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 의미 없이 줄 뻔했어 >
박한울이 처음 참여했었던 월말평가.
거기서 그는 김현준, 이건호, 정현진, 이동진, 이 네 명의 연습생들과 더불어 신재준과 박선호도 한 그룹으로 어울릴 거라 언급했었다.
물론 다른 연습생들도 언급하긴 했으나, 박한울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연습생들이 저 여섯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연습생들 사이에서, 그리고 신인개발팀 사이에서 분위기는 많이 어수선했었다.
저 여섯 명은 자신감에 차서 연습에 박차를 가했고, 친분을 더욱 공고히 했다.
반면 다른 연습생들은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에 의심과 분노, 절망을 해야 했다.
희망고문을 하며 소중한 청춘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이 또한 당사자들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혹시 솔로에 관심 있어요?
장찬수에게 모든 관심이 옮겨갔다.
그리고 지금은 장찬수의 데뷔가 확정되어 연습생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심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박한울에게 훌륭한 평가를 듣지 못했다고 해도 장찬수처럼 독기 있게 연습하면 어떻게 될지 또 모르는 거니까.
‘할 수 있어.’
지금 HJ엔터테인먼트에 몸을 담은 연습생들은 모두가 알았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몸집이 커다란 YU엔터테인먼트보다, 그리고 그 어떤 기획사보다 바로 이곳, HJ엔터테인먼트에 대중들의 관심이 가장 많이 집중돼 있다는 것을.
‘여기에 뼈를 묻어야 돼.’
연습생들에겐 엄청난 기회였다.
상향 지원이 되지 않아 눈을 살짝 낮췄는데, 그야말로 신의 한수가 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
오히려 YU엔터의 연습생들이 왜 HJ에 가지 않았나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HJ엔터의 연습 환경이 최고라고 할 수만은 없었으나, 평가와 과정 만큼은 그 어느 곳보다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데뷔 이후 역시 마찬가지.
박한울이 있는 4팀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초대박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팀들 역시 아티스트를 배려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또, 몸집이 가장 크진 않더라도, 현시점에서 ‘최고’의 기획사가 어디냐고 하면 열에 다섯 이상은 HJ엔터를 말할 정도로 YU엔터와 어깨를 견주고 있었다.
“우리도 할 수 있어.”
처음에 언급됐던 여섯 명, 그리고 장찬수까지.
모두 남자 연습생이었고, 여자 연습생은 별로 희망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장찬수의 일례로 분위기가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여자 연습생들도 좀 더 독기를 품으며 연습에 임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힘들지 않을까? 찬수 오빠 다음엔 보이그룹 데뷔가 확정이잖아. 그럼 걸그룹 런칭은 얼마나 걸릴지 몰라.”
해정의 말에 윤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또 모르는 일이야. 여긴 다른 데랑 시스템이 똑같지 않아. 박실장님 눈에만 들어가면, 보이그룹보다 걸그룹이 먼저 데뷔할 수도 있고, 보이그룹 데뷔랑은 별개로 얼마 안 있어서 데뷔할 수도 있어.”
“그거야 그렇지만, 그건 찬수 오빠고.... 찬수 오빠는 예외로 쳐야 하잖아.”
윤지는 걱정스레 말하는 해정의 얼굴을 바라봤다.
짙은 쌍꺼풀, 웃으면 순해 보이나 무표정일 땐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
붉은 기가 감도는 작은 입술과 오똑하게 쭉 뻗은 콧날.
그리고··· 폭발적인 몸매.
해정은 외모와 걸맞지 않게 소심한 면이 있었는데, 윤지는 그런 해정이 데뷔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굳이 박한울이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외모와 성격만으로도 걸그룹에 끼워넣을 가치가 있었으니까.
뭐, 실력까지 받쳐주면 금상첨화긴 하지만.
윤지는 해정에게 말했다.
“우리라고 예외가 되지 말란 법 있어?”
해정은 한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긴 윤지의 눈에는 땀을 한 바가지나 흘린 채 헐떡이며 연습실을 나오고 있는 장찬수의 모습이 보였다.
