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24화 (124/170)

< 크리스마스 이브 >

송하연의 앨범이 발매되기까지 약 한 시간여가 남은 시각.

그녀는 홍보를 위해 촬영을 준비 중이었다.

음악방송이 아닌 예능.

효율이 좋지 않아, 이번 앨범부터는 음악방송을 나가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홍보야 음악방송에 출연하지 않는다 해도 알아서 될 테고, 팬들을 위한 라이브 영상이나 무대 영상 같은 건 음악방송이 아닌 유튜브로 대체해도 되니까.

대신 시기가 시기라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며 초반에 바짝 홍보해야 했다.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다, 시상식이다, 하며 화제가 다른 쪽으로 옮겨갈 테니까.

“실장님, 스케줄 새로 잡기 전에 꼭 먼저 말씀해주셔야 돼요?”

“알겠어. 걱정하지 마.”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다는 듯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실장.

표정을 보니, 혹시라도 좋은 기회가 오면 상의 없이 덥석 물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하연아, 오랜만이야.”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봬요. 잘 지내셨죠?”

“잘 지냈지. 노래 잘 듣고 있어. 새로운 앨범도 이제 곧 나오지?”

프로그램의 MC가 와서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문득 통화하는 정실장님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네, 작가님. 아, 스페셜로 꾸며주신다고요? 어떻게요? 네네.”

또 스케줄이 들어오나 보다.

배려심 많은 MC는 이를 슬쩍 보곤 말했다.

“오늘 촬영 잘하자. 편하게 해.”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가 미소를 띠우며 자리를 비켜주자, 하연은 통화하며 수첩을 뒤지는 정실장을 빤히 바라봤다.

“네네. 아, 그런데 날짜는 언제인가요? 네. 이브요? 한 번 스케줄 살펴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송하연의 시선을 받으며 통화를 끊었고.

정실장은 방금 받은 통화 내용을 줄줄이 말했다.

“이거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스페셜로 꾸며주겠다고 하네?”

“별로인 것 같아요.”

“어? 왜?”

이유를 묻는 정실장에게 하연이 눈을 굴리며 말을 골랐다.

“아니 그냥··· 24일부터는 스케줄 안 잡을게요. 시상식 무대 연습도 해야 해서요.”

딱히 이유로 댈 게 궁색해서 그런 건 아니다.

정말 무대 연습도 해야 하긴 했으니까.

“이미 구성이랑 연출은 다 정해졌잖아.”

“구성, 연출만 정해진 거지, 그거에 맞춰서 연습도 해야 해서요. 이번 앨범으론 제대로 된 무대에 처음 서는 건데 대충 하면 안 되잖아요.”

송하연은 손에 든 핸드폰을 자꾸 들어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리고 결국 촬영이 시작되며, 하연은 한숨을 작게 폭 내쉬며 촬영에 임했다.

***

성스러운 날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커플들이 길거리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날.

그리고, 여친도 없으며 회사에서 일해야 하는 나에겐 티끌만큼의 관련도 없는 날.

하지만 괜찮다.

난 지금 네 명의 여자와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

“실장님, 울어요?”

“···울길 바라는 거 아니고?”

친화력이 좋은 건지,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송하니가 깔깔 웃는다.

송하니와 성윤지, 강해정, 이효진.

시간 나면 다른 팀 연습 좀 봐달라는 윤본부장님의 부탁에 따라, 오늘 이른 아침부터 장찬수의 연습과 데뷔를 앞둔 보이그룹의 연습을 봐줬고, 지금 얘네까지 연습을 봐주는 중이었다.

정말 시간이 남았거든.

집에 가만히 있기엔 왠지 슬퍼져서 밖으로 나오려 했는데, 딱히 갈 데가 여기 말곤 생각이 안 났었다.

나도 참 불쌍한 놈이지.

‘···연락하기에도 좀 그렇고.’

편하게 연락할 사람들은 있다.

그런데, 다른 날이라면 몰라도 크리스마스 이브인 오늘, 이유 없이 만나자고 연락하면 왠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못했다.

이 모양이니까 여태까지 솔로인 거겠지. 누굴 탓하랴.

그래도 시간을 낸 보람이 있었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밀린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기분이다.

“진짜 너무 예쁘다. 노래도 엄청 좋고.”

“하니야, 선배님은 오늘 뭐하셔? 연락해봤어?”

“나도 잘 몰라. 이제 앨범도 나왔는데 스케줄하고 있지 않을까?”

연습을 봐주던 중 가진 잠깐의 쉬는 시간.

