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많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는 슈퍼스타 >
제작사 ‘워칭 필름'에서는 박한울이 수첩 3장으로 캐스팅 보드를 전해준 날로부터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과연 이 배우들이 대본의 캐릭터들과 확실히 매칭이 되는 지, 그 배우들이 현재 캐스팅이 가능한 상황인 지, 모두 다 정상적으로 캐스팅이 된다면 제작비는 얼마나 될 지 등등.
따질 것도 많았는데, 그 리스트에 적힌 배우들 말고도 다른 배우들 역시 캐스팅 보드에 넣어야만 했다.
얼마 전, 방송국에서 스카우트해온 드라마 거장, 장감독의 입김 때문에.
"이 배우들 가지곤 대박은 힘들 수도 있어요. 주연은 몰라도 조연들은 전부 다 특색이 뚜렷하지가 않으니까요. 요즘은 조연들도 톡톡 튀고 사랑받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대본에는 그게 잘 드러나 있는데 과연 이 배우들이 그렇게 잘 살릴지는 의문이 들어요."
담담하게 내뱉는 그의 말은 과연 일리가 있었다.
박한울의 안목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해의 시상식을 휩쓴 드라마를 세 편이나 만들어낸 장감독의 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
그리하여 제작사는 그와의 회의를 통해, 박한울이 추천한 배우들 외, 추가로 몇 명에게 더 오디션 제의를 넣었다.
어차피 결과는 오디션을 본 뒤에 드러날 테니, 추가로 오디션을 제의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전혀 없었으니까.
"감독님, 작가님, 이제 슬슬 시작할까요?"
이제 곧 배우들이 차례대로 들어와서 오디션을 볼 회의실.
길다란 테이블의 한 쪽에는 장감독과 김정연 대표, 그리고 조수연 작가가 나란히 앉아 있었고.
반대편에는 오디션을 볼 배우들이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제 박한울이 추천한 배우와, 회의를 통해 뽑은 배우가 차례로 들어올 터.
한 캐릭터의 연기를 연속으로 볼 수 있게 시간을 조정했기 때문에, 곧바로 배역을 결정지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네."
"네, 시작하시죠."
장감독은 배우가 들어와서 연기를 펼치기 전까지도, 여전히 자신의 생각이 맞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박한울이 못마땅해서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정말 순전히 배우들의 특색이 약간 모자라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진짜.... 하아, 돌겠네! 아니, 뭘 알려주고 시켜야 할 거 아냐, 상식적으로. 여기가 회사지, 무슨 군대야? 미치겠네, 진짜!"
박한울이 추천한 배우가 나간 뒤.
장감독은 작가와 대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뭘 놓친 건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잘 어울린다.
예상했던 대로 특색이 뚜렷하진 않은데, 오히려 그 때문에 더 현실감이 돋보인다.
정말로 어느 사무실에나 한 명쯤 있을 법하달까?
톡톡 튀는 조연들이 중간중간 배치되어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리지 않게끔 하는 것도 좋으나, 이러한 방향 역시 좋다.
대본의 캐릭터들이 매력이 있다 하여, 방금의 그 현실감 넘치는 연기가 매력이 없던 건 아니었으니까.
오피스물이란 걸 감안하면, 완전히 현실감 있는 방향으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음.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죠."
장감독의 심드렁한 반응에 작가와 김대표의 시선도 앞을 향했다.
그리고 두 번째 배우가 들어왔다.
제작진들과 장감독이 함께 한 회의를 통해 오디션 제의를 보낸 배우.
그 배우의 연기를 보니, 확실히 톡톡 튀면서도 오피스물에서 벗어나지 않을 만큼 현실감이 있었다.
"스읍.... 아직까진 모르겠네. 전 일단 둘 다 괜찮은 것 같은데.... 수연 작가님은 어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색깔이 조금 달라서."
둘의 시선은 또다시 장감독에게로 모였고.
장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배우들 보고 결정합시다. 둘 다 장단이 있으니 보류로 일단 보류로 두고요."
"그래요. 그게 낫겠어요. 다른 배우들이랑 잘 어울리는지도 봐야 하니까."
"네."
첫 번째 배역은 일단 보류.
20분 뒤, 예정된 시간에 맞춰 두 번째 배역을 맡을 배우가 들어왔다.
이번에도 먼저 들어온 건 박한울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배우.
"아이고.... 하아. 이걸 이렇게 하셨구나? 뭐... 됐어요. 잘했어요. 일 봐요. 쯧.... 이럴 거면... 어휴."
그의 연기가 모두 끝났을 때.
아니, 그의 연기가 시작되자마자 장감독은 이전 배역을 연기했던 두 배우 중에 한 명을 향해 마음이 기울었다.
아직 자신과 스탭들이 뽑은 배우의 연기를 보지 않았음에도, 슬그머니.
"...이렇게 둘은 묶는 걸로 하시죠."
