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대로 배신감 느끼지 말자 >
이제 얼마 뒤면 ‘스타 아이돌’의 촬영이 시작된다.
기사와 커뮤니티 등 화제성에서는 이미 장찬수의 데뷔와 홍보 시기가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가 일어났었고.
덕분에 1차 예선 지원 마감 전 마지막 3일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원해서 방송국에서는 매일 야근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한울아, 거기서 괜찮은 애 있으면 김대표한테 양보하지 말고 건져와. 알았지?”
옥상 벤치에 앉은 윤본부장님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는데, 그런 윤본부장님께 한팀장님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얘가 형보다 일 잘하니까 잔소리하고 싶으면 다른 놈 잡고 해.”
“···한팀장아, 나 이제 본부장이야. 이제 실장이랑 팀장 같은 고만고만한 관계가 아니라니까?”
“아이고. 팀장일 때도 권위 엄청 따지셨으면서 무슨.”
“야! 그건 아니지! 내가 권위 따졌으면, 어? 너 지금 나한테 이러지도 못 해! 내가 얼마나 젊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인데!”
어째 회사인데도 회사 같은 느낌이 안 난다.
동네 형들, 혹은 선배들이랑 노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 이 사람들이 편하게 해준 덕분이겠지.
여전히 3팀을 맡고 계시는 한팀장님과, 3팀과 4팀이 있는 2본부를 맡고 계시는 윤본부장님.
사회생활의 시작을 이들과 함께 하며 좋은 추억을 쌓았기 때문인지, 어느새 나 또한 이들에게 여타 다른 상사와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저들의 관계처럼.
“야, 한울아. 네가 좀 말해봐. 내가 언제 권위적이었냐? 어?”
난 억울해하는 윤본부장님의 물음에,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한팀장님은 잘했다는 듯 몰래 엄지를 척 들어올려주었다.
“와, 미치겠네!”
“한울이도 아는데 무슨···. 원래 가해자는 기억 안 나는 겁니다, 본부장님.”
장난치듯이 말한 한팀장님은 표정을 바꾸고는 내게 물었다.
“거기에 신호석 대표도 같이 나간다며. 그 사람은 조심해. 겉으론 허술해 보여도 속에 구렁이 백 마리는 키운다더라.”
신호석 대표.
YU엔터의 다음을 잇는 대형 기획사, '홈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로서, 보이그룹 명가로 이름 높은 회사였다.
보이그룹뿐만 아니라 걸그룹, 솔로, 배우와 예능인을 모두 다루긴 하지만, 주력은 역시 보이그룹.
그 때문에 지금까지는 나와 크게 관계될 게 없긴 했는데, 같은 프로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게 됐으니 이제는 얘기가 다르지.
보이그룹들만 크게 성공했을 뿐이지, 꾸준히 걸그룹을 내기도 했고.
'그런데 구렁이 백 마리라.'
“음. 미팅으로 뵀을 때는 되게 괜찮아 보이셨는데.”
김대훈 대표님과도 약간은 친해 보였고.
“사람이야 괜찮다는데, 인재 욕심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종종 있어. 네가 눈독 들이는 사람 있으면 어떻게든 중간에 채가려고 할걸? 너라서 웬만하면 뺏기지는 않겠지만.”
“어떻게요?”
나는 윤본부장님과 한팀장님이 해주시는 얘기들을 들었다.
그런데.
‘겨우 그 정도야 뭐.’
선을 넘는다고는 하나, 업계에서만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는 정도.
예를 들면, 다른 회사와 계약 얘기가 잘 되고 있는 상황에서 뒤로 몰래 덜컥 계약해버린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보이그룹을 원하는 참가자들이야 나 말고 홈 엔터를 선택할 수도 있으나, 그 외의 모두는 나를 선택할 확률이 높을 거다.
설령, 그쪽에서 어떤 조건을 내민다고 해도 말이지.
“그러니까 괜찮다 싶으면 낚아채버려. 뜸 들이다간 뺏길 수도 있으니까.”
“네, 알겠어요.”
웬만한 경우에선 참 도움이 되는 조언일 것이다.
다만, 나는 마음에 들면 뜸을 들이거나 망설이는 타입은 아니란 말이지.
그걸 아직도 모르시나?
“하연이처럼 하지 말란 소리야. 막말로 걔 자존심이 더 셌으면 지금 같은 관계가 됐겠어?”
“아···.”
송하연이면 인정이지···.
할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담당이 아니기도 하고, 내가 뭘 하자고 먼저 제안한 적도 없으니.
나는 그들이 건네주는 조언을 새겨들었다.
망설이지 말자.
뺏길 수도 있으니 항상 조심하자.
***
나는 그들과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연습실로 향했다.
현지가 안무를 완성했다고 해서 봐주기로 했거든.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꽤 시간이 남았다만, 좀 일찍 가도 그리 상관은 없을 것 같아 이렇게 먼저 내려왔다.
