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적 사랑 유별난 건 아는데 >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를 제작하는 제작사 '시크 라이트'.
넷플릭스와 이미 몇 작품이나 함께 했으며, 제작사 중 대한민국 최고라서 그런지.
캐스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대본 리딩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채희의 집으로 올라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아직 시간이 여유로웠으니 침대나 소파에 널브러져 있거나, 아니면 밥을 먹고 있을 터.
그녀가 뭘 하고 있을지 눈에 선했었는데, 정작 현관에 들어선 내 눈에 보인 건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고 있는 채희의 모습이었다.
“···오셨···어요?”
플랭크.
송하연도 즐겨 하는 운동을 그녀 또한 하고 있었다.
파란색 매트 위에서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꿈인가?”
두 눈을 껌뻑이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는데, 그녀는 대꾸할 여력도 없는지 끄응, 신음을 내기만 했다.
그리고 거기서 1분여를 더 버티고 나서야 무너졌다.
“하아! 하아! 진짜 죽겠다!”
“이거 꿈 맞네. 정채희가 자발적으로 운동하다니, 말이 안 되지.”
그녀는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르더니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운동한 거 봤죠? 그러니까 오늘 저녁엔 맥주 한잔 콜?”
“···꿈 아니구나.”
급격히 느껴지는 현실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았다.
그래도 내가 온다는 걸 감안했는지 타이트한 스판 운동복을 입고 있는데 땀에 푹 젖어 있다.
아니, 일부러 운동했다는 걸 더 제대로 어필하려고 운동복을 입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대강 옷 위로 봐도 몸매가 바뀌었다는 게 확연히 티가 났다.
애초에 군살도 없긴 했으나, 이젠 제법 탄탄해 보이기까지 한다.
“너 촬영 때 배 드러나는 옷 입어야 하는 거 알지?”
“그거 때문에 플랭크도 한 거거든요?”
그녀는 삐질삐질 흘리는 땀을 에어컨과 선풍기로 식히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갑자기 게슴츠레 눈을 뜨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왜요. 복근 보고 싶으세요? 제가 또 한 복근 하는데.”
“좋겠네. 난 밤에 치킨이랑 맥주나 먹으면서 뱃살이나 키워야겠다.”
“···짜증나, 진짜.”
“부러운 거 아니고?”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삐죽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러게 누가 도발하래?
***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를 끝마친 뒤, 대본을 한참 동안 다시 살피던 박송이.
매니저가 올 시간이 되자, 그녀는 대본을 덮고 화장대에 앉아 다시 거울을 살폈다.
고개를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번 작품도 성공할 것은 자명한 일.
심지어 이번엔 다시 주연의 자리에 올랐다.
데뷔 이후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해서 그녀는 요새 기분이 좋았다.
정채희와 박한울을 만난 뒤로는 모든 일이 다 술술 잘 풀리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그 사람이랑 밥 한 끼 먹기 엄청 힘드네.’
박한울이 대본을 추천해준다고 했을 때 밥 한 끼 먹자 말했었는데, 그는 못 들은 척하며 전화를 끊었었다.
당시엔 어이가 없었으나, 그의 별명이 '겉바속촉'인 걸 다시 상기하곤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몇 번이나 더 약속을 잡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
말을 들어보면 정말 바빴던 건 맞지만, 지금까지 못 겪어봤던 경험에 신선하기까지 했다.
“내가 사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고마워서 밥 한 끼 사겠다는 건데 모양새가 자꾸 매달리는 꼴이 되고 있다.
그래도 어쩌겠나.
그 사람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쯤 되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예를 들면, 생색 내고 싶지 않다던지, 그도 아니면···.
“연애··· 하나?”
머릿속에 몇몇 여자의 얼굴이 스쳤지만 최종적으로 남은 여자는 한 명.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니, 잘 아는 사람으로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확인해보면 알겠지.”
그때 핸드폰에 지이잉- 진동이 울렸고.
그녀는 바로 전화를 받으며 집밖으로 나섰다.
***
“아니, 내가 무슨 족발을 먹자고 했어요, 떡볶이를 먹자고 했어요. 그냥 맥주에 간단하게 씬 피자나 먹자니까요? 원래 피자는 빵 부분이 살찌는 거라, 얇은 건 상관없어요.”
“그럴 거면 그냥 족발이랑 떡볶이까지 다 시켜먹지? 왜, 맛있게 먹으면 제로 칼로리라잖아.”