프로필 서류에 있는 이미지 사진에 동그라미를 치며 보여줬는데.
김대표와 조수연 작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알겠습니다."
"네, 저도 찬성이요."
하나둘씩 오디션은 차차 진행됐고.
마침내 대망의 남자 주연까지 모든 배역의 연기를 다 봤을 때.
"허...."
장감독은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로 동그라미가 쳐진 프로필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새어나온 듯한 웃음소리가 귀에 꽂혀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작가와 대표가 입술을 꽉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장감독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다 알고 계셨군요."
"네? 뭘요?"
"이렇게 될 지."
김정연 대표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확신은 못했죠. 이젠 그냥 역시, 라는 말밖엔 안 나오긴 해도요."
장감독의 입에서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 프로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친구... 아니, 그분은 앉은 자리에서 정답을 볼 수 있는 모양입니다."
동그라미가 쳐진 프로필은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박한울 실장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배우들이었다.
그리고 그 프로필들엔 쉬이 알아볼 수 없는 필기체로 두세 문장씩 적혀 있었다.
모두 다 자신이 적은 문장들.
장감독은 프로필들을 따로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콘티가 떠올라서요. 바로 작업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가 추천한 배우들이 모두 출연하다고 생각하니.
대사와 행동, 장면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떻게 연출하고 어떤 식으로 디렉팅을 줘야 할 지 선명하다.
이 또한 시너지일 터.
박한울 실장은 아마 이를 고려했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
현지와 함께 행사를 갔다가 저녁까지 같이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어왔다.
여기서 또 스케줄이 있어서 오늘 퇴근은 늦을 예정이다.
이젠 뭐 새삼스럽지도 않지.
딱히 '야근'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다.
"음? 박실장, 기분 좋아 보이네. 행사에서 반응 좋았어?"
사무실에 들어가니 최팀장님 역시 다크서클을 눈 밑에 진하게 달고 앉아 있었다.
현지가 한창 바쁘게 활동 중이며, 채희도 이제 곧 촬영이 끝나기 때문에 벌써부터 제작사와 홍보 일정을 조율 중인 데다가, 이젠 하연 씨도 컴백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무지하게 바쁠 만하지.
그럼에도 항상 눈빛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게, 알게 모르게 나에게까지 그 정열이 전염되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선 윤본부장님이나 한팀장님 만큼의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는 없었으나, 일적으로는 조금 더 믿음직스럽달까?
지금까지 실수하거나 태만한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하연 씨와 나름 잘 맞춰왔던 거겠지. 나에겐 그런 적 없지만 하연 씨가 엄청 까탈스러운 타입이라지 않은가.
"별거 아니에요. 민정 씨 들어가는 드라마 있죠? 캐스팅 맡겨달래서 제가 배우들 좀 추천해줬었는데, 오늘 오디션 봤다더라고요. 다 만족스러웠대요."
"뭐? 그런 일이 있었어? 보수는 받았고?"
"아뇨. 이름만 넘겨준 건데요,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내심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던 거기도 해서요."
제작사와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탄 사이.
이름만 띡 적어서 주고 돈을 요구하기에도 민망했고, 드라마가 잘되면 우리도 좋은 일이다.
게다가 작가도 조수연 작가님 아닌가.
이런 데서 생색내는 것보단 멀리 바라보는 게 훨씬 더 큰 이득이 되겠지.
"음, 그래. 수고했어. 아! 그리고 그거 송하니 있는 걔네 연습생들도 같이 보기로 했는데, 괜찮아?"
"하연 씨랑 영상 찍는 거요? 그걸... 옆에서 본다고요? 왜요?"
좀 이따 그녀의 유튜브 채널에 올릴 영상을 둘이서 같이 찍기로 했다.
발매에 앞서, 앨범을 소개하는 식으로다가.
난 공동작곡가이기도 하고,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이름값도 올랐으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수락했던 거다.
그래서 내가 지금 퇴근도 못하고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사촌동생이라서 엄격하게 따지기에도 좀 그렇더라고. 그리고 영상에 잠깐 같이 출연하면 더 화제돼서 좋기도 할 거고, 애들도 미리 홍보할 수도 있잖아? 우리 팀은 아니겠지만 우리한테도 그리 나쁜 건 아니지. 어차피 사촌이라서 걔네 데뷔하면 나중에 많이 엮일 게 뻔하기도 하고."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더해, 하연 씨의 매니저인 정실장님과 최팀장님이 애원하듯이 부탁하는 바람에 찍기로 말했던 거지만.
'그 네 명이랑은 그렇게 안 친한데....'
그 병아리 같은 연습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부담스러웠다.
심사평이라면 몰라도, 그냥 예능과 다름없으니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려나 모르겠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사촌인데.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좀 부담스럽긴 해도 불편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그녀와는 미처 합의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실장님. 아무리 사촌이라도 그렇지, 그런 건 저한테 미리 말씀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미안하다."
