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08화 (108/170)

< 반하지 말자 >

다음 날, 난 큰 기대를 안고 송하연의 작업실을 찾았다.

들려줄 게 있다 했으니 분명 곡을 썼을 터.

하긴 워커홀릭인 그녀라면 이제 슬슬 몸이 근질거릴 때도 됐지.

작업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는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오셨어요?”

목소리가 살짝 떠 있고, 표정도 아주 밝은 걸 보니 내 기대감 또한 무럭무럭 커지는 느낌이다.

대체 어떤 곡을 썼길래 이렇게 기분 좋아할까.

난 내가 사온 커피 두 개 중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곡 쓰신 거 맞죠?”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본론부터 꺼내는 게 좀 그렇긴 하다만.

질문을 참을 수 없었다.

기대가 되는 걸 어떡해.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내 기대를 무참하게 박살냈다.

“아뇨. 곡 안 썼어요.”

“···아.”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나와서 당황했다.

허나, 그녀의 입에서 곧바로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작게 흘러나오자, 뭔가 있긴 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곡 안 쓰신 거 맞아요?”

그녀는 미소를 띠우며 나를 컴퓨터 앞 의자로 이끌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켜 화면을 띠워 보였다.

이제는 내게도 친숙한 작곡 프로그램.

그걸 본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트랙들을 보나, 트랙에 적힌 악기들로 보나, 누가 봐도 곡이 분명한데 곡을 쓰지 않았다니.

뭐, 곡을 썼다고 하기엔 트랙 수가 평소보다 훨씬 적었지만 그래도 이건 음악이 분명했다.

“이거 곡이잖아요.”

“아뇨, 곡 아니에요. 곡은 이제부터 실장님이랑 같이 만들어보려고요.”

어쩐지 또 질문을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아, 나는 살짝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녀도 마우스를 움직이며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바로 들려줄 모양.

‘뭔 지는 몰라도 일단 집중해서 들어야지.’

난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고.

곡이라고 하기엔 듬성듬성 비워진 사운드가 작업실을 가득 채워갔다.

영감을 기록한 듯, 멜로디만 선명한 사운드.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이 뚝 끊겼고, 그녀는 이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열었다.

“방금 건 1번이고요. 이건 2번이에요.”

“···이런 게 몇 개나 있는 거예요?”

“서른다섯 개요.”

싱긋 웃는 그녀.

난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멜로디만 기록한 거예요? 그것도 서른다섯 개나?”

“네. 실장님이라면 이걸 잘 활용할 수 있으실 것 같아서요. 그간 열심히 작업해봤어요.”

일단 들어본 건 하나뿐.

그녀의 설명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머릿속이 선명해지는 느낌이다.

아까 그 멜로디는 어떻게 살리는 편이 좋을까?

‘가수의 영감을 조립할 수 있다니.’

그것도 내가 굉장히 잘 아는 아티스트이자, 누구보다 실력 있는 아티스트.

내 머리가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었다.

“2번 재생할까요?”

난 그녀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들은 것은 겨우 하나.

앞으로 무려 서른네 개나 남아 있었다.

“바로 트시죠. 중간에 끊지 말고 쭉이요.”

“네.”

2번, 3번, 4번··· 그리고 마지막 35번까지.

멈추지 않고 쭈욱 들었고.

나는 새삼 그녀의 대단함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다르긴 다르네.’

마구잡이로 만든 멜로디들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앨범에 넣으려는 일관성과 목적성이 느껴졌으며.

또한, 그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깔을 짙게 담아내기까지 했다.

이내 작업실을 가득 채웠던 소리가 뚝, 멎었고.

내 입에서는 절로 뜨거운 한숨이 내뱉어졌다.

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어떻게 들었을 지, 어떤 말을 할 지, 그녀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표정에서 기대감과 긴장감이 엿보이고 있었다.

사실 멜로디로만 따졌을 때, 목적성이나 일관성, 색깔도 중요하지만.

이게 얼마나 대중들에게 좋게 들릴 지가 가장 중요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살짝이나마 엿보이고 있다는 게 어이가 없어 실소가 새어 나왔다.