“그거랑 그거랑 같아요? 아··· 오빠 지금 저 비꼬는 거죠?”
“주변에서 다 쳐다보면서 웃잖아. 너 이미지 관리 안 해?”
“오빠가 자꾸 이상한 소리 하니까 그렇죠!”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고, 리딩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채희는 뾰로퉁한 얼굴로 나를 흘겨보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인기가 엄청나다지만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이긴 해서, 우리는 예정 시간보다 한참은 더 일찍 도찼했는데.
“안녕?”
이미 박송이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선배님!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그냥.”
채희의 말에 간단하게 대답한 그녀가 나를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겉바속촉 씨는 식사는 하셨어요? 매번 바쁘셔서 굶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얼굴 보니까 그건 아닌 모양이네요?”
“···.”
매번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을 거절해서 그런지, 얼굴 보자마자 비꼬는 말이 튀어나왔다.
방금 전, 채희한테 비꼰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건가.
역시 세상은 착하게 살아야 하나 보다.
‘그냥 생색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데.’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자, 그녀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 리딩 끝나고 바쁜 일 없죠? 바쁜 일 있어도 식사는 하고 가요.”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표정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어째 좀 더 사근사근해진 것 같다.
원래 박송이와는 겉바속촉이니, 시라송이니, 하며 티격태격해야 제맛인데 대본을 추천해준 것 때문에 태도가 변했나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추천해주지 말걸.
타격감 좋던 장난감을 뺏긴 느낌이었다.
“근데, 시라송이 씨. 리딩 앞두고 너무 여유로우신데요? 준비 열심히 하셨나 봐요?”
톡, 건드려봐도 고작 눈썹만 꿈틀거릴 뿐이다.
“그럼요. 작품도 마음에 들고 캐릭터도 마음에 들고, 주연이잖아요. 주연이면 열심히 준비하는 게 당연하죠. 안 그래, 채희야?”
박송이는 채희에게 물으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 착각인지 몰라도 채희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것 같았다.
“그쵸. 근데 식사? 둘이 밥 먹기로 했어요?”
“아, 저기 부적 씨가 이 대본이랑 역할 추천해주셨거든. 그래서 감사 인사로 밥 한 끼 사드리기로 했어.”
“그랬었구나. 근데 왜 아직까지 못 한 거예요?”
“저분이 계속 바쁘다고 하셔서.”
채희의 덤덤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가 다시 박송이를 향했다.
“선배님, 근데 저 뭐 바뀐 거 없어요? 운동 엄청 열심히 했는데. 팔뚝 한 번 만져보세요.”
화제를 돌리는 채희의 말에 이야기는 금세 다른 곳으로 향했고.
사람들이 안으로 속속 들어오며 리딩 그 특유의 딱딱하면서도 뜨거운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 리딩을 통해 앞으로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대략적으로 점칠 수 있으니 당연한 것.
이내, 정감독님을 비롯한 핵심 제작진들이 들어오며 리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정수진 감독은 모든 작품에 사활을 걸곤 했으나, 이번 작품엔 특히나 더 그랬다.
넷플릭스, 그리고 국내 최고의 제작사.
대본과 투자금은 말할 것도 없고, 배우들마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큰 기대를 안고 리딩에 참여했고, 정채희와 그녀의 매니저를 바라봤다.
정채희의 매니저는 특이하게도 정채희의 뒤편에 있는 게 아니라, 그녀와 마주보는 곳, 그러니까 그녀와 반대편에 서 있었다.
약간 의아하긴 했으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걸음걸음마다 대박을 터뜨리는 저 매니저가 이 작품을 선택했다는 것, 그리고 현시점에서 모든 감독들에게 캐스팅 1순위나 다름없는 저 연기괴물 정채희가 이 작품의 주연이 되었다는 것.
정수진은 현장의 긴장감을 위해 억지로 흡족한 표정을 숨겼다.
‘액션도 잘 따라온다고 했지?’
전해듣기로는, 예상했던 대로 액션에 재능은 전혀 없었지만 어찌나 노력을 많이 하는지 곧잘 따라올 수 있게 됐다고 들었다.
‘이제 걱정할 건 없어.’
그녀는 마침 차례가 되어 연기를 시작하는 정채희를 바라봤다.
배경은 법도, 질서도, 도덕도 없이 황폐해진 미래의 지구.
정채희가 맡은 역할은 온갖 위험과 고난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온 베테랑 싸움꾼이자, 한 집단의 대장 역할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광기와 더불어 지독한 독기가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고.