"그리고 하니야. 네가 내 사촌이라도 넌 지금 연습생이야. 연습만 해도 모자랄 판인데, 인기 좀 얻으니까 이제 연습생 아닌 것 같아? 네가 실장님한테 이런 거 부탁할 입장은 아니잖아."
"어...? 어, 언니. 미안해. 그러니까 난 그냥...."
쭈구리가 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송하니와, 그녀의 옆에서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인 세 명의 연습생. 그리고 식은 땀을 흘리며 곤란해하고 있는 정실장님까지.
그들의 앞에는 오랜만에 보는 엄격한 송하연이 도끼눈을 뜨며 혼을 내고 있었다.
평소에 일처리가 확실했던 최팀장님도 이러한 경우는 처음이라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사촌인 데다가 서로 사이가 좋다는 것도 확인했으니, 그냥 괜찮겠거니 했겠지. 나름 서로에게 이득이기도 할 테고.
나 또한 이런 그림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그냥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원래 이런 건 끼어들면 손해밖에 안 보니까.
"...."
그런데 송하니의 시선이 이쪽에 닿아, 제발 어떻게 좀 해달라는 듯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내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송하니를 따라 한 명, 두 명, 시선이 이쪽으로 옮겨지더니, 송하연 또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실장님, 오셨어요?"
차갑고 엄했던 목소리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난 오디션을 통해 조금은 친해진 송하니와 다른 이들 모두 본 척도 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전 먼저 안에 들어가 있을게요."
"...!"
"...!"
"...!"
정실장님과 네 명의 병아리들의 충격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시야에 스쳤지만.
난 그대로 촬영이 진행될 연습실 안으로 쏙 들어가며 문을 꽈악 닫았다.
그런데, 연습실 문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열렸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싱그러운 미소를 띠며 혼자 들어오는 송하연.
그녀는 방금의 일에 대한 언급을 하지도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 촬영한다고 멋지게 하고 오신 거예요?"
"멋지긴요. 평소랑 똑같은데. 지금이라도 좀 꾸밀까요?"
이것도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텐데, 너무 가볍게 생각했나 싶기도 하다.
그녀 역시 캐쥬얼한 차림이기는 하나, 가벼운 메이크업도 되어 있고, 무엇보다 그냥 얼굴이 예뻐서 상관없겠지만, 난 아니니까.
연습실 전면 거울에 흐릿하게 비치는 나를 보며 머리를 살짝살짝 만졌다.
윗머리도 살짝 헝클고, 옆머리도 조금 내리고.
"잠깐만요."
그때, 내 손 말고 다른 손길이 머리에 올라가는 게 거울에 보였다.
"이쪽 봐봐요."
그녀의 말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코앞, 정면에 얼굴을 맞대며 아주 세심한 손길로 머리를 만져주는 송하연.
내 손은 그냥 가만히 내 다리 위에 얌전히 올려뒀다.
"...죄송해요. 방금 안 좋은 모습 보여드렸죠? 다시 생각해도 화나네.... 아무리 사촌이라도 저한테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벌써부터 이렇게 특별대우하면 긴장감도 떨어져서 애들한테 안 좋은 영향 끼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사람 많으면 영상 찍을 때 집중이 잘 안 되기도 하고-"
정말로 화가 나는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얼마나 화가 나면, 귓가와 볼이 다 빨개?
그런데 내 얼굴은 안 빨개졌으려나 모르겠다.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가만히 머리칼을 맡기고 있으려니 괜스레 민망한 느낌이 든다.
"음. 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네."
그녀가 손을 떼자마자, 난 곧장 정면의 거울을 바라봤다.
젠장, 내 얼굴도 빨개져 있다.
"일단 컨셉은 공동작곡가끼리 앨범 소개해주는 거예요. 저도 가수가 아닌 작곡가로서 말할 거예요."
"가수 송하연이랑 작곡가 송하연이 완전히 별개인 사람처럼 하는 거죠? 동명이인 컨셉으로."
"네네. 맞아요."
우린 서로 각자의 핸드폰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난 빨개진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메모장에 뭔가를 적어놨던 척하며 보고 있는 거지만.
아마 그녀의 메모장엔 이에 관한 내용들이 진짜로 적혀 있겠지.
'이거... 괜히 오해하진 않겠지?'
괜히 어색해지기 싫어 빨리 얼굴이 가라앉길 바랐다.
이성적인 호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건 생물체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매력적인 이성이 바로 코앞에서 머리를 만져주는데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잠시간 컨셉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가까스로 얼굴을 식힌 뒤에야.
나는 평소처럼 옅은 미소를 띠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빨리 식었네.
"그럼 이제 촬영 시작할까요?"
"네."
우리가 앉은 소파 앞에 세워진 작은 삼각대.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무려 한 시간 반을 웃고 떠든 뒤에야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둘이 찍는 게 정답이었다.
역시 송하연이 일에 있어선 정말 확실하다니까?
< 사람이 많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는 슈퍼스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