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가 방영된 MBS 연기대상에 가는 길.
나와 로드 매니저, 채희, 그리고 윤본부장님이 같이 탄 차에는 흥분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시상식에 참여하는 건 윤본부장님을 제외하고 우리 모두 처음이다.
그리고 수상 또한 거의 따놓은 당상이라고 볼 수 있으니 흥분되는 것도 당연한 일.
난 실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
“정채희, 다 도착했어. 내릴 준비해.”
이제 곧, 기자들과 팬, 그리고 구경꾼들이 쫙 깔린 레드카펫을 걸어야 한다.
“벌써요!?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천천히 왔거든? 떨지 마.”
“어떻게 안 떨어요! 시상식 처음 가는데! 이런 옷도 처음 입는다고요!”
충격적일 정도는 아니나, 그래도 어느 정도 노출은 있었다.
앞쪽은 괜찮았지만 뒤는 시원하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스타일이었다.
문제라면 지금이 한창 추운 연말이라는 것.
패딩을 입어도 추운 이 날씨에 이런 드레스라니,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렇다고 레드카펫에 롱패딩을 입고 갈 순 없지 않겠는가.
“아, 어떡하지? 오빠, 저랑 같이 내리면 안 돼요? 오빠도 셀럽이잖아요. 분명 다들 좋아하실걸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 차림과 그보다 더욱 빛나는 외모.
그러나 그 속에 들어있는 건 영락없는 꼬맹이였다.
안절부절못하며 떼를 쓰듯 내 팔을 잡고 흔들어댄다.
“안 돼. 내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레드카펫 순서를 대기하는 모양인지, 커다란 차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우리 차례가 오겠지.
그런데.
“예, 피디님. 지금 다 도착해서 줄 서고 있어요.”
윤본부장님의 통화 소리와, 창밖으로 보이는 스탭.
통화를 하며 우리 앞에 선 차량들의 차종과 차량번호를 확인하다가, 마침내 우리 차를 발견하고선 다급하게 창을 두드렸다.
“창문 내려봐.”
“네.”
윤본부장님의 말에 창문이 내려가고, 스탭의 창백한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는 눈으로 안쪽을 훑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필사적인 표정이 되어 말했다.
“박실장님! 정말 죄송한데, 혹시 레드카펫에 정채희 배우랑 같이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실수가 있었어요. 제발요. 안 그럼 저 죽어요!”
그는 자기를 소개했다.
이 시상식을 맡은 조연출이고, 실수로 우리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다고.
만약 이게 들키면 메인 피디한테 죽은 목숨이라 말하는데, 저 짙은 다크서클과 충혈된 눈을 보면 이미 반쯤은 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몰골로 인해 그의 말은 설득력을 잃었다.
들키나 안 들키나 똑같을 것 같은데, 뭐.
“오빠! 피디님이 안쓰럽지도 않아요!? 같이 내려요. 네?”
“하아···.”
채희까지 필사적인 얼굴이 되어 가세하자,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윤본부장님이 낄낄 웃으며 방관하고 있는 가운데, 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상식 도중 카메라에 잡힐 것도 뻔하고, 자리가 자리인지라 잘 꾸며오기도 했다.
까짓 거 레드카펫에 한 번 같이 서지, 뭐.
이 또한 나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채희 데뷔년도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상식이니까.
데뷔작인 <캠퍼스 낭만이 원래 이런 거야?>는 웹드라마고, 헌만사 이후에 찍은 <더 BAD>는 영화다.
그러니 채희는 이 MBS 시상식이 올해 유일하게 참여하는 시상식이었다.
‘그래도 좀 아쉽네.’
난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예쁜 모습을 사람들에게 단독으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옆에 내가 껴서 그림을 망가뜨리게 생겼다.
이 또한 더 많은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했지만.
“한울아, 채희랑 먼저 들어가 있어. 곧 따라 들어갈게.”
“네.”
드디어 우리 차례다.
뒷문이 스르르 열리고 먼저 내리자, 사람들의 시선과 카메라 플래시가 동시에 나를 비쳤다.
그리고 이어서 내리는 채희의 손을 받쳐주자.
나에게 몰렸던 모든 시선이 채희에게로 훅- 빨려들어갔다.
여기저기 경악하는 표정들이 퍽 만족스럽다.
원래부터 예뻤던 채희가 오늘 한층 더 예쁘게 꾸미고 나타났으니, 저렇게 실물로 접하고 충격을 받는 것도 당연하지.
우린 어깨를 나란히 하며 천천히 레드카펫을 걸었다.
***
채희와 함께 플래시 샤워를 받고 들어간 시상식장.
그녀는 홀 중앙으로 걸어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난 장내 가장자리, 관계자들이 모인 곳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저쪽도 인사의 장이지만 이쪽도 인사의 장이다.
특히나 난 대중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했고, 현재 잘나가는 연예인들을 담당하고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둘씩 계속 들어오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상식이 시작되어버렸다.