자기도 이브에 연습하고 있는 처지면서 날 놀리고 있는 송하니를 제외하고, 다른 멤버들은 송하연의 뮤비와 라이브 영상을 보며 연신 감탄을 쏟아내고 있었다.

난 그녀들의 반응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연말이라 그런지 유독 스캔들도 많고 화제도 많았는데, 송하연의 앨범이 나오며 그녀가 모든 화제들을 독식해버렸다.

차트를 휩쓸어버린 것은 물론, 뮤비와 라이브 영상도 유튜브 급상승 영상 1, 2위에 나란히 오르며 조회수를 더욱 높여갔고, 출연한 예능으로 또 한 번의 화제를 몰고 있었다.

이럴 때면 그녀가 슈퍼스타였다는 걸 새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어느새 송하연의 음악을 감상하는 멤버들에 합류한 송하니.

난 앞에 있는 병아리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핸드폰엔 떡하니 반지 사진이 띠워져 있었다.

‘반지 갖고 싶다고 했었지?’

송하연이라면 시상식 때 반드시 상을 탈 테니, 그때 주면 딱 적절할 것 같았다.

참, 올해 초까지만 해도 집안에서 빈둥거리기 바빴는데, 지금은 온갖 화제를 휩쓰는 슈퍼스타에게 건넬 축하 선물을 고르고 있다니 감회가 새롭다.

‘그런데··· 반지 선물해도 되려나?’

그녀가 반지를 좋아한다는 건 한참 전에 알았지만 아직까지도 사놓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이브에 이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반지를 선물하면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설령 그녀 본인은 기쁘게 받을 지언정 다른 사람이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

원래라면 나도 이렇게까지 찌질하게 고민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송하연은 연예인이기도 하고 심지어 슈퍼스타이니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헛소문이라도 나면 직격탄이니, 담당은 아니더라도 같은 팀 매니저로서 이런 기본적인 것을 소홀히 생각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괜찮으려나?’

어떻게 보면 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특별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반지를 선물한다고는 하나, 다른 이들에게도 악세서리를 선물해줬으니까.

‘그래, 그냥 사자.’

핸드폰에 띠워진 반지의 사진을 보며 그렇게 마음을 굳혔을 때였다.

“헉···! 실장님, 여자친구 생겼어요?”

분명히 멤버들에게 붙었었는데 언제 또다시 이쪽으로 왔는지, 송하니가 눈을 크게 뜨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핸드폰을 훔쳐봤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애초에 내가 부주의했다.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 핸드폰을 두고 있었으니, 이쪽으로 걸어오면 저절로 시야에 들어올 수밖에.

“내가 여친 있었으면 지금 여기에 있었겠니?”

“아, 그러네요? 근데 반지는 왜 보세요?”

뭐라고 대답할까 하다가, 그냥 사실대로 말해보기로 했다.

송하연과 친하게 지내는 사촌동생이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 미리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

대신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다른 애들에게도 선물했다는 것 또한 말해야겠지.

“이번 시상식에서 네 사촌언니 상 타면 축하의 의미로 선물해줄까 했지. 민정 씨랑 채희랑 현지까지 다 선물해줬었는데 아직 하연 씨한텐 선물 못 해줬거든. 각자 목걸이랑 팔찌, 귀걸이 선물해줘서 하연 씨 선물도 악세서리로 맞추려고.”

난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반지를 줘요?”

“미리 악세서리 뭐 좋아하냐고 물어봤었어. 반지 좋아한다고 하더라.”

송하연의 영상을 보던 멤버들도 어느새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송하니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그게 사달라는 뜻은 아닐 수도 있잖아요. 혹시라도 언니가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그냥 심플하게 목걸이 선물해주시는 건 어때요? 반지가 아니더라도 언니는 되게 고마워할 것 같은데. 다른 선배님이랑 겹친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잖아요. 상품만 다르게 고르면 되고.”

“음···. 그런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목걸이는 이미 채희에게 줬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채희한테 줬던 거랑 다른 목걸이로 선물해주면 되지.

“그래, 확실히 그게 낫겠네.”

언제나 조심해도 모자란 연예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기자들이나 팬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의 소지조차 줘서는 안 된다.

“아무튼 이거 당분간은 비밀이다? 어디 가서 절대 말하면 안 돼? 좋은 의미로 선물해주는데 미리 알아버리면 김새잖아.”

흥미가 식은 멤버들은 모두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송하니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쉴 만큼 쉬었지? 그럼 다시 맞춰보자.”

