 줄도 알아야지.”

빛과 어둠이라고 그랬나?

너무 딱 알맞는 비유라 머릿속에 인상이 콱 박혔다.

김대표는 고개를 들어 다시 TV를 시청했다.

바쁘다는 말은 정말 거짓이 아니었다.

HJ엔터의 신인 보이그룹, ‘드리머’의 음악방송 데뷔 무대를 봐야 했으니까.

긴장이 겉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마치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뼈가 부서질 듯 열심히 했다.

뮤직 비디오와 음원이 공개된 어제부터 인터넷에서의 반응은 그리 크진 않았으나.

김대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얘네 뜨겠네.”

아무렴 멤버 구성부터 박실장의 손길이 들어갔고, 홈 엔터에서 데뷔곡 프로듀싱을 받았는데 망할 리가 있겠나.

김대표는 의자에 몸을 편히 눕히며 흐뭇하게 무대를 지켜봤다.

“이제 우리 애들도 얼마 안 남았네.”

저들의 훌륭한 무대를 보니, 박실장이 멤버를 구성하는 데 도움을 준 자신의 보이그룹 또한 성공적으로 데뷔할 것 같았다.

역시 좋은 관계를 구축하길 잘했지.

김대표는 앞으로도 쭉 박실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이렇듯, 그에게 선뜻 손을 뻗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

오늘은 드라마 ‘수세미’의 첫 촬영이 있는 날이다.

앞으로 촬영이 있을 때마다 함께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첫 촬영과 마지막 촬영은 반드시 가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

며칠 전에 그녀와 스캔들이 터졌다곤 해도, 첫 촬영까지 안 갈 수는 없지.

난 그녀의 집 밑에 도착한 뒤, 전화를 걸었고.

잠시 후, 그녀는 차에 타며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 구남친님.”

“···구남친···이요?”

구남친. 그 당황스러운 호칭에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니, 그녀는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잠깐이지만 저희 국민 커플이었잖아요. 그런데 너무 아쉽다. 진짜 남친 생길 뻔했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난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가끔씩 치는 이런 짓궂은 장난도 이제 완전히 적응이 됐다.

“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뇨. 사진 못 보셨어요? 저희 완전 커플처럼 나왔는데? 저도 그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너무 잘 어울려서.”

“저도 놀라긴 했어요. 진짜 사진 작가 저리 가라더라고요.”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니 루머의 영향이 있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아니, 신인상을 받았기 때문인가. 어째 텐션이 더 높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다행이네.’

제작사에서 정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따 촬영장에서 이 모습을 보면 크게 안도할 수 있을 거다.

“민정 씨, 오늘 컨디션엔 문제없죠?”

“네, 전혀 문제없어요. 오히려 너무 좋아서 탈이죠.”

큐빅 엔터의 일이 터진 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실장님, 그런데 혹시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어떤 거요?”

“하연 씨한테는 어떤 선물 받으셨어요?”

궁금한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묻는다.

“아직 안 받았어요.”

“네? 왜요?”

“···내일 같이 쇼핑 가서 옷 한 벌 맞추기로 했어요.”

내 대답을 듣고 눈썹을 올리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쇼핑 가면 끝나고 밥도 먹겠고, 시간 남으면 또 카페도 가겠고, 그 다음엔 술도 먹으려나?”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요. 옷 한 벌 맞추러 가는 건데.”

“보통은 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죠.”

그런가?

“아무튼 술은 안 먹을 거예요. 운전해야 해서.”

그녀는 대답없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손에 든 대본을 펼쳤다.

그리고 휙휙, 몇 장을 넘기더니 대사를 연습했다.

“어휴. 난 대체 언제 꽃 피려나. 세상엔 왜 이렇게 잘나고 못된 놈들이 많은지.”

“대본에 ‘못된 놈’이라는 대사는 없지 않았어요?”

“애드립이에요. 넣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음. 별로일 것 같은데요? 왜냐면 그 전이랑 후에 못된 거에 연관된 내용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몇 페이지를 휙휙 넘기며 다른 대사를 연습했다.

“쟤 완전 여우 같지 않아? 김대리님은 저런 기본적인 것도 눈치 못 채고 또 헤벌쭉해져가지고.”

“그거-”

“제 대사도 아니고, 다른 두 명 대사긴 한데, 그냥 연습해봤어요. 다른 캐릭터들 심리도 좀 파악해보려고요.”

“아.”

“근데 김대리님. 아, 아니 박실장님.”

“네?”

“아니에요. 그냥 운전 너무 잘하신다고요.”

컨디션이 좋다는 말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오늘 옆에서 열심히 케어해줘야지.

***

그런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촬영장까지 직접 와서 연기를 지켜봤던 제작사 대표 역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우며 돌아갔고, 그녀는 이것 보라며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말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컨디션 좋다고.”

“그러네요.”

방금 전에 달리는 씬을 여러 각도로 찍어야 했기에 이 추운 날씨에도 이마에 땀방울들이 흐르고 있었다.

스탭이 그녀의 땀을 닦아주는 사이, 난 숨을 헐떡이는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주고, 따뜻하게 뎁혀놓은 핫팩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런데 둘이 그렇게 같이 있어도 되는 거야?”

그동안 예민한 배우들을 많이 겪었는지,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스탭들이 근심 어린 얼굴로 지켜봤었는데.

연기도 더할 나위 없이 잘하며, 반복되는 힘든 씬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으니, 이제는 스탭들도 마음을 놓고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촬영 감독님의 농담에, 조연을 맡으신 원로 배우님도 덧붙였다.

“선물 주고받았으면 끝이지, 뭘.”

“에이, 선생님. 아니에요. 실장님은 저 말고도 선물 주고받는 여자가 세 명이나 더 있거든요.”

“완전 바람둥이구만. 그럼 못 써.”

“그러니까요. 혼내주세요.”

새삼 그녀의 친화력이 무서웠다.

선생님은 싹싹하게 구는 그녀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오늘 촬영할 씬이 다 끝났는데도 촬영장을 떠나지 않고 계셨다.

난 그녀들의 눈초리에 피식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론 조심할게요.”

촬영장은 이렇게 평화롭고 훈훈한 분위기로 출발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탭들은 대박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배우들이 모두 연기를 잘하고 있는 덕분에 촬영 시간이 줄어드니 좋았고.

배우들은 지금까지의 커리어와는 달리, 튀지 않는 스타일의 연기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약 그 루머가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았더라면.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지금 같은 분위기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그녀와 함께 떳떳하게 같이 있을 수도 없었을 테고.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소하기 짝이 없었다.

‘쌤통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나 보다.

촬영이 다 끝나고 돌아가는 길.

그녀에게 '오늘 촬영 힘들었을 텐데 너무 수고했다'고 말하니,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힘든 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요. 사실 버티는 것도 아니죠. 그냥 다 즐겁고 좋아요. 그리고··· 최근에 너무 시원한 일도 있어서요. 뭘 해도 전혀 힘들지가 않던데요?”

“정말요? 저도 그런데.”

오래도록 마음고생한 그녀에게는 더욱이,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우린 혹여 부정이라도 탈까 싶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그저 서로를 마주보며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런데 있잖아요, 실장님.”

“네.”

“저 오늘 촬영 열심히 잘했다고 하셨는데··· 혹시 수상소감 또 잊으신 거 아니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고, 난 슬쩍 손을 올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나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설마 이걸 잊었으려고.

말도 안 되지.

< 구남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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