그런데.
“엇! 실장님,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복도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크게 인사하는 아이들.
회사에서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연습생들, 성윤지, 강해정, 이효진이었다.
이효진은 내가 YU엔터에서 갑작스레 데려왔기 때문에 저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살짝 걱정했지만 기우인 것 같다.
저들과 꼭 붙어 있는 게 굉장히 친밀해 보인다.
난 뿌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주 인사해주었다.
“네, 안녕하세요.”
다들 연습생들에겐 반말을 하곤 했으나, 나는 아직까지도 그렇게 하진 못 하겠다.
처음 친해진 연습생이 현지여서 그런가.
처음 봤을 때부터 만만했던 채희한테도 말투나마 존대를 해주기도 했으니.
앞으로 오디션에서도 그럴 생각이다.
이게 편한데 굳이 억지로 고칠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이렇게 존댓말을 꼬박꼬박 하는 내가 어려운 건지.
그녀들은 쭈뼛쭈뼛,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내 물음에 성윤지가 한 발 앞으로 나와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안 바쁘시면 혹시 저희 연습 잠깐 봐주시면 안 돼요?”
긴장한 그녀들의 얼굴.
그러나 눈빛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열정.
난 다른 건 몰라도 저렇게 순수한 열정만은 그냥 못 지나치겠더라.
이런 것에 약한 모양이다.
“그럼 잠깐 볼까요?”
귀여운 얼굴들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도요!”
뒤를 돌아보니 손을 번쩍 들며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의 주변에 모여 입을 꾹 다물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5명까지.
김현준, 이건호, 정현진, 이동진, 신재준, 박선후.
이들 또한 내가 묶어준 연습생들이었다.
‘···시간이 되려나···.’
시간을 확인해봤다.
그래도 40분 정도는 남았으니 그리 모자라지는 않을 것 같다.
현지한테는 딱 약속 시간에 맞춰서 가야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여자 연습생 셋, 남자 연습생 여섯 명과 함께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
연습생들에게 있어 가장 큰 경계 대상은 바로 자신의 데뷔에 지장을 주는 사람.
두 그룹 모두 데뷔가 반쯤 확정이나 다름없었으나, 아직 그룹 간에 데뷔 순서가 정해지지 않았다.
데뷔가 밀리게 되면 또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반쯤 확정된 데뷔 멤버에서 떨어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무조건 일찍 데뷔하는 것이 최고.
즉, 지금의 성윤지에게 있어 저 남자 연습생들은 데뷔의 순서를 다투는 가장 큰 경쟁 상대들이었다.
“우리 절대 지면 안 돼요.”
동갑인 강해정과 언니인 이효진.
모두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저 눈앞에 실장님이 나타나서 기회를 엿본 것뿐인데.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에 돌입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건 저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
눈빛을 활활 불태우며 아예 “파이팅!”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까지 하고 있다.
“윤지야! 우, 우리도 할까?”
이효진의 제안에 그녀들 또한 큰 소리로 외쳤다.
“파이티이잉!”
회사의 절대적인 실세를 넘어, 아예 연예계 전체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이고 있는 박한울 실장님.
그에게 잘 보이는 게 곧 데뷔로 가는 길이자, 스타가 되는 길이었다.
“누구부터 보여줄래요?”
옅은 미소를 띠며 묻는 그의 물음에, 성윤지는 남자 연습생들보다 한 발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가 먼저 할게요!”
하지만.
남자 연습생들이고 여자 연습생들이고.
모두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있었다.
그들이 경쟁해야 할 상대는 서로가 아니었다.
바로 스스로의 실력.
호기롭게 먼저 나선 여자 연습생들과, 그녀들에 이은 남자 연습생들.
모두의 퍼포먼스가 끝나고.
박한울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말했다.
“···이 정도밖에 안 됐나···.”
숨 쉬는 것조차 힘든 딱딱한 공기.
그리고 그보다 더 딱딱해진 연습생들의 표정.
박한울 실장은 실망한 기색조차 없이, 화도 내지 않고, 심지어는 한숨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부정적인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발전이 느리네요? 열심히 하고는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화를 내는 선생님들이 나았구나.
대놓고 실망한 티를 내는 게 훨씬 나았구나.
연습생들은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고 그렇게 경직된 자세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래도 두 그룹 다 합은 좋아졌어요. 생각했던 속도만큼 발전했고. 그런데 당분간은 그룹 연습보다는 개인 연습에 좀 치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가 한 그룹으로 묶어서 너무 그룹으로만 연습하셨나 봐요.”
너무 그룹으로만 연습했는데도, 합은 딱 생각했던 것만큼밖에 좋아지지 않았고.
개인의 발전은 느리다고 말한다.
“그래도 확실히 잘하고는 있어요. 제가 기준점을 좀 높게 잡아서 그런 거지, 절대 여러분들이 못한 게 아니니까 실망하지 마요. 알았죠? 그러니까 얼굴 펴요. 충분히 잘했어요.”
