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 게 없긴 왜 없어 >
박한울이 유현지에게 선물받은 넥타이 핀.
자랑한 게 방송되고도 채희는 이를 일부러 모른 척했다.
아직 자신은 선물해준 게 없었으니까.
"아, 진짜. 뭘 선물해야 되지?"
유현지는 실장으로 승진한 기념으로 선물했다지만, 다음 명분이 생길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찝찝했다.
명분이야 아무거나 갖다 붙이면 그만이니, 뭐라도 선물해주고 싶은데.
도통 뭘 선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마지막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 이런 거밖에 없는 거야.... 진짜 남자들이 이런 걸 좋아하나?"
그 방송을 보자마자 인터넷에 '남자 선물'이라고 검색해봤었다.
그런데 나오는 건 지갑, 시계, 넥타이, 벨트, 향수 정도.
누가 대표님 아들 아니랄까 봐 박한울은 이미 값비싼 지갑을 들고 다녔고, 벨트는 하지 않았으며, 향수와 시계 또한 쓰지 않았다.
그러니 뭘 선물해야 할 지 막막할 수밖에.
"...음악 좋아하니까 명반 CD나 살... 아니다. 이건 아니야."
넥타이 핀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디 가서 보여주며 자랑할 수 있도록.
착용할 때 계속해서 떠올릴 수 있도록.
그녀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습관처럼 매만지며 미간을 모았다.
"으음...."
몇 날 며칠간 고민해봤지만 결국 답은 나오지 않는 건 같았다.
그래서 왠지 이런 거에 대해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매일 보는데 왜 전화야.
"선배님! 도와주세요!"
어느새 연예인들 중 가까운 사이가 된 박송이 선배.
채희는 그녀가 전화를 받자마자 곧바로 고민을 풀어냈다.
-그러니까 좋아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선물이라니까요! 매니저니까! 보답 차원으로!"
-그래, 그렇다고 치고. 음....
박송이는 웃음기 짙게 깔린 목소리로 선물 리스트 몇 개를 꼽았고.
이를 들은 채희의 눈동자는 사방팔방 거칠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선배가 추천해진 선물들은 제정신에 선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시계나 선물해야겠다."
그래도 그렇지, 그것들은 좀 아니었다.
어떻게 입고 있-
"안 돼! 절대 안 돼!"
그녀는 버럭 소리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애써 떨쳐냈다.
***
매년 더 짧아지고 있는 것 같은 가을이 눈깜짝할 새 지나가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오늘은 채희가 찍고 있는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의 마지막 촬영일.
난 오늘 처음부터 끝까지 스케줄을 함께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채희의 집으로 향했다.
완전 사전제작이다 보니, 편집은 아직 하나도 되지 않았지만 덕분에 촬영은 이렇게 일찍 끝낼 수 있게 됐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건 내년으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올해 시상식에 이 드라마가 포함될 리는 없다.
넷플릭스 드라마라서 백상예술대상이 아닌 한, 방송국 시상식에 후보에도 오를 일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헌만사' 덕분에 MBS시상식에서의 활약이 거의 확정되어 있으니, 내년을 대비하는 것도 좋겠지.
'생각해보니 너무 빨리 달려왔네.'
채희는 벌써 이번에 네 작품째다.
웹드라마 <캠퍼스 낭만이 원래 이런 거야?>와, MBS드라마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 그리고 영화 <더 BAD>에 이어 내년에 방영할 이 드라마까지.
웹드라마는 특성상 촬영이 너무 일찍 끝나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곧바로 헌만사로 들어갔었고, '더 BAD'는 조수연 작가님과 구선학 감독님, 그리고 스탭들과 배우들 모두 유능했기에 촬영이 늘어지지 않고 초고속으로 찍을 수 있었다.
'내년엔 시상식 다 쓸어버려야지.'
2월에 예정된 청룡영화제와 5월에 예정된 백상예술대상.
<더 BAD>와 드라마들로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깜짝 놀라겠지?'
채희가 제대로 된 액션을 찍는다는 게 언론에 공개되면, 과연 대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잘할 줄은 아무도 예상 못하겠지.'
그래서 더욱 수상에 유리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이번 작품 이후로 액션은 절대 안 할 것 같으니까.
난 채희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어요?
"응, 지금 내려와."
-네.
