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23화 (123/170)

< 해피엔딩, 그 이후의 시점 >

방금 전, 나와 송하연이 연습실에서 함께 찍었던 앨범 소개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갔다.

포토 티저와 영상 티저, 뮤비 티저 등, 풀 만한 건 이미 다 풀렸기에 팬들의 기대감이 한껏 높아져 있었는데.

이때 소개 영상이 올라갔으니 당연히 화제가 됐고 조회수도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스타 아이돌' 이후 아직 나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은 덕이기도 했으며, 어제 현지의 팬사인회 영상이 올라간 덕이기도 했다.

콘서트를 추진하겠다는 발언과, 여러분 같으면 팔겠냐는 팔불출 같은 발언 때문에 내가 또다시 화제가 됐거든.

물론 천사 같은 현지의 모습이 훨씬 더 큰 화제가 되긴 했지만.

"한울아, 민정 씨는? 리딩이 몇 시였지?"

회의실로 들어온 윤본부장님이 물었다.

오늘은 중소기업 신입사원의 성장 드라마, <수세미>의 리딩이 잡혀 있고.

심민정은 로드 매니저와 함께 벌써 샵에 가 있었다.

"지금 샵이에요. 2시에 시작이니까 1시까진 샵으로 픽업 가야 돼요."

"그럼 회의 빨리 끝내야겠네."

윤본부장님과 최팀장님, 정실장님과 홍보팀 직원들, 그리고 로드 매니저까지 함께 회의를 시작했다.

현지의 스케줄과 콘서트 일정, 채희 드라마의 홍보 일정과 차기작 계획, 하연의 컴백, 그리고 광고와 행사, 예능.

그리고 마지막으로, 곧 있을 시상식에 대해서까지 참 회의할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암넷에서 이번에 현지랑 하연이 합동 무대 어떠냐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윤본부장님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묻자, 최팀장님의 눈이 커지며 되물었다.

"그걸 걔네가 먼저 제안했습니까? 혹시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대신 현지랑 하연이 무대 시간 줄이려는 수작 아니고요?"

"아니야. 무대 시간은 오히려 넉넉해. 그냥 화제도 되고 유튜브 조회수 좀 빨겠다는 거겠지. 이번에 담당자가 바뀌었거든. 성공적이었다는 평 들으려고 그러는 걸 거야."

"음.... 이왕 하려면 제대로 준비해야 하는데 그럼 시간이 많이 필요하잖습니까. 하연이가 이제 컴백이라서 합동 무대 꾸미는 데 쓸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크게 득이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고요."

반대라는 입장을 말하는 최팀장.

신인이라면 무조건 잡아야 하는 좋은 기회가 될 테지만, 우리로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송하연과 유현지는 색깔이 다르기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넙죽 받아들였다가 안티들에게 빌미를 줄 수도 있다.

둘 다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누가 더 낫다, 얘는 별로다, 하면서 문제 삼으려 한다거나.

연예계가 늘 그렇다. 언제나 위험을 생각해야 하고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해야 한다.

심지어 많은 팬덤이 주목하는 중요한 무대에서면 더욱이.

만약 응원하는 아티스트의 무대 시간이 짧거나 무대에 오르지도 못하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표적이 되는 것은 우리일 거다.

말하자면, 독이 든 성배랄까? 그것도 그리 크게 득이 되지 않는 성배.

"박실장은 어떻게 생각해?"

윤본부장의 물음에 난 바로 답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송하연과 유현지의 합동 무대.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머릿속에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다.

둘 모두에게 어울리는 무대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역시 버리기엔 아까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송하연의 컴백도 컴백이지만, 촉박하게 준비하다간 이번 무대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클 터.

'이왕 하려면 각 잡고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정식으로 싱글을 낸다든가.'

언제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아이디어들은 머릿속에 고이 간직하기로 했다.

"저도 반대입니다."

난 생각했던 바를 다 전했고, 윤본부장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이렇듯 득과 실을 따지고, 보이지 않는 칼까지 염두에 두며 진행되었다.

다행히 윤본부장님과 최팀장님이 유능한 덕분에 회의는 늦지 않게 시간에 맞춰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다.

정말 이 둘과 함께 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바쁘겠지만 시간 나면 다른 팀도 좀 봐줘. 나를 아주 들들 볶더라고. 정 필요하면 직접 말하면 되지, 하여간 내가 제일 만만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차는 윤본부장님.

우리 회사에 아티스트들은 꽤 많지만 여기서 말하는 '다른 팀'이라 함은, 아마 장찬수와 이번에 데뷔할 보이그룹, 그리고 걸그룹을 말하는 걸 거다.