연습생들은 그가 내뱉는 말이 단 하나도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미 상상으로는 그에게 수백 번도 더 칭찬을 받았었다.
정말 너무 좋다며 감탄하고, 씨익 웃으며 자기가 담당하겠단 말을 듣는 걸 시도 때도 없이 상상하곤 했다.
그중에서 이런 그림은 없었지.
“그럼 이제 개별적으로 말해줄게요.”
반성과 자극만이 된 건 아니었다.
그의 조언은 정말 단 한마디도 버릴 게 없었으니까.
‘그래···. 이제부터라도 더 열심히 하면 돼.’
조언을 다 끝내며 환한 미소를 짓는 박한울 실장님.
성윤지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아직 우리에게 실망하지는 않았다고.
우리를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거라고.
유현지와 정채희, 심민정 같은 선배님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
그분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실장님께 훈련받았던 건 이미 다들 알고 있는 것 아닌가.
***
현지와 약속 시간에 맞춰, 연습생들과 함께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우연인지, 문을 여니 복도 끝 화장실에서 나오는 유현지를 볼 수 있었다.
“오빠?”
그녀의 시선이 내 뒤를 향했고, 연습생들은 그녀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연습하는 거 좀 봐줬어. 이제 들어가자.”
연습생들에게 손을 흔들며 현지에게 말했는데.
자극을 참 많이도 받은 모양인지, 남자 연습생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우물쭈물 물어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선배님 하는 거 좀 구경해도 되는지··· 여쭙고··· 싶은데···.”
안 될 건 없다.
어디서 유출하는 것도 아니고, 현지가 하는 걸 보면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
난 현지에게 시선을 옮겼고, 그녀는 싱긋 웃으며 오히려 내게 물어왔다.
“오빠, 그렇게 해도 돼요?”
“안 될 거 없지.”
어쩌다 보니 단체로 보게 되었다.
우리는 현지가 있던 연습실로 함께 들어갔고.
현지는 이미 몸을 다 풀었는지 바로 말했다.
“지금 바로 할게요?”
“그래.”
아주 조금도 방해가 되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조용히 눈을 불태우는 연습생들.
현지는 그들을 한 번 일별하고는 연습실 중앙에 자세를 잡고 섰다.
‘···기대되네.’
그녀가 자세를 잡으니, 이미 내 머릿속에서 연습생들은 깨끗하게 잊혀졌다.
곡이 곡이다 보니 데뷔곡이나 후속곡처럼 화려하고 복잡한 안무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가 됐다.
저기에 서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유현지니까.
나는 음악을 틀었고, 스피커로 선공개 곡이 흘러나왔다.
소중한 일상에서 느껴지는 기분을 말하는 노래.
반주가 시작되는 순간, 그녀의 몸은 살랑살랑 움직여졌다.
러블리하고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내가 강조했던 그녀의 강점과 매력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안구정화가 되는 것 같았다.
몸이 사르르 녹는 느낌.
곡과 아티스트, 안무, 보컬, 모두가 하나의 색깔로 어우러져 영롱한 빛을 띠는 것 같았다.
아름답게 세공된 보석을 보는 것처럼.
아까 전에 본 연습생들의 퍼포먼스가 특별히 모나진 않았으나, 역시 정상급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는 궤를 달리했다.
안무가 마지막 피스였을 뿐, 나머지 요소 또한 그녀에 딱 맞춰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앨범 발매에 앞서 선공개로 공개할 곡과, 앨범의 타이틀 곡.
연이어서 펼쳐진 두 번의 퍼포먼스가 모두 끝나고.
나는 거울로도 보이는 헤벌쭉한 얼굴을 가다듬지도 못한 채, 실실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너무 좋았어, 현지야. 완벽해. 더 이상 손댈 데가 안 보이는 것 같아. 정말 최고였어.”
“그래요? 다행이다. 정말 그만큼 좋았어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묻는 그녀에게, 나는 큰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너어무 좋아. 첫사랑 같이 산뜻하고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이야. 아마 팬들도 나처럼 헤벌쭉해서 보실걸?”
그렇게 세계제일의 팔불출처럼 흐뭇하게 말하고 있는 도중, 현지의 시선이 갑자기 한쪽으로 향했는데.
그녀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음?’
나 또한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
“···.”
“···.”
입이 떡 벌어진 채,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연습생들.
...어쩐지 눈빛들이 굉장히 슬퍼 보였다.
“윤지야···. 나··· 나···!”
“해정아, 실장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셔. 우리가 잘 못해서 그런 걸 어떡해. 실장님 반응이 아주, 너무, 심하게 차이 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우리 절대로 배신감 느끼지 말자.”
속닥거리는 말이 귓가에 천둥처럼 들려온다.
이거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아니겠지?
아마도···?
< 절대로 배신감 느끼지 말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