5분 정도 기다렸을까, 그녀는 평소에 매고 다니지 않던 핸드백을 들고 차 안에 몸을 실었다.
"웬 백?"
"오늘 촬영 끝나고 회식이잖아요. 술 먹는 척하고 여기다가 뱉을 거예요."
"...누가 강제로 먹이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 있어? 먹기 싫으면 그냥 안 먹으면 되지."
채희는 이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대충 휘적이고는 말을 돌렸다.
평소에 마찬가지로 영양가 따위는 조금도 없는 시시하고 하찮은 얘기들.
만약 초능력이 생기면 뭘 갖고 싶냐는 둥, 지금 당장 지인에게 선물받고 싶은 게 있냐는 둥, 여자친구한테 선물받은 것들 중 뭐가 가장 충격적이었냐는 둥.
아주 쓸데없는 얘기들이었지만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이만한 게 또 없기도 했다.
별로 달린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촬영장에 도착해버렸지 않은가.
"실장님, 오셨어요? 오늘 회식 가시죠?"
"박실장도 이제 방송 타서 그런지 얼굴 훤해졌네. 하하!"
어느새 이러한 반김도 일상처럼 자리잡았다.
채희가 스탭들에게 잘하지 않았다면 이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겠지.
우린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를 돌았고.
채희는 곧바로 박송이 옆에 붙어 속닥속닥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길래.
채희와 달리 박송이는 연신 키득키득 웃고 있었는데, 나와 딱 눈이 마주쳤다.
"저기요, 겉바속촉 씨. 지금 얘가- 우웁!"
"선배님!"
"우웁! 푸하! 야! 코랑 입을 같이 막으면 어떡해!"
난 이럴 때를 위한 삶의 지혜를 잘 알고 있었다.
모르는 건 그냥 모른 채로 놔두는 것도 정신 건강을 이롭게 하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
"스탠바이하겠습니다!"
대중들을 놀라게 할 액션 스릴러 판타지 드라마의 마지막 촬영.
아쉽고 홀가분하며 뿌듯한 분위기가 만연한 가운데.
배우들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마찬가지로 찬란하게 빛났다.
그래, 이게 드라마지.
이게 연기고.
***
"크으! 술맛 좋다!"
채희는 자신이 광고한 소주를 마시며 잔을 탁, 내려놓았다.
분명히 CF를 찍을 땐, 이렇게 마시지 않았는데.
소주병에 떡하니 프린팅된 채희의 모습과, 지금 볼이 터져라 쌈을 욱여넣고 있는 채희의 모습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극심한 차이가 있었다.
"야, 천천히 먹어. 누가 안 뺏어먹는다."
"우웁우우국우웁."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린다.
상식적으로 저게 정말 들릴 거라 생각하는 건가?
대한민국 최대의 제작사라서 그런지, 작품의 대박 성적을 예감해서 그런지, 그도 아니면 촬영 일정이 예정보다 빨리 끝나 제작비가 많이 남아서 그런지.
우리는 쫑파티의 국룰인 삼겹살집이 아닌, 소고기 집에서 회식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한우!
작품 특성상 CG도 그렇고 후작업에 돈깨나 깨질 텐데, 이런 씀씀이라니.
걱정이 살짝 되긴 하는데, 뭐 알아서 잘하겠지.
난 쓸데없는 걱정을 떨쳐내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의 잔을 채웠다.
"...오늘만 이렇게 드시는 거겠죠?"
정수진 감독님이 내 귀에만 들리도록 소곤소곤 물었다.
아직 홍보 일정이 남아서 채희의 몸매 관리가 못내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저렇게 우악스럽게 먹는 걸 보면 어떻게 걱정을 안 해.
고깃집 사장님께서는 고봉밥을 싹싹 비우는 손주를 바라보는 것처럼 매우 흡족한 얼굴로 웃음꽃을 피우고 계셨지만, 이건 예외로 둬야지.
"지금까지 식단 관리를 너무 빡빡하게 해서 그 반작용으로 잠깐 저렇게 먹는 거예요. 이제 위도 줄어서 많이 먹지도 못 할걸요?"
"그렇겠죠...?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마세요."
사실 대외적 이미지 때문에 말만 이렇게 했을 뿐이지, 난 알고 있다.
운동을 아예 하지 않았을 때도 먹는 양만큼은 아주 많았다는 것을.