“···괜찮았어요?”

내 웃음에 눈동자가 흔들린 그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떠오르는 것은 많다.

레퍼런스를 들며 ‘이 멜로디는 앨범의 이 느낌과 비슷하고, 이 앨범의 이 느낌을 담아낸 것 같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멜로디들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 아닌, 나의 감상이자 나의 생각.

그녀의 눈빛에 그 뜻이 여실히 드러나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역시··· 팬을 하길 잘했네요. 어떻게 이렇게 매번 발전하실 수가 있죠?”

그런데 내 말이 영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다.

눈만 깜빡거릴 뿐, 반응을 하지 않는다.

뭐라고 더 말해야 할까, 눈을 굴리며 머리를 재촉하고 있는데.

그녀의 입에서 느릿느릿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잘했어요?”

“네. 엄청 잘했어요.”

고개를 내려 내 손을 잠시 빤히 쳐다보고 있다.

설마 머리를 쓰다듬어달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손을 꿈틀거렸는데, 그녀의 고개가 휙, 하고 모니터를 향해 돌아갔다.

역시 착각이었나 보다.

“실장님은 언제부터 작업 가능하세요?”

스케줄을 떠올려보며 대답했다.

“음. 밥 먹고 바로요.”

“네? 오늘부터··· 바로 돼요?”

“당연하죠.”

이런 멜로디들이 있는데 어떻게 시간을 끌어.

“급한 일 아니면 전부 다 뒤로 미루려고요.”

그제서야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히 이 대답은 만족스러웠나 보다.

***

열 곡의 녹음을 모두 마친 유현지.

그녀는 박한울과 함께 작사했던 두 곡의 안무를 짜기 위해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처음 시도했을 때보다 안정적이긴 하나, 여전히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

곡의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안무를 짤 필요는 없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안무를 짜기 위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비단 곡의 분위기뿐만이 아니기도 하고.

“하아. 하아.”

지금 이 시간에도 소속사 직원들은 자신의 앨범에 대한 일하고 있을 터.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 홍보, 마케팅, 뮤직 비디오 등.

아무래도 안무 창작에 진척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부담 때문일 수도 있겠다.

예능이나 팬미팅에서 안무를 짜본 경험은 있었으나 공식적인 활동에 짜본 적은 없었으니까.

유현지는 지금 책임감이라는 것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연락드려볼까···?”

이런 상황이면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유현지는 잠시 자리에 앉아 땀을 식히며 핸드폰을 들었다.

시간은 저녁 9시.

늦은 시간임은 맞지만 그래도 전화를 하기로 했다.

그녀가 필요한 건 현실적인 대책이 아닌, 단지 격려와 응원의 말 몇 마디였으니.

“오빠.”

-어, 현지야.

반기는 그의 목소리에, 미소와 함께 말이 나오려 할 때.

핸드폰 너머로 얼핏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현지는 튀어나오려던 말을 덜컥, 멈추고는 물었다.

“···바쁘세요?”

그가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하연 씨랑 곡 만드는 중이야. 좋은 멜로디를 많이 만들어 놓으셨더라고.

“아···.”

-그런데 왜 전화했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어차피 하루이틀 안에 끝나는 것도 아니라 급한 일은 아니니까 무슨 일 있으면 말해도 돼.

현지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네, 잘하고 있어요. 네.”

잠깐의 통화.

현지는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정면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다른 누구는 좋은 멜로디를 많이 만들어서, 지금쯤 한창 칭찬받으며 작업하고 있을 텐데.

‘나는···.’

잠시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무래도 여섯 살 아이처럼 엄살을 부릴 때가 아닌 듯했다.

“다시 해보자.”

두 곡의 안무 모두.

아주 멋지게.

그렇게 연습실 안에는 다시 끼익, 끼익, 운동화 소리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하연 씨가 했던 것처럼 일단 러프하게 짜본 다음에 다듬고 수정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의 말에, 매일매일 마법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 러프한 버전이긴 하나, 대략 하루에 두세 곡 정도가 툭툭 튀어나오고 있다.

