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프로 정도만 한다고 생각해 >
넷플릭스에 독점적으로 공개될 드라마,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의 첫 촬영이 내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나는 다른 일들을 모두 제쳐두고 채희에게로 붙었다.
이미 그녀의 연기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지만 그래도 매니저 된 입장에서 마지막 점검은 도와줘야지.
이제 우리집만큼이나 편안한 채희의 집.
우리는 대본을 손에 들기만 하고 늘어지게 누워 있었다.
채희는 소파 위에서, 나는 그 아래에서.
“대본 연습 안 할 거야?”
“잠깐만 쉬고 해요. 저 지금 힘이 하나도 없어요.”
목소리만 들어봐도 힘이 없어 보이긴 했다.
운동과 식단 조절, 그리고 연습을 병행하고 있기 때문일 터.
이제 그녀의 몸에서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서 분장까지 하면 정말 베테랑 싸움꾼처럼 보일 것 같다.
“그럼··· 그냥 내일 촬영장 가서 잠깐 맞춰볼까?”
사실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것뿐이지, 이미 리딩이나 연습을 통해 그녀의 연기를 여러 번이나 확인해서 걱정은 없었다.
차라리 이럴 때는 쉬게 놔두는 게 내일의 촬영을 위해서도 더 나을 터.
난 몸을 슬쩍 일으켜 소파 위에 누워있는 그녀를 보며 물었고.
그녀는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봤다.
“가시려구요?”
“응. 그냥 푹 쉬어.”
“그냥 보내기엔 좀 아쉬운데··· 음. 그럼 먹방 보여주실래요?”
“또?”
“네.”
그녀는 킥킥거리며 작게 웃었고,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오늘은 뭐 먹이려고.”
“제 요리요.”
“···그냥 배달을 시키자.”
“제 요리 못 믿어요?”
“응. 전혀 못 믿겠는데? 전에 김치찌개 해준다면서 김치국 만든 건 기억에서 아예 지워졌나 봐?”
“맛있게 먹었으면 됐죠!”
나는 그녀가 요리해준다는 걸 극구 거부하며 집을 빠져나왔다.
솔직히 요리도 요리지만, 그녀의 체력과 컨디션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내가 다 먹는 시간까지 하면 또 많은 시간이 소요될 거고, 그럼 그만큼 그녀가 푹 쉴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게 될 테니.
“푹 쉬는 게 우선이지, 요리는 무슨.”
배우로서 캐릭터에 맞춰 준비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
그럼에도 그녀의 힘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당분간은 더 잘해줘야겠네.”
난 작게 혀를 차며 시동을 걸었다.
***
이미 완성된 세트장에서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고.
정수진 감독은 조연출과 함께 세트를 돌아다니며 소품과 동선을 살피고 있었다.
“세트 진짜 최고다. 영화 때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요? 그쵸?”
잔뜩 흥분한 채희의 목소리.
어제 저녁에 들었던 목소리와 달리 생기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게, 세트의 퀄리티가 눈이 돌아갈 만큼 정말 엄청났으니까.
CG로 대체하는 것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것들엔 모두 제작비를 아낌없이 부었나 보다.
배우로서 현장이 이러면 신이 나는 게 당연하겠지.
영화를 찍으면서도 이런 환경은 접해보지 못했었는데, 역시 장르에 판타지가 섞이고 배경 또한 일반적인 현대가 아니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촬영 들어가선 저 세트에 엄청 익숙하게 보여야 하는 거 알지? 지금이야 신기하게 생각해도 촬영 들어가면 절대 티 내면 안 된다?”
“···잔소리는.”
“이게 잔소리냐? 너 저런 세트에서 처음 촬영하는 거니까 말하는-“
“아아! 몰라, 몰라!”
하여간 애가 따로 없다.
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은 그녀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잔소리 맞죠. 쟤가 어련히 잘할까.”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분장을 마친 박송이가 팔짱을 끼고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에 말을 덧붙였다.
“그쪽이 쟤랑 실전에서 같이 연기를 안 해봐서 모르는 거예요. 얘랑 연기하면 실제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라니까요?”
그건 좀 오버 같긴 하다만,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바이다.
채희는 이제 메소드를 원하는 만큼 가미하며 조절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래도 CG가 이렇게 많이 차지하는 곳에서는 처음 촬영하잖아요.”
“선배님! 이 오빠가 이렇다니까요? 절대 안 져줘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울상인 얼굴로 토로하는 채희.
