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16화 (116/170)

< 심민정 배우 작품 아직 안 들어갔죠? >

시청률과 화제성을 동시에 잡고 훨훨 날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아이돌'.

송하니는 피곤에 전 채로 싱글벙글하고 웃고 있는 작가와 피디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젠 익숙해졌지만 새삼 이렇게 보면 참 괴상하다, 싶기도 했다.

'...제일 괴상한 건 따로 있지만.'

최준성.

누가 뭐래도 괴상한 사람의 최고봉은 그 사람이었다.

어제는 심지어 자기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면서 천천히 산책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마인드 컨트롤이라나 뭐라나....

태교 음악을 들으랬더니 아예 거기서 몇 발자국을 더 가버린다.

송하니는 얼른 고개를 털어내며 머릿속 이미지를 지워냈다.

정신건강에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서.

"하니 씨, 바로 시작해도 되죠?"

"아, 네!"

지금껏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진행한 중간 인터뷰.

그러나 방송에는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쯤 되니 이제 송하니도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데 편해질 수 있었다.

작가는 복덩이를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 탑텐에 드셨어요. 소감이 어떠세요."

탑10.

사실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저 중에서 상위 4명은 정해져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HJ엔터와 계약한 자신, YU엔터와 계약한 최준성, 그리고 다른 회사에서 계속 컨택을 시도하는데도 계약하지 않고 HJ, YU, 아니면 홈엔터에 들어가길 바라는 두 명의 참가자.

이 구도에 시청자들의 관심이 크게 불타오르고 있었기에, 작가가 자신을 저렇게 복덩이처럼 바라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소감이라면... 너무 좋죠. 이 프로그램으로 인생이 바뀌었잖아요. 그리고 하연 언니가 말했었는데, 원래 굴곡이라는 게 있는 법이래요. 그래서 지금 사랑받을 때 더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진심 어린 겸손과 감사가 느껴지는 말.

사실 송하니가 사랑받는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가장 신경 쓰이는 참가자는 누구예요?"

가장 막강한 경쟁자라고 하면 기획사와 계약하지 않은 참가자 중 한 명을 꼽았을 테지만.

그냥 가장 신경 쓰이는 참가자라면 역시 그 사람 말고는 없지.

"준성 오빠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스탭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송하니는 눈썹을 모으며 최근에 친해진 최준성을 언급했다.

"그 오빠 진짜 이상해요.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 봤을 때가 더 정상인 같이 느껴진다니까요? 맨날 막 자애롭게 웃고, 말투도 엄청 느끼해졌어요. 아니, 겉멋을 좀 벗으라니까 겉멋 벗은 대신 어떻게 더 두꺼운 걸 입은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둘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이미 방송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에 괜찮았다.

덕분에 웃긴 그림도 많이 뽑아낼 수 있었고.

작가와 피디는 귀여운 송하니의 반응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뭐래도 시청률과 화제성을 견인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으니, 뭘 해도 이뻐 보였다.

"오디션에 참가하는 중에 가장 도움이 된 건 뭐였어요?"

이건 명백했다.

답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질문.

"박한울 실장님이 해주시는 피드백이요."

HJ엔터인 송하니뿐만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 모두.

심지어 지금은 탈락한 참가자들까지 다 박한울의 피드백을 받고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 성장이 비약적이냐 아니냐에 따라 탈락과 합격이 갈렸지만.

그말인즉슨, 지금 남아있는 10명의 참가자들은 모두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다는 것인데.

네티즌들은 이를 두고, '박한울의 기적'이라 농담 삼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당사자가 느끼기엔 정말 농담처럼 말할 것이 아니었다.

"검증된 레일이 앞에 깔린 느낌이에요. 누가 멱살 잡고 옳은 길로 이끌어가는 느낌? 너무 마음이 든든해요."

***

"어? 연예인이다."

"...하지 마라."

채희가 날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하이라이트 액션 씬 촬영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이럴 거면 그냥 촬영장에 오지 말 걸 그랬나?

"어머! 박한울 실장님 아니세요? 저 완전 팬이에요!"

"야, 하지 말라고."

만날 때마다, 그리고 연락할 때마다 방송에 대해서 얘기를 하니, 정말 재밌게 보고 있긴 한 것 같았다.