살짝 풀어졌던 긴장감이 다시 몸을 옥죄어왔다.
분명히 크리스마스 이브까지만 해도 상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 자리에 앉아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상을 타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본부장님, 채희 상 탈 수 있겠죠?”
채희가 노미네이트 된 건 신인상 부문과 여우조연상 부문.
‘헌만사’ 5회 이후 분량이 꾸준히 늘어, 나중엔 주연인 박송이와 비슷한 분량을 가져간 것만 봐도 신인상은 이미 따놓은 당상일 텐데.
자꾸만 만약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 든다.
나도 어지간히 겁쟁이인 모양이다.
윤본부장님은 내 질문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채희 말고 누가 타겠어? 왜 이렇게 확신이 없어, 평소답지 않게.”
“···이건 안목이랑은 관계없잖아요.”
“참나. 괜히 사서 걱정하지 마. 채희도 차에서 수상소감 계속 연습했잖아.”
차를 타고 오는 길 내내.
채희는 수상소감을 내뱉으며 연습했었다.
신인상과 여우조연상 모두.
‘그래. 타겠지.’
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채희를 바라봤는데.
채희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불안함 한가득 머금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의 옆에 앉은 박송이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날 흘겨보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데에 몇 번 참여했다고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됐으면서도 전혀 떨리지 않는 모양인데, 상 받고 엉엉 울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혹시 상 타면 내 이름은 말해주려나? 안 하겠지?
잠시 뒤.
축하공연이 끝나고 마침내 그때가 다가왔다.
“여자 신인상 부문입니다.”
스크린에 떠오른 여섯 명의 후보들.
내 눈에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6명 중 채희가 가장 빛나고 있었다.
단지 외모만이 아니다.
저들 중에 채희에 비빌 만한 연기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사실 드라마 후반부에선 화제를 거의 독식하다시피 했으니 말할 것도 없지.
“영광의 주인공은···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 정채희 씨 축하드립니다!”
됐다.
스크린에 비쳤던 여섯 명 중 다섯의 모습이 사라지고, 채희의 모습만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고.
난 숨이 턱, 막혀 왔다.
‘됐다!’
벅찬 감정이 물밀 듯 차올랐다.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
“야, 준비해.”
‘헌만사’를 찍은 제작사 직원들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분주히 움직였다.
난 감격에 젖을 새도 없이 미리 준비해 놓은 꽃다발을 챙겨 들었다.
채희가 무대 위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자, 우리는 서둘러 무대 위로 올라갔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걸음을 바삐 움직이는 내 얼굴 위로 찢어질 듯한 함박미소가 걸렸다.
“축하해.”
“고마워요.”
그녀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짧게 눈을 맞췄는데.
그녀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예상을 했음에도 감격스러운 모양이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지금 나도 그러니까.
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무언의 응원을 해주며 무대 아래에서 대기했다.
꽃다발이 한가득이라, 내려갈 때 저걸 대신 가지고 내려와줘야 한다.
곧이어.
물기 어린 그녀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리기 시작했다.
작품을 함께 만든 작가와 구선학 감독, 그리고 스탭들과 배우들을 언급하며 감사함을 표했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카메라가 있는 정면이 아닌, 무대 옆에 있는 내 쪽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행운을 깃들게 해주는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어디 가서 말은 못했지만, 이 마법의 주문이 절 여기까지 이끌었던 것 같아요. 무대공포증 때문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던 저를 발견해주시고, 옆에서 계속 응원해주시고, 여기까지 데려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말은 차에서 연습할 때 못 들었었는데.
여우조연상도 남아 있지만, 벌써부터 머리가 뜨거워졌다.
새하얗게 달아올라서 내일 돌이켜 생각했을 때, 지금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을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마이크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며 소감을 마치자, 박수가 터져 나왔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꽃다발들을 가득 품에 안은 채 무대 아래에 내려와 있었다.
“박한울.”
“네?”
안다는 얼굴로 씨익 웃고 있는 윤본부장님.
“기분이 어때?”
난 고개를 천천히 홀 중앙을 향해 돌렸다.
헌만사 테이블에서 박송이와 구선학 감독 등에게 축하 인사를 받는 채희가 보인다.
낙하산으로 떨어진 회사 입사 첫날, 우리 회사 주차장에서 그녀의 연기를 봤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고.
그녀에게 ‘또라이’ 소리를 들었던 것부터, 함께 했던 많은 추억들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런 그녀가 지금 신인상을 받고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기분이 어떠냐고?
이 터질 것 같이 감정들은 뭐라고 딱 잘라 정의할 수 없었다.
다만.
“끝내주네요.”
중독되고 싶을 정도로.
“하하! 그치. 그 말도 맞지. 하하!”
내 표현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공감을 하는 건가.
어쨌든.
난 이 끝내주는 기분을 얼마 안 가 다시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여우조연상입니다. 2관왕이네요. 축하합니다! 정채희!”