“네!”

“넵!”

***

크리스마스 이브, 같은 시각.

“···뭐야. 오늘 일하나?”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씻고 화장까지 마친 채희는 조용한 핸드폰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연락이 올 때가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감감무소식이다.

“분명 오늘 아무것도 없었는데···.”

혹시 친구들이랑 놀러 나갔나?

아니면 비밀로 하고 사귄 여자친구?

“아냐. 일만 했는데 여친 사귈 틈이 어딨어.”

그래도 혹시 모른다.

전쟁통에도 눈이 맞는다고 하지 않은가.

“우리 사이에 진짜 숨기는 건 아니겠지?”

한동안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리던 채희는 참을성의 한계에 다다라 직접 전화를 걸기로 했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에 말을 꺼내려 했는데, 문득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익숙한 목소리.

“···오빠, 하연 선배님이랑 같이 있어요?”

-응. 회사에 일하러 왔는데 시상식 무대 연습하는 것 좀 봐달라고 연락 와서. 마침 하던 일도 끝나서 같이 있어.

채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대본 한 권을 발견하며 눈을 빛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것 같다.

“···저도 마침 연습할 거 생겼는데, 가도 돼요?”

-드라마도 끝났는데 연습할 게 있어?

“뭐 안 찍고 있으면 연습하면 안 돼요? 원래 배우는 꾸준히 연습해야-“

말을 하던 그때, 또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유현지의 목소리. 지금 막 왔는지 송하연에게 인사를 건네는 말이 들려왔다.

채희는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피차 외로운 솔로기도 하고 가장 친한 사람이라서,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는 이상 당연히 같이 시간을 보낼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먼저 연락을 안 하고 있었는데, 저긴 이미 하하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와. 진짜 대박이다.”

-어? 뭐가? 심심하면 너도 올래? 이따 같이 밥 먹을 건데.

“됐어요!”

뚝, 전화를 끊고선 씩씩거렸다.

학창시절 중간고사가 완전히 끝난 날, 당연히 단짝과 같이 놀 거라 생각해 굳이 약속도 잡지 않았는데, 자신이 아닌 다른 친구와 함께 교실을 빠져나가는 걸 목격한 기분이다.

같이 활동하는 동안 가장 친한 사이가 됐다고 생각했더니, 그는 아니었나 보다.

“나도 친구 있다, 뭐!”

채희는 바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야, 나 바빠. 끊어.

뚝, 끊어진 전화.

채희는 벙찐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바로 연락처의 이름을 수정했다.

‘예쁜 송이 선배님’에서 ‘시라송이 선배님’으로.

***

“흠흠.”

빨개진 얼굴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언제는 안 올 것처럼 말하더니, 손에 대본까지 들고 나타났다.

저거 이미 종영돼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건데.

“안녕하세요.”

“넵, 선배님. 안녕하세요.”

송하연이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자, 채희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된 건지.

며칠 뒤에 있을 시상식을 지금 하는 것처럼 이곳에 있는 면면들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송하연, 유현지, 심민정, 정채희까지.

슈퍼스타의 총집합이지 않은가.

다들 연습하러 오는 것 같지 않게 예쁘게 하고 와서 눈이 부실 정도다.

대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하여 주변에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보통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스타들도 가까운 사람은 한정적이며, 특별한 날을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은 더욱 한정적이다.

그동안 쌓은 유대감이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는지, 따로 약속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모이게 되니 기분이 좋았다.

다들 연습하러 왔다고 해놓고 정작 연습은 아무도 안 했지만, 우린 그 누구도 불평을 내뱉지 않았다.

‘외롭진 않네.’

아니,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비록 이곳이 회사의 연습실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더 화려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난 여전히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희에게 물었다.

“밥 뭐 먹을래?”

“저 대본 연습하러 온 건데요?”

“밥은 먹고 해야 될 거 아냐. 뭐 먹고 싶은데.”

“···떡볶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난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되물었다.

“이제 시상식인데 식단 관리 안 해도 돼? 드레스 예쁘게 입어야지.”

“···그럼 보쌈?”

떡볶이나 보쌈이나.

난 옆에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보쌈 괜찮아요?”

다들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난 메뉴 따위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메뉴야 아무럼 어때.

같이 먹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시상식을 앞둔 크리스마스 이브.

완벽한 연말을 위해, 그리고 지난 일 년 간의 보상을 받기 위해선, 반드시 상이 필요하다 생각했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올해 열심히 일한 보상은 이미 분에 넘치도록 받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 크리스마스 이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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