“잔소리가 아니라 그냥 좀 주의하라고 한 얘기였어. 그걸 갖고 잔소리네, 뭐네···. 됐어. 그럼 이제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보기만 할란다.”
“설마··· 삐진 거예요?”
“삐지긴 누가.”
“삐졌네, 삐졌어.”
“내가 너냐? 삐지게?”
우리가 이러고 있으니 어쩐지 박송이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마치 우리 둘 다 똑같다고 말하는 듯한, 그리고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있다.
내 입장에서는 울컥할 만큼 억울한 일이었다.
“박송이 씨는 준비 잘하셨어요? 오늘 연기 기대해봐도 되죠?”
“제 팬이면 기대하면서 보시고, 아니면 대충 보세요. 어떻게, 기대하실 거예요?”
“···.”
그녀는 내 침묵에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며 자리를 떠났다.
속이 시원했다.
***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의 촬영의 포문을 여는 첫 번째 씬은.
정채희가 중심이 되는 씬이자, 단역들과 조연들과 함께 찍는 씬이었다.
첫 번째 씬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큐 사인이 나오기도 전에 분위기가 확 바뀐 정채희 때문일까.
단역들과 조연은 척 보기에도 딱딱하게 얼어붙은 것 같았다.
이에, 카메라에 비치는 화면을 보던 정수진 감독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나 첫 촬영부터 짜증을 낼 수는 없는 일.
분위기와 사기도 그렇고, 처음부터 짜증을 내면 왠지 작품의 미래가 좋지 못할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잠깐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득, 아까 세트를 돌아다니며 귀에 들어왔던 말이 떠올랐다.
‘그쪽이 쟤랑 실전에서 같이 연기를 안 해봐서 모르는 거예요. 얘랑 연기하면 실제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라니까요?’
벌써 정채희와 두 작품을 함께 찍었던 박송이가 했던 말.
정수진 감독은 아무 신호도 나오지 않아 당황하고 있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조금의 동요도 없이 몰입을 유지하고 있는 정채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럼 한 컷 버린다고 생각하고 찍어볼까.’
박송이의 말이 과장이라고 해도, 한 번 찍고 나면 다른 배우들도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겠지.
정수진 감독은 표정을 바꾸곤, 사인을 보냈다.
“레디- 액션!”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촬영에 앞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고 생각했던 정채희가.
주변의 공기까지 단번에 바꿔버린 것은.
“···!”
정수진은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부릅뜬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철제 의자에 앉아 무심한 눈으로 무릎 꿇은 단역을 바라본다.
그런데 그 무심한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자비하고 비정하게 비쳐졌다.
마치, 눈앞에 있는 이를 죽일지 말지 손익을 계산하고 있는 것처럼.
말없이 풍기는 난폭하고 흉흉한 아우라에.
그녀의 앞에 있는 단역배우부터, 그녀의 옆에 기립한 조연 배우까지.
모두의 얼굴에서 생동감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미친.’
정수진 감독은 지금까지 수많은 현장을 겪어보며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연기를 리드하거나 상대의 연기를 더 끌어올리는 경우는 많이 보긴 했으나, 이렇게 아무런 말도, 표정 변화도, 행동도 없이, 주변 모두를 몰입시켜버리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완전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이 또한 그녀의 캐릭터에 맞는 연기이긴 했으니.
“대답 안 해?”
“네, 네? 지, 질문을 주셔야···.”
“내가 원하는 말들이 있을 거야. 잘 생각해봐. 목숨 걸고.”
이 작품은 분위기가 생명.
캐스팅 과정에서, 특별한 연출 없이 오로지 연기만으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배우를 원했기 때문에.
액션을 해본 적 없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도 정채희를 캐스팅한 거였는데.
애초에 그 선택 과정에서의 정답은 오로지 하나로 정해져 있었나 보다.
정채희를 바라보는 정수진 감독의 눈동자는 희열과 열망으로 일렁거렸고.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함성을 내지르듯 힘이 넘쳤다.
“커엇! 오케이!”
***
첫 씬으로 촬영장의 분위기가 한껏 뜨거워졌다.
정감독님은 파이팅이 넘치셨고, 채희와 함께 촬영했던 단역배우들과 조연배우들은 입에 침을 튀기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채희의 연기를 지켜봤던 박송이.
그녀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확 구기며 말했다.
“어째 익숙해지지가 않네···.”
당연하다. 채희는 계속 발전하고 있으니까.