***
‘헌만사’의 성적표는 화려했다.
올해의 드라마상을 수상했고, 박송이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채희는 신인상과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안타깝게도 남자 배우들은 무관에 그쳤고, 대상은 애초에 노미네이트 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회식 자리는 대상 부럽지 않을 정도로 들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사실 올해의 드라마상이면 드라마 전체로는 대상이라는 거 아닌가.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설마 이름 안 말했다고 삐진 거 아니죠?”
여우주연상을 타고도 수상소감에서 내 이름을 언급도 하지 않은 박송이가 뻔뻔하게 다가와 물었다.
“제가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묻자,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난 실소를 터뜨렸다.
“제가 삐지긴 왜 삐집니까. 말도 안 되지. 솔직히 ‘더 BAD’나 ‘우리들의 세상의 빛은 없다’면 몰라도, ‘헌만사’ 때는 저한테 도움 같은 거 받은 적 없잖아요. 송이 씨 계산이 정확하신 거죠. 이건 ‘헌만사’로 탄 상이니까. 누가 보면 회계사인 줄? 하하. 그렇다고 다음에 말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제가 송이 씨 매니저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탭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니까.”
“와아···.”
난 바보처럼 입을 쩍 벌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채희를 바라봤다.
어쩜 먹는 것도 이렇게 복스러울 수가 있을까.
복어처럼 볼이 빵빵하다.
“저기요. 한잔 받아요.”
박송이가 소주병을 들고 말했다.
난 절대 저런 걸로 삐지지 않기 때문에 미소를 머금으며 술을 받았고, 반대로 그녀에게도 술을 따라줬다.
“감사 인사가 늦었네요. 부적 씨, 그쪽한테도 고마워요.”
“네? 저한테요? 헌만사 때 해드린 것도 없는데요?”
“어휴···. 됐고, 짠이나 합시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었어요. 여우주연상 타신 거 축하드려요.”
“장난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장난이었어요. 정말로요. 저 그런 캐릭터 아닌 거 잘 아시잖아요.”
“···.”
우리는 잔을 부딪혔고.
“우웁! 우부부우웁!”
채희도 볼에 음식을 가득 채운 채, 잔을 부딪혔다.
***
한편, 그 시각.
막 사전녹화를 마치고 다시 대기실에 들어온 유현지는.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아까 본 기사 타이틀을 다시 훑어봤다.
-시상식 봤어? 박실장님이 엄청 좋아하시더라.
“네, 봤어요.”
[MBS 연기대상, 정채희 2관왕. “마법의 주문이 절 여기까지 이끌었던 것 같아요.”]
[신인상과 여우조연상 수상한 정채희와 겉바속촉 매니저, 표정 본 네티즌들 흐뭇.]
[박한울 실장이 또라이 부적!? 괴물신인 정채희의 비결은 매니저였다.]
기사엔 화면에 잠깐 동안 비쳤던 박한울의 표정과, 눈물을 흘리며 수상소감을 말하는 정채희의 얼굴이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이를 보는 유현지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띠워져 있었다.
-박실장님이 정채희만 편애하는 거 아니지? 너도 잘 챙겨주는 거 맞지?
“네. 부족하다고 느낀 적 한 번도 없어요. 엄마, 걱정 안 해도 돼요.”
-내일 너한테는 아예 안 온다며! 그런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내일은 MBS의 가요축제와, ‘BJ김만수’가 방영된 SBC의 연기대상이 같이 진행되는데.
박한울은 SBC 연기대상에만 참석하기로 했다.
“엄마, 그건 당연한 거예요. 가요축제는 시상 안 하잖아요.”
-그래도. 너 잠도 못 자고 계속 이렇게 방송국 돌아다니면서 고생하고 있는데, 연기대상 끝나고 얼굴 정돈 비출 수 있는 거잖아.
어머니의 걱정이 유별났지만, 현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수많은 칭찬 글보다 소수의 악플이 눈에 더 크게 들어와 가슴에 꽂히니, 능력이 뛰어나다고 전국에 소문난 박한울이 딸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인 것이다.
현지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며 조곤조곤 말했다.
“엄마, 정채희 선배님은 오늘이 끝이고, 심민정 선배님은 내일이 끝이에요. 그리고 전 내일 빼도 앞으로 세 번이나 더 남아 있어요.”
3사 공중파 무대 중에 하나를 못 온다고 해도.
나머지 2개의 공중파 무대와 더불어, 케이블에서 진행되는 국내 유일의 가요 시상식, ‘KAMA’가 남아 있었다.
-···그래, 걱정할 필요 없는 거지? 우리 똑똑한 딸이 알아서 다 잘하고 있는 거 맞지?
“네, 엄마. 다 잘 되고 있어요.”
회식하느라 바쁜 모양인지, 축하한다고 보낸 메시지엔 아직까지 답장이 없었지만.
현지는 그게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