촬영 때문에 본방을 시청하지 못할 때도 다시보기로 무조건 본다고 하고.

난 한숨을 내쉬며 옆에서 장난 치는 채희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리고 스탭들을 한 명 한 명씩 찾아갔다.

현장에 자주 오지를 못하니 이렇게 기회가 될 때마다 인사 좀 나눠야지.

"감독님, 잘 계셨어요?"

"죽지 못해 살지. 그래도 내가 채희 덕분에 촬영장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애가 착하고 밝잖아."

내가 무시하든 말든,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던 채희가 껴들었다.

"그쵸, 감독님! 근데 이 오빠는 완전 저 무시한다니까요? 이거 봐요. 그거 조금 놀렸다고 이렇게 삐져서는."

"삐지긴 누가 삐져. 그리고 그게 조금 놀리는 거냐? 요새 볼 때마다 놀리면서."

"놀리는 걸로 따지면 지금까지 오빠가 훨씬 더 많이 놀렸거든요? 솔직히 양심 있으면 이건 인정해야 된다, 진짜."

딱히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친해지기 전에도 놀리곤 했으니.

난 작게 헛기침을 하곤 계속 인사를 돌았고.

핸드폰을 보고 있던 박송이 앞에까지 섰다.

"송이 씨."

핸드폰을 보고 있던 박송이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아, 기적 씨. 오셨어요?"

"...네?"

씨익 웃으며 보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올리는 그녀.

화면에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최준성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크흑...! 이렇게 못난...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박한울 실장님... 흐윽. 흐응! 실장님은 제 기적... 크흡... 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거 일부러 내가 자기 앞에 올 때까지 모른 척 기다렸다가 튼 게 분명하다.

하여간에 정채희나 박송이나.

왜 날 못 놀려서 그렇게 안달이지?

아니, 이건 사실 최준성을 놀리는 거기 한데, 그래도 괘씸하다.

"송이 씨는 오늘 특히나 더 예쁘시네요. 분장이 딱 송이 씨한테 너무 잘 어울려요."

웃음기를 띠며 건네는 말에 그녀의 얼굴이 팍 찡그려졌다.

오늘 찍을 씬은 굉장히 중요하고도 임팩트가 강한 액션 씬.

바로 박송이가 붙잡혀서 채희가 구하러 가는 씬이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지금 박송이의 모습은 추레하기 짝이 없는 상태.

그녀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두고 봐요. 굴욕 짤 나오면 SNS에 확 올려버릴라니까."

난 하나도 무섭지 않은 말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이제 곧 촬영을 시작할 모양인지, 스탭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채희야, 이거 NG 여러 번 내도 되는 거 알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될 만한 장면이기에, 예정된 액션은 당연히 거칠었다.

대역을 써도 되긴 하나, 그럴 경우 이 장면의 임팩트가 죽어버린다는 걸 나도 알고 채희도 알아서 열심히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시 안전이 제일.

"전에도 말했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딱 70%만 보여줄 생각해. 한번에 오케이 받을 생각하지 말고."

방금 전까지 우리가 장난을 쳤다고는 하나, 촬영이 다가왔기에 분위기를 바꿔줄 필요가 있었다.

박송이도 지금 감정을 잡기 위해 조금씩 집중하고 있었고, 스탭들도 모두 서서히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진지해져야지.

채희는 싱긋 웃으면서 한쪽에 있는 액션감독님을 가리켰다.

"걱정 마요. 저 감독님한테 엄청 굴려졌어요."

"원래 자신감 넘칠 때가 제일 조심해야 할 때야. 운전도 초보 운전자들보다 경력 조금 있는 운전자들이 더 크게 사고 나는 것처럼."

"알았어요. 오빠 말 잊은 적 없어요. 그리고 오늘은 부적도 왔잖아요. 그러니까 집중도 더 잘 될 거예요."

"공포증 없앤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부적 타령이야."

피식 웃으며 답하자 채희가 실실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긴장감 없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녀는 연기로 실망시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막상 촬영을 시작하면 그 누구보다도 더 뛰어난 집중력을 보여줬으니까.

다만 액션을 너무 잘하려는 욕심에 다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준비할게요!"