"저기요, 부적겉바속촉겉촉속촉기적빛 씨."
"...?"
저 괴상한 별명은 뭐지?
언제 이쪽으로 왔는지 술기운이 살짝 오른 박송이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한잔 하자고요."
그래도 다행이다.
낭중님이라는 별명은 몰라서.
다음 작품도 박송이와 함께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몇 작품을 함께 하며 조금 친해지긴 했나 보다.
저렇게 별명을 막 갖다 붙이며 불러도 헛웃음만 나오지,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익숙해진 건가.'
아무튼.
나도 잔을 들어 그녀의 잔에 맞부딪혔다.
"웁! 우부웁!"
그리고 볼이 터질듯이 부풀어진 채희도 잔을 들어 부딪혀왔다.
같이 먹자는 뜻이겠지.
한우집에 온 만큼 우리는 고기와 술을 원없이 먹었고.
1차가 끝날 즈음 무사히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 좀만 천천히 달려주세요. 너무 배불러서."
"그러게 작작 먹으라니까."
"얼마 먹지도 않았어요! 위가 줄어들어서 그렇지."
"그러니까 위가 줄어든 만큼 먹는 양도 줄여야 할 거 아니야. 너 바보야?"
"바보 아니거든요!?"
우리가 뒤에서 바보 같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로드 매니저는 묵묵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이제 이 친구도 이런 모습에 익숙해진 것 같다.
집앞에 도착한 뒤에, 난 매니저를 그대로 퇴근시켰다.
나도 이제 집에 들어가야 했는데, 로드 매니저에게 데려다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술도 먹었으니 택시 타고 가야지.
"아직 다 끝난 거 아냐. 홍보 일정 남았으니까 너무 폭식하지 마."
"...."
"...? 왜 대답이 없어."
어째 차 안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꼭....
난 눈을 가늘게 좁히며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네!? 뭐, 뭐가요? 선물이 뭐요! 줄 수도 있지! 마음에 안 들면 버리시든가요."
똥마렵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대뜸 선물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얼떨떨한 상태로 선물을 받아들었다.
시계. 그것도 꽤 고급스러운 느낌이 풍기는 가죽 시계였다.
그녀가 사는 층에 도달했을 때.
채희는 성큼성큼 빠르게 걷더니, 삑삑삑삑, 도어락 비밀번호를 재빨리 눌렀다.
그리고 눈을 끔뻑끔뻑 뜨며 바라보고 있는 내게 슬쩍 시선을 던지며, 마치 성질을 부리듯 말을 꺼냈다.
"축하해요. 평생 제 매니저 해주실 거잖아요. 드라마도 잘 끝났고... 지금까지 뭐, 해준 것도 없기도 하고...."
횡설수설하다가 말이 점차 느려진다. 그리고 이내 입을 꾹 다문다.
열린 문을 잡고 있던 그녀는 곧이어 픽,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저 방금 이상했죠?"
"어. 많이. 그리고 방금이 아니라 지금도 이상해. 갑자기 뭐야."
"그냥 뭐... 지금까지 고마웠다고요. 전 받은 것도 많고 목걸이도 선물 받았는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드린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뭘 선물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시계 샀어요. 밥 먹을 때나 운전할 때나 씻을 때도 계속 시계 신경 쓰면서 저 잊지 말라고요."
고맙다는 건지, 협박을 하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뭐라는 거야."
횡설수설하며 말을 내뱉던 게 이제서야 민망해졌나 보다.
웃음기 띤 얼굴이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어쨌든 아까 마음에 안 들면 버리라고 했던 말 취소. 그거 마음에 안 들어도 계속 차고 다니셔야 돼요. 저도 목걸이 계속 차고 있을 테니까."
"그래. 잘 찰게. 고마워."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채희도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만 들리는 아무도 없는 복도.
난 손에 들린 선물을 바라보며 소리 죽여 웃었다.
"준 게 없긴 왜 없어. 엄청 많이 받았는데."
비록 이렇게 물질적인 선물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확실히 난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받고 있었다.
예를 들면, 웃음이라든지, 일상의 행복이라든지, 아니면 일의 보람이라든지.
그 외에 그녀로부터 얻는 많은 감정들 또한 소중한 선물이라면 선물이었다.
< 준 게 없긴 왜 없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