각 팀에서 지금 가장 중요하게 신경 쓰는 이들이니까.

"네, 알겠어요."

회의실에서 나와 바로 택시를 잡고 샵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땐 12시 55분.

그녀도 일찍 끝났는지 차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조금 늦었나 보네요."

"저희가 일찍 끝난 거죠. 5분이나 일찍 오셨잖아요."

싱긋 웃는 그녀. 팔찌를 낀 손에는 대본이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봤는지 벌써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포스트잇과 메모로 빼곡했다.

그와 대비되게 팔찌는 아직도 번쩍번쩍 빛이 났다.

항상 차고 있는 것 같은데 관리를 잘했나 보네.

"음? 실장님, 시계 사셨어요? 와, 이쁘다.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매다가, 들려오는 말에 멋쩍게 미소 지었다.

이걸 말해, 말아? 현지가 선물해준 것 때문에 채희도 선물해준 것 같은데, 이것까지 말해버리면 자기도 선물을 줘야 하나 눈치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또 대충 얼버무리기엔 채희한테 미안하지.

"채희가 선물해줬어요."

난 무덤덤하게 말하며 바로 말을 돌렸다.

"장감독님도 그렇고 조작가님도 그렇고 대본에선 그리 빡빡하진 않으니까, 애드립 같은 거 떠오르거나 더 좋은 대사 떠오르면 망설이지 말고 한 번 해봐요. 같이 하는 배우분들도 다 잘하시는 분들이라 잘 받아줄 거예요."

"그래도 돼요? 제가 또 불쌍한 신입 역할은 메소드로 잘할 자신 있는데. 하하."

큐빅엔터에 몸 담았던 신인 시절, 안 좋았던 일 투성이였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이제 와 웃으며 말하곤 하나, 당시엔 많이 힘들었겠지.

"실장님은 신입 때 어땠어요? 전 실장님 성공한 뒤부터 봐서 잘 모르는데, 처음부터 잘하셨어요?"

"음. 잘했던 것 같아요."

"안목 말고요. 다른 면에서는 어땠어요? 혼난 적 있어요?"

"혼났었나? 딱히 그런 기억은 없는 것 같아요. 윤본부장님이랑 한팀장님이 그때도 잘해주셨거든요."

입사하자마자 채희의 담당이 되고도 한동안 여기저기 메뚜기를 뛴 적이 있었고, 그때는 곳곳에서 무시도 많이 당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걸 묻는 건 아닐 테니까.

당시 윤팀장님과 한실장님이 정말 많이 챙겨주셨다.

"와, 처음부터 그렇게 잘하는 게 말이 돼요?"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운전하는 로드 매니저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매니저님, 그쵸? 매니저님은 실장님한테 혼난 적 있어요?"

내가 요즘 밀어주며 여기저기 같이 데리고 다니는 매니저, 이정욱.

"부러운 적은 많아도 혼난 적은 없어요. 그런데 어쩌면 혼나는 게 더 나을지도...."

날 힐끔 보곤 말끝을 흐렸다.

난 피식 웃고는 뒤에 앉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잘하는 거 그렇게 큰 의미 없어요. 민정 씨만 봐도 결국엔 이렇게 성공하고 있잖아요."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네. 사람을 잘 만나서."

"제가 몇 번이나 말했죠? 저 아니었어도 민정 씨는 알아서 잘될 거였다니까요. 이미 연기 실력도 잘 쌓아놓으셨으면서."

"그래도 실장님한테 많이 배웠는데요? 실장님 없었으면 'BJ김만수' 때 그렇게 못했어요, 저."

"전 제 할 일을 한 거고, 민정 씨는 민정 씨 할 일을 잘한 거죠."

말을 마치고 뒤를 향했던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는데, 문득 이정욱의 표정이 스치듯이 눈에 들어왔다.

미간이 꿈틀꿈틀.

설마 부럽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건가?

별것도 아닌 걸로 무슨.

"정욱아."

"네."

"나처럼 해보든가."

"...."

***

'아, 춥다.'

차에서 내린 심민정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으며 목을 움츠렸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걸음을 옮기면서도 업무적인 통화를 하는 박한울의 입에서도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입을 열 때마다 한 움큼씩.

심민정은 그를 빤히 올려다 봤다. 그리고 그가 전화를 끊자 시선을 다시 앞으로 옮겼다.

주차장에서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니 추위가 조금 가셨고.

복도를 지나 리딩장으로 들어가자 확 따뜻해져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인사를 하곤 '심민정'이라 써져 있는 종이 명패 앞에 앉았다.

