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중님과 지추 씨 >
‘BJ김만수’에서 그녀가 보여줬던 캐릭터는 인기 BJ.
무척이나 여유로운 베테랑에, 주관도 뚜렷하며, 기본적으로 선한 포지션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맡을 인물은 그 반대였다.
선한 포지션인 건 같았지만, 중소기업의 신입사원으로서 어리버리 타는 모습이 초반부터 많이 보여지고 있었다.
로맨스를 완전히 배제한 오피스 드라마 성장 스토리.
이미 몇 개의 성공 전례로 인해 완전히 대중적인 취향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이 장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드러났는데, 그건 바로 대본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연기력이었다.
우리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요소들.
‘조수연 작가님이랑 민정 씨 조합이면 끝났지, 뭐.’
장르의 특성상, 다른 드라마보다 조연들의 연기력 또한 굉장히 중요했는데.
이에 대해선 제작사 미팅에서 넌지시 한 번 물어봐야겠다.
그러나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조연의 캐스팅이 아니지.
바로 심민정, 그녀의 마음에 드는가의 여부.
아무리 내가 추천해준다고 한들 그녀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면, 난 미련없이 다른 작품을 골라줄 생각이다.
기본적인 케어가 받쳐준다는 전제 하에, 아티스트는 자신이 좋아하는 쪽으로,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걸어가야 가장 크게 꽃을 피울 수 있는 법이니까.
다른 매니저들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 한해, 지금까지 이 신념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엄청 빨리 오셨네요? 제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어요?”
언제나 그렇듯 밝은 기운을 뿜어내며 나를 반기는 그녀.
편한 반팔티 아래로 내가 선물해준 팔찌가 끼워져 있었다.
난 슬쩍 웃으며, 장단에 맞춰 너스레를 떨었다.
“보고 싶었죠. 그래서 이렇게 기회 되자마자 달려온 거고요.”
한동안 너무 안 찾아서 미안했거든.
이런 립서비스 정도는 해줘야지.
그녀는 날 식탁으로 이끌었고, 커피 머신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줬다.
“···저건 또 언제 사셨어요?”
“드라마 끝나고요. 카페에서 일했던 경력 이럴 때나 써먹는 거죠. 아, 라떼랑 스무디도 가능하니까 드시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아니면 그냥 종류별로 하나씩 드릴까요? 맛있는데.”
“괜찮아요. 이따 먹고 싶으면 말할게요.”
난 가볍게 웃으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전에 큐빅에서 나온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무작정 카페에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여전하네.’
그때도 맛있는 걸 계속해서 더 주려고 하더니,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기가 마실 것으로 카페라떼를 만들었고, 자리에 앉자마자 난 바로 대본을 식탁 위로 올려놨다.
“헐. 대본 보여준다고 하신 게 조수연 작가님 거였어요?”
“네. ‘BJ김민수’ 보고 민정 씨한테 꽂히셨다고 하네요.”
가제와 함께 제작사, 그리고 작가의 이름이 적힌 시놉시스의 표지를 보고 눈을 빛내는 그녀.
표지를 손으로 한 번 조심스럽게 쓸어보고는 날 지그시 쳐다봤다.
“이거 읽어보시고 가져오신 거죠?”
“당연하죠. 어울릴 것 같아서요. 대본도 좋고.”
그녀는 대본을 한 번, 그리고 나를 한 번.
번갈아 여러 번 시선을 옮기더니, 빙긋 웃으며 천천히 표지를 넘겼다.
시놉시스와 4회짜리의 대본.
나는 그녀가 읽는 동안 가만히 맞은편에 앉아 기다렸다.
어느새 몰입한 그녀의 얼굴은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벌써 캐릭터에 자신을 대입하는 모양인지, 입술이 대사에 맞춰 꿈틀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젓고 끄덕이는가 하면,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기도 했다.
그리고 사락, 4회 대본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을 때.
그녀는 신뢰와 욕심, 감사함이 뒤섞인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이런 걸 가져오시면 누가 싫어하겠어요. 진짜 꾹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네.”
“···참았어요?”
“네, 빨리 작품 들어가고 싶어서요. 그런데 졸라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실장님도 절 위해서 어련히 최선을 다하고 계셨을 텐데. 그래서 그냥 꾹 참고 기다렸어요.”
내가 대답 못하고 가만히 커피만 마시자, 그녀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덧붙였다.