마지막으로 합을 다시 점검하기 위한 액션감독님의 호출.

"저 갔다 올게요!"

채희는 쫙 펼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촬영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본 촬영이 시작됐을 때.

난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띠울 수 있었다.

'분위기로 다 씹어먹는구만.'

정말 일류 액션배우 같이 생동감과 파이팅 넘치는 액션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연기, 그리고 장면만을 놓고 따지자면.

그녀는 그 누구보다 '배우'에 가장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시청자들이 보게 될 것은 스포츠가 아닌, 캐릭터와 스토리, 그리고 장면이 어우러진 드라마니까.

"커어어엇! 좋았어요! 모니터링할게요!"

시원시원한 정수진 감독님의 컷 사인에 박수가 터져 나왔고.

채희는 싱글벙글한 얼굴과 의기양양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저 잘했죠?"

"...한번에 오케이 안 받아내도 된다니까."

"그렇다고 일부러 NG를 낼 순 없잖아요. 그리고 아직 오케이 아니거든요?"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찍은 장면을 모니터링해봐야 하니까.

뭐, 스탭들의 실수가 없었면 안 봐도 오케이일 게 뻔하긴 했지만.

***

채희의 드라마,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는 모든 촬영이 다 끝난 뒤에야 넷플릭스에서 방영을 시작한다.

편집을 하지 않고 촬영만 우선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얼마 있지 않아 촬영 일정이 모두 끝날 터.

이렇게 순조롭게 풀리는 와중에도, 아니 이렇게 채희의 일정이 순조롭게 풀릴수록.

마음 한편에선 다른 한쪽이 더욱 신경 쓰였다.

심민정.

그녀는 이후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긴 하나, 채희가 작품을 찍었던 속도와 비교해보자면 느린 것도 사실.

그러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도 했다.

"뭐 이리 괜찮은 게 안 나오냐."

나름 괜찮은 것, 별로인 것, 너무 별로인 것, 애매한 것들만 많지, 대박 작품은 도통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대박 작품이 그동안 꾸준히 나왔던 건 운이 좋았던 덕분이지, 여기저기 널려 있으면 그게 어디 대박이라고 할 수 있겠나.

난 바쁘고 답답한 와중에도 드라마 대본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뒤적거렸지만 딱히 괜찮은 작품은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이번에만 살짝 눈을 낮춰볼까?'

진지하게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 액정에 오랜만에 보는 그 반가운 이름이 뜬 것은.

"네, 여보세요? 조수연 작가님! 잘 지내셨죠?"

그녀가 내게 전화한 이유가 뭐겠는가.

안부? 그럴 수도 있지만 이제 슬슬 그녀도 작업물을 낼 때가 되었다.

<더 BAD>의 시나리오가 나온 이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니까.

'아무래도 채희를 바라겠지만... 혹시 모르지. 민정 씨한테 어울리는 역할이 있을지도.'

조수연 작가라면 일단 작품은 대박일 가능성이 높으니,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그런데 이런 내 기대가 목소리로 전해졌는지.

핸드폰 너머에서도 기분 좋은 웃음 소리가 흘렀다.

-하하. 아뇨, 잘 못 지냈어요. 심장 떨려가지고요.

"네?"

-혹시... 심민정 배우 작품 아직 안 들어갔죠?

"...민정..씨요?"

그녀는 놀라고 있는 내게 긴 이야기를 해주었다.

채희를 바라고 대본을 썼는데, 그만 다른 작품에 들어가는 바람에 좌절됐다는 것, 그런데 'BJ김만수'를 보고 민정 씨에게 반해 캐릭터를 수정했다는 것까지.

사실 만나서 얘기를 나눠도 모자란 얘기들이지만, 채희의 예로 불안해져서 대본이 완성되자마자 전화를 걸었단다.

난 속으로 기쁨의 어퍼컷을 몇 번이나 날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대본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

나는 급하지 않게 천천히 대본을 읽고는 곧바로 심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민정 씨. 집에 있죠? 지금 바로 가도 될까요?"

이때, 난 이미 채비를 갖추고 사무실 밖을 나가고 있었다.

아주 경쾌한 발소리를 내면서.

< 심민정 배우 작품 아직 안 들어갔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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