이내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왔고, 마침내 본격적으로 리딩이 시작됐다.

자신의 뒤엔 박한울과 로드 매니저가 있다.

단지 이것만으로도 민정은 자신감과 열의가 충만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드라마의 제목은 '수세미'.

요리와 식사에 사용되는 냄비도, 프라이팬도, 접시도, 수저도, 모두 마모되는 게 느리지만.

모든 걸 마치고 난장판이 된 싱크대의 식기들을 닦는 수세미는 금방 마모된다.

그 전까진 신경도 쓰지 않다가 어느덧 보면 앞에 놓인 대본처럼 너덜너덜해져 있고 구멍이 뚫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쉽지도 않다.

대체하는 것도 쉬우며, 그저 닳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막 사용하는 데에 거침이 없다.

조수연 작가는 현대의 신입사원들을 이에 비유했다.

민정은 비록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없지만 이 비유가 무척이나 가슴에 와닿았다.

'안녕하세요! 레이니데이입니다.'

'네네. 어? 이지연? 아, 지연 씨가 레이니데이였구나. 하하, 실례했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환경.

'음, 다른 멤버들은 뒤로 가주시고, 지연 씨는 가운데로. 좀 더 앞에. 그리고 여기 적힌 대로 읽어주시면 됩니다. 다른 멤버들은 조용히 하셔야 돼요. 튀는 행동은 하지 마시고.'

무시받는 일상 속에서도 애써 미소를 띠워야 했다.

'야! 넌 이것밖에 못 하냐? 너네가 잘했어 봐! 내가 지연이가 예뻐서 밀어주는 것 같아? 너네가 이것밖에 안 되니까 그러는 거 아냐! 무임승차로 여기까지 왔으면 좀 노력이라도 해라.'

죽도록 노력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봐주지 않으며, 억울해도 이에 대해 함부로 대꾸할 수도 없다.

그저 혼나면 혼나는 대로, 가슴은 썩어 문드러지는데 고개를 숙여야 했다.

눈치보는 매일매일. 소리죽여 울고, 자신과 다르게 잘나가는 이지연을 시기하고, 그런 자신이 너무 못나보여 스스로를 갉어먹었었다.

어떻게든 칭찬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울음을 멈추고 어떻게든 살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비웃음과 함께 절대 안 될 거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연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 대본에 있는 신입사원 또한 자신과 같다.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우러지고 싶어 한다.

심민정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대사를 입에 담았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하냐고요? 그냥... 잘하고 싶어서요. 꼭, 잘되고 싶어서요. 지금은 아무도 몰라줘도 잘할 거예요. 잘해서 보란듯이 성공할 거예요.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한 번 열심히 해보려고요."

조연배우들은 현실감 넘치는 연기를 했고, 자신과 같은 주연 배우도 몰입감 있는 연기를 펼쳤다.

대사가 좋아서 그런지, 다들 연기가 어우러져서 그런지, 합을 맞출수록 점점 색깔이 또렷해져만 갔다.

예감이 좋다.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시청률이 낮게 나오더라도 이 드라마는 열렬한 사랑을 보내는 매니아 층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인생 드라마라 말하며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대본 리딩이 한참 이어지다 갖게 된 쉬는 시간.

민정은 몸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그토록 원했던 인정과 애정이 넘치도록 담겨 있었다.

민정은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괜찮았어요?"

"네, 잘했어요. 너무 좋았어요."

아직 드라마의 대본이 끝까지 나오지 않아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현실은 이미 해피엔딩, 그 이후의 시점이 되어 있었다.

"아까 애드리브 한 거 봤어요? 오늘 실장님이 말해주기 전에 이미 대본에 적어놨었거든요."

"그래요? 되게 좋은데 왜 말 안 했어요."

"리딩에선 적힌 대로 하고, 촬영 때 얘기해볼까 했죠. 그리고 발성이랑 발음도 좀 더 좋아진 것 같지 않아요? 매일 한 시간씩 연습하는데."

"한 시간이나요? 대체 얼마나 더 잘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해요? 좀 쉬엄쉬엄 해요. 지금도 되게 잘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미모는 연습 안 해도 될 듯? 이미 넘칠 만큼 예뻐서."

눈을 부드럽게 휘며 치는 장난에 박한울은 피식 웃었고, 로드 매니저는 미간을 꿈틀거리며 발걸음을 뗐다.

"이정욱, 어디 가?"

"저 속이 좀 느글거리는 것 같아서 콜라 좀 사려고요."

"아, 그럼 내 것도 좀 사와주라. 여기 카드."

"...네."

< 해피엔딩, 그 이후의 시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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