표정은 평생 미소 한 번 지어본 적 없는 것처럼 한없이 싸늘하고 딱딱하기만 했다.
“왜.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 위험할 것 같아서 겁나? 그런데 있잖아. 위험이란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위험해지는 거야. 오히려··· 네가 다른 사람들의 위험이 돼야지.”
메마르고 비정한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단단한 신념이 담겨 있다.
‘완벽해!’
정수진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었다.
애초에 정채희의 연기 부분에서는 전혀 걱정이 없었으나, 이건 기대했던 것보다 더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웹드라마 ‘캠퍼스 낭만이 원래 이런 거야?’와 드라마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 그리고 영화 ‘더 BAD’까지.
그녀의 연기는 가면 갈수록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으니, 지금 이 작품에서는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 터.
정수진 감독은 침을 꿀꺽 삼키며 이를 꽉 물었다.
“나, 나는 대신 능력이 있잖아요! 그쪽도 제 능력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능력만 있으면 됐지, 내가 왜 밖에 혼자 나가서 위험을 자초해야 하냐고요! 내가 이러려고 여기에 몸을 의탁한 줄 알아!?”
정채희에 이어 바톤을 잇는 박송이의 호소력 짙은 연기.
초능력을 각성하여, 근방에서 유명한 강자의 앞에서도 목소리를 키울 수 있었으나.
그 목소리는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씨익.
정수진 감독은 더 이상 미소가 지어지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벌써 세 번째로 합을 맞추는 저 두 배우의 호흡을 보는데.
감독이 된 입장에서 어떻게 웃음을 숨기겠나.
정수진 감독의 얼굴은 커지는 기대감과 환희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
흡사 칼질을 하는 듯 날카롭게 벼려진 연기들이 쉬지 않고 오가며 리딩이 이어졌고.
리딩이 끝났을 때, 정수진 감독과 제작진들은 굉장히 흥분된 얼굴로 리딩실을 나갈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채희를 비롯한 후배급 배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한편, 선배급인 박송이는 후배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박한울에게 저벅저벅 다가와 여상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리딩 앞두고 여유로울 만했죠? 준비 열심히 했어요.”
“그러네요. 연기가 확실히 늘었네요.”
환하게 미소 짓는 박송이.
“그쪽 입에서 그런 말 나오니까 되게 뿌듯해지네. 열심히 한 보람이 있어.”
“나한테 잘보이려고 연습한 것도 아니잖아요.”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해요.”
박송이는 팔짱을 끼고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리고 연애 안 하고 있죠?”
“···? 네? 거기서 어떻게 ‘그리고’가 나와요? 완전 생뚱맞은 질문이구만.”
“대답이나 해요. 연애 안 하는 거 맞죠?”
“할 시간이 없어서 안 하는 거예요. 못 하는 게 아니라.”
“누가 뭐래요?”
박한울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정채희를 바라봤다.
웃는 얼굴로 선배들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이쪽을 흘끗흘끗 쳐다보고 있다.
박한울의 시선은 금세 박송이에게로 돌아왔다.
그녀의 강렬한 시선이 얼굴에 꽂히는 게 느껴져서.
“연애도 안 하는데 왜 자꾸 거절해서 사람 매달리게 만들어요? 아시겠지만 저 그쪽한테 사심 없어요. 정말 고마워서 밥 한 끼 하자고 하는 거예요. 이전 작품도 그렇고 어떻게 보면 좋은 작품이랑 좋은 배우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쪽 덕분이잖아요.”
그녀의 태도는 다시 사근사근해져 있었다.
“흥행 걱정도 안 해도 되고, 이런 환경에서 노력하니까 연기도 더 늘더라고요. 그쪽은 아무 생각 없었더라도 나는 이렇게라도 감사표시를 해야겠으니까 오늘은 좀 시간 내줘요. 아까도 어물쩡 넘어가던데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아요?”
그때였다.
정채희가 방긋 미소 짓는 얼굴로 헐레벌떡 다가오며 말했다.
“많이 기다렸죠! 저 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연습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연습실로 갈까요, 아니면-“
“채희야.”
“네, 선배님?”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채희에게.
박송이는 피식 웃으며 귀쪽으로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리고, 박한울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정채희에게조차 희미하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부적 사랑 유별난 건 아는데, 누가 네 부적 뺏어가겠대?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박한울과 마주하고 있는 채희의 눈동자는 거칠게 흔들렸다.
< 부적 사랑 유별난 건 아는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