“다행이에요. 다른 작품 들어갔으면 이거 못했을 거 아니에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왠지 내 마음을 헤아리는 듯한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제작사랑 미팅 잡을 테니까 오늘부터 바로 분석 들어가 볼까요?”
“네, 좋아요.”
난 바로 핸드폰을 들어올려 조수연 작가님께 전화를 걸었고.
또다시 제작사와, 그리고 최팀장님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내 앞에는 차례차례 스무디와 라떼가 놓이고, 접시에 예쁘게 담긴 과자까지 놓여졌다.
아직 커피도 다 안 마셨는데.
“···오늘 일찍 못 가겠네요.”
“그러라고 내온 거예요. 맛있게 드세요.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고요.”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말했다.
“통화 들었다시피 미팅은 내일이에요. 연기력이 이미 입증됐고 민정 씨한테 어울리게 캐릭터도 맞춘 거니까 다른 건 걱정하실 필요 없을 거예요. 그냥 편하게 가면 돼요.”
“알겠어요.”
그쪽은 민정 씨를 꼭 잡고 싶은 모양인지 미팅을 서둘렀다.
예전 ‘레이니데이’ 시절을 제외하곤 이제 조연으로 딱 한 작품밖에 안 찍었을 뿐인데.
어째 대우해주는 게 웬만한 주연급 저리가라다.
그것도 주연으로 캐스팅하면서.
“그럼 일단 대본 분석부터 시작할까요?”
“네!”
열의로 빛나는 눈빛.
선생님들이 이래서 모범생을 좋아했나 보다.
그 눈빛을 마주하면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절로 맺히니까.
***
심민정 측과 미팅을 하기 전, 핵심 제작진들과 회의를 하기 위해 제작사 ‘워칭필름’으로 향하는 길.
조수연 작가는 아주 오랜만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심민정의 캐스팅이 성공하고 내일 바로 미팅이 잡혔기에, 벌써부터 모든 게 다 탄탄대로인 것 같은 마음이었다.
아니, 일단 이번 작품도 박한울 실장의 인정을 받은 데에서 오는 기쁨이 먼저 들긴 했다.
‘그동안 불안했는데.’
박한울 실장에게 전화해서 심민정의 캐스팅 소식부터 물어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심민정 배우를 캐스팅할 거라는 말들이 끊임없이 들려왔으니까.
다들 이렇게 탐을 낼 만큼 심민정은 검증된 블루칩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막 한 작품의 조연을 한 것 치고는 인지도는 물론 연기력과 인기 모두 확실했으니까.
이렇게 많은 곳에서 달려드는데도 아직 그녀가 다른 작품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박한울 실장의 선에서 잘렸기 때문일 터.
걸음걸음마다 족족 대박을 터뜨리는 그의 눈은 어지간히도 까다롭다고 알려졌고.
이는 예능으로 나오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여지없이 증명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작품은 당일에 바로···!’
이게 지금 그녀를 들뜨게 하는 이유였다.
예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다른 것처럼, 그 또한 예전과는 위상이 많이 달라졌는데.
자신보다 더하면 덜했지 덜하진 않았다.
현재 시장에 있는 모든 일류 감독과 일류 작가들을 제치고 자신의 작품이 선택됐다는 것에, 조수연 작가는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열심히 작업한 보람이 있어.’
그렇게 운전을 하며 제작사에 도착한 그녀는 문득 이러한 불안감이 머리에 스쳤다.
‘이 작품은··· 조연들도 엄청 중요한데.’
기껏 공을 들여 쓰고, 불안감에 떨며 수정까지 했더니.
애꿎은 조연들이 퀄리티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자기 작품에 애정을 가지는 건 모든 작가들이 다 그렇다.
최선을 다해 부정적인 가능성들을 미연에 방지하곤 하지만, 완벽히 해결할 수는 없어 의외의 곳에서 종종 흠집이 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어쩔 수 없이 최선으로 내놓았던 대본을 수정한다든가 하겠지.
조수연 작가는 제작사를 올라가며 생각했다.
‘그런데··· 우린 완벽히 해결할 수 있잖아.’
적어도 캐스팅 면에 있어선 말이다.
그리고 현재 통계적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해결책은 없었다.
“작가님! 오셨어요?”
회의실로 들어가자,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띠며 반겨주는 김정연 대표.
그런 그녀에게 조수연 작가는 대뜸 말했다.
“우리 박한울 실장님한테 전적으로 캐스팅 일임하는 건 어때요?”
구선학 감독과 함께 했던 영화 ‘더 BAD’.