그것도 상당히 만족스럽게.

송하연은 살며시 상체를 뒤로 빼내어 눈동자만 옆으로 돌렸다.

모니터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아무리 박한울이라고 해서 계속해서 아이디어가 술술 나오는 게 아니다 보니, 이렇게 고민할 때가 있었다.

머릿속에선 어떤 식으로 하는 게 좋을지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스치고 있겠지.

하연은 그가 내는 낮은 침음을 들으며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집중하는 모습이 굉장히 보기 좋았다.

“하연 씨.”

“네!? 네?”

그렇게 정신 팔고 구경하고 있다가,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황급히 눈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엿보고 있었다는 게 들키진 않았겠지만, 깜짝 놀란 가슴은 계속해서 세차게 뛰고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네? 저 안 놀랐는데요? 아니, 그냥··· 곡···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부르셔서 깜짝 놀란 거예요.”

“방금 안 놀라셨다고···.”

아, 그랬나?

너무 멍청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무슨 사심이 있어서 훔쳐본 것도 아닌데, 훔쳐봤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화들짝 놀라는 꼴이라니.

하연은 대답할 말이 궁해,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빨리 화제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머리를 제대로 거치지도 않은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실장님은 왜 여자친구 안 사귀세요?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

“제가요?”

그는 웃긴 농담을 들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인기는 무슨. 없어요, 그런 거.”

다행히 화제는 돌렸다.

그런데, 이어서 나온 그의 말에 갑자기 궁금증이 치솟았다.

“최근에 이런 질문을 좀 듣네요? 다른 분한테도 들었는데.”

“···누구요?”

“박송이 씨요. 대본 리딩에서 만났는데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연애하냐고.”

“아, 그분? 그런데 그분··· 아마 소속사에서 제일 잘 되고 계신 분이라 연애하시면 큰일 날 거예요. 정말 회사 차원에서 큰일 날지도 모르잖아요. 가뜩이나 대중들은 여배우 스캔들에 민감하기도 하고.”

“네? 아니, 제가 질문받았다고요.”

“···아 참. 그랬죠?”

하연은 겉으로 별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미소 지었으나, 속은 정반대였다.

왜 자꾸 바보 같은 모습이 튀어나오는 걸까.

“그런데 하연 씨는 혹시 좋아하는 악세서리 같은 거 있어요?”

“악세서리요?”

하연의 머릿속에 번쩍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회사 사람들이 다 모인 곳에서 정채희에게 목걸이를 건네는 모습.

굉장히 또렷하고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연은 득달같이 대답했다.

“저는 반지요. 반지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안 그래도 손가락이 심심하던 차였다.

반지를 끼면 심심하지 않으리라.

“근데 평소에 반지 같은 거 잘 안 끼시지 않아요? 무대나 방송할 때 빼고는 반지 끼신 거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아, 그건 마음에 드는 반지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값싸고 좋은 반지들이 많이 나왔더라고요. 아무래도 시즌이 시즌이다 보니, 가을이 다가오기도 하고, 전 기타를 치니까 손가락이 또 너무 굳으면 안 되잖아요.”

그의 얼굴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되는 대로 내뱉었기 때문일 터.

‘아···.’

송하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작업실을 빠져나왔는데.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쳤어.”

이건 숫제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 아닌가.

아무래도, 한동안 작업만 하다 보니 감성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작업에 집중하는 시기에 많이들 그러지 않은가.

예술인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교류하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그래.”

주변에 제대로 교류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신뢰와 유대감, 우정, 감사함, 이러한 긍정적인 감정들을 순간적으로 다른 감정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하연은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니면 남자를 좀 만나봐야 하나? 한 번 소개라도 받아볼까?”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려 했는데, 막상 다른 남자를 만나려니 그리 끌리지가 않았다.

“···일단은 일이지. 연애는 무슨 연애야.”

일이나 하자.

착각하지 말자.

반하지 말자.

하연은 속으로 되뇌이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 반하지 말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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