잊으면 안 될 게, 채희는 아직 데뷔한 지 오래 되지 않은 신인급.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그녀는 한 작품, 한 작품의 경험을 양분 삼아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송이 씨도 파이팅입니다.”
“···고마워요.”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인사를 한 채희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박송이는 다음 씬의 촬영을 위해 자리를 떴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다가 채희에게 시선을 옮겼다.
“크흠. 어때요. 걱정 안 해도 됐었죠?”
턱을 치켜들며 한껏 거만한 자세로 묻는다.
얘는 정말이지, 혀 끝까지 튀어나왔던 칭찬을 도로 삼키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숙련도로.
“내가 조언해줘서 그런 연기가 나온 거겠지.”
“어쨌든 잘했다는 거네요?”
“...그래.”
방긋 웃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를 바라보던 스태프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 그녀가 보여준 연기에 몰입한 사람으로서는 어이가 없겠지.
동감하는 바다.
우리 애가 워낙 연기를 잘해야지.
“근데 채희야.”
“네?”
또 잔소리로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꼭 이 말을 해야만 했다.
“오늘 마지막 씬, 액션 씬이잖아.”
“네.”
“그때 너무 좋은 모습 보여주려고 하지 마.”
“···네?”
동글동글한 눈이 더욱 크기를 키웠고.
나는 그녀의 눈빛을 담담히 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좋은 모습 보여주려고 무리하지 말라는 거야. 다치지 말라고.”
연기를 이 정도까지 해버리면, 액션 정도는 조금 모자란 모습을 보여줘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감독님을 포함한 스태프들이나, 다른 배우들도, 그리고 이걸 시청하게 될 시청자들도.
설령 장면의 힘이 조금 떨어진다 해도, 그보단 그녀가 안 다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연습했던 거의 70프로 정도만 한다고 생각해. 100프로나 그 이상 하려고 하지 말고. 알겠지?”
그녀는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기 대충하라는 말은 또 처음 들어보네.”
“그래, 차라리 대충 해버려. 그게 속 편하겠다.”
“···.”
“알았지?”
대답을 강요하는 말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
오늘의 마지막 씬.
정채희가 처음으로 액션을 선보이는 씬이자, 앞으로 그녀의 액션에 대해 어떻게 연출할지 갈피를 잡을 수 있는 중요한 씬이었다.
채희는 갖가지 다른 기대와 생각이 담긴 시선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감독님과 스태프들은 기대와 걱정이 함께 담긴 눈빛으로, 다른 배우들은 오로지 기대만이 담긴 눈빛으로.
그리고 박한울은 오로지 걱정 어린 시선만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는 연습 못 시켜서 안달이더니···.’
식단을 무기로 액션스쿨 선생님과 한 패가 되어 구르고 또 굴렀었다.
그런데, 막상 실전을 치를 때가 되자, 70프로만 보이라고 말한다.
‘뭐야, 그게.’
채희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기분이 좋다.
다른 사람의 걱정을 받는 것은 때로 이렇게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채희 씨, 리허설 한 번 더 할까요? 괜찮겠어요?”
정수진 감독의 말에, 채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뇨. 준비됐습니다!”
사실 고민하기도 했다.
그의 말은 기분이 좋았지만, 정말 70프로로 할 지 말 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구른 게 얼만데, 그게 아까워서라도 좋은 모습은 보이고 싶었다.
‘그러니까 딱 80프로 정도만 하자.’
다른 연기는 100%를 보이되, 액션만큼은 80%로.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전보다 더욱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박력은 떨어질 지언정, 움직임은 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고.
몰입했음을 눈치 챈 감독은 지체없이 큐 사인을 보냈다.
“레디- 액션!”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렁찬 인사 소리들과 더불어 장비를 정리하는 소리가 세트장을 메웠고.
정수진 감독은 채희의 앞에서 눈을 이글거리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최고였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해주실 수 있죠? 이제 정말 컨디션 관리 잘하셔야 해요. 다른 날들도 딱 오늘만큼만-“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채희.
나는 살짝 떨어진 곳에서 감독의 말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고.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채희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저 사실 20프로밖에 안 보여줬어요. 100프로였으면 진짜 막 완전 끝장났을걸요?”
허세가 빤히 보이는 말이었기에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잘했어. 진짜 최선을 다했으면 엄청났겠네.”
“그쵸?”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그녀와 함께 하는 현장은 내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는데.
그건 비단 좋은 연기를 볼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냥 애가 귀엽잖아.
예쁘고.
< 70프로 정도만 한다고 생각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