조수연 작가는 박한울 실장의 추천을 받은 배우들이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제작사에선 우리를 굉장히 반갑게 환영해주었다.
“‘BJ김만수’가 너무 잘나가서 저희 작품이 폭삭 망했었는데··· 이렇게 뭉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제작사 ‘워칭필름’의 회의실.
나와 민정 씨, 조수연 작가와 김정연 대표, 그 외 몇 명의 직원들이 함께 자리한 그곳에서.
김정연 대표는 나를 마치 애증하는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막 따갑기도 한데 애틋하기도 하다.
전엔 적군이었는데 이제 아군이 돼서 그런 것 같다.
“이젠 모르죠. 저희 때문에 다른 쪽이 망할지.”
난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죄송하다고 할 순 없잖은가.
내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해서 성공을 거둔 것뿐이었으니.
그녀도 이제는 개의치 않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장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조수연 작가와 눈을 맞추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김정연 대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내 눈을 바라봤다.
“혹시 가능하다면 정식으로 저희 캐스팅 전부 담당해주실 수 있을까요?”
“···예?”
“그 안목, 저희가 빌려 쓰고 싶습니다. 이번 작품에 실장님께서 많이 관여하실수록 저희 작품도 더 잘될 테니까요. 조수연 작가님이랑 저번에 하신 ‘더 BAD’도 실장님께서 배우들을 추천해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작품도 꼭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번엔 정말 잘되고 싶거든요, 저희 작품.”
난 의외의 부탁에 눈을 깜빡거렸다.
어째 점점 더 매니저 본연의 직무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사실 지금까지의 작품들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배우들이 한 명씩은 꼭 있었거든.
선을 넘는 참견이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곧 그들의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난 책상 위에 올려둔 펜을 들고 수첩에 곧장 적기 시작했다.
“···!”
“···어?”
‘더 BAD’ 또한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께 잠시 기다려달라 말한 다음, 방에 들어가서 배우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 종이를 찢어서 드렸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다를 것 하나 없었다.
난 이미 시놉시스와 대본을 봤으니까.
“···설마.”
모두의 눈이 찢어져라 크게 뜨이고, 입이 벌어져 있었다.
당황스러워하기도 하고, 놀라워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장난을 치냐는 듯 미간을 팍 찌푸리고 있기도 했다.
난 그 갖가지 반응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마저 펜을 움직였다.
배우의 이름과, 그 배우가 맡을 캐릭터의 이름.
“다 됐습니다.”
작은 종이 세 장.
찢어서 곧바로 대표에게 건네자, 대표와 작가, 직원들의 시선이 그 종이 위에 박혔다.
“···얜 누구지? 아는 사람 없어? 그럼 빨리 찾아봐.”
“네!”
잘 모르는 배우는 바로 찾아보고, 아는 배우는 머릿속으로 캐릭터와 배우를 짜맞추는 모습들.
회의는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
생각지도 못한 부탁 때문에 회의가 길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자정이 되기 전에 끝날 수 있었다.
심민정의 집 앞.
난 정차를 하고는 말했다.
“잘 들어가요. 오늘 수고했어요.”
들어가라는 인사를 했는데, 그녀는 차에서 내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웃는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낭중님.”
“···.”
한동안 이 호칭을 듣지 못했는데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간만이라 아주 약간은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반갑지 않은 마음이 좀 더 컸다.
그녀가 ‘낭중님’이라고 부르면, 난 ‘지추 씨’라고 부르기로 했으니까.
“불렀는데 왜 말이 없으세요? 낭중님!”
“···네, 지추 씨.”
둘이 붙어 낭중지추.
갑자기 이 호칭을 꺼낸 이유는 필시 아까 보인 모습 때문일 터.
길었던 회의 끝에, 거기 있던 모두가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으니까.
아직 확정은 아니었으나, 반응으로 보건대 그대로 확정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하나같이 되게 만족스러운 표정들이었거든.
심민정은 내 곤혹스러운 표정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조수석의 문을 열고 내리며 물었다.
“우리 대본 연습은 또 언제 해요? 분석도 몇 번 더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시간 날 때마다 찾아올게요.”
“네, 알겠어요. 그리고 오늘 멋졌어요. 역시 낭중님!”
그녀는 엄지를 척, 치켜세우더니 몸을 돌려 천천히 멀어졌다.
하여간, 내 별명이 도대체 몇 개야?
< 낭중님과 지추 씨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