남들이 보면, 왠지 모르게 퇴폐미가 느껴지는 섹시한 미소년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연습생의 입장인 그녀들은 다르게 보였다.
데뷔가 확정되었는데도 미친 듯이 연습하는 독한 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어.”
“···.”
“우리도 연습 열심히 하자.”
“···응.”
HJ엔터테인먼트.
박한울의 안목을 조금이라도 더 써먹기 위해, 아버지인 대표가 월말평가에 밀어넣었었는데.
그 영향이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있었다.
연습생들의 질적인 향상.
박한울은 자신의 담당, 이에 더해 같은 팀인 송하연과 이성호에게만 신경을 쓴다고 하지만.
실상 그가 미치는 영향력은 회사 전체에, 아주 커다랗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
정채희의 집.
심민정이 출연하는 드라마, 'BJ김만수'를 보고 있는 채희의 입에서는 연신 똑같은 말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부럽다. 진짜 너무 부럽다. 와···.”
방금 전까지 나도 저 촬영 현장에 있다가 왔는데, 마치 나더러 들으라는 듯 저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다.
아니, 이쯤 되면 혼잣말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우리 슈퍼스타께서 오늘은 또 뭐가 그리 불만이실까.”
내 말에 그녀의 눈매가 서슬 퍼렇게 바뀌었다.
“’오늘은 또’라뇨?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 맨날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 떠는 것 같잖아요!”
“오! 아니었어?”
그녀의 눈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지만, 내 입에서는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그녀가 가진 불만이 뭔지, 이미 나를 이곳으로 부를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다름아닌 식단 문제.
나는 그녀가 보고 있는 앞에서 젓가락으로 순대곱창볶음을 집어먹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크으!”
“···밥에 국물 얹어서 드셔보세요.”
“그럴까?”
심민정이 한창 촬영을 하고 있을 때, 액션 스쿨에서 훈련을 마친 채희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영상으로 먹방을 보는 건 이제 한계인 것 같으니, 자신의 앞에서 실제로 맛있는 걸 먹어달라고.
훈련이 힘들었는지, 아니면 먹을 걸 참는 게 힘들었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으면서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었다.
참으로 정채희다운 부탁이었으니.
“으으···. 저도 그냥 저렇게 평화로운 거 할 걸 그랬어요. 괜히 이런 거 한다고 해가지고 이게 뭐야.”
‘BJ김만수’가 틀어져 있는 TV를 보며 말하는데, 지금 장면은 평화롭다고 하기엔 약간 어폐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주인공의 성공 스토리를 담고 있었으나, 고구마도 만만치 않다.
악역이 괜히 있겠나.
현재, 중반부에 들어선 드라마는 요새 인터넷을 왠종일 장식할 만큼의 화제성을 갖고 있었는데.
대놓고 매력적인 심민정은 이미 핫한 스타가 되어 있었고, 함께 출연하는 주요 배우들을 비롯해 악역을 맡은 박지수마저도 모두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덕분에 민정 씨도 살 판 났지.’
지금 채희가 불만을 내뱉는 기계와도 같았다면, 심민정은 반대로 톡톡 튀어 엔도르핀을 쏟는 자판기와도 같았다.
앞으로 좀 더 촬영장에 자주 들르고 싶을 정도로 내 기분마저 들뜨게 했었지.
난 작게 미소를 머금고는 국물을 버무린 밥 위에 곱창과 야채를 올리고 야무지게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언제 불만을 터뜨렸냐는 듯, 채희는 열망에 찬 얼굴로 내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침을 꼴깍 삼키곤 혀로 입술을 핥기까지 한다.
“···맛있겠다.”
난 입안의 내용물을 모두 삼키고 말했다.
“좀만 참아. 그래도 좋은 기회잖아.”
“알아요···.”
입술을 퉁명스레 내밀며 대답하지만 나는 그녀가 이 작품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해준 분석을 달달 외우고 있으며, 내가 안 보는 데서도 얼마나 연습했는지 대본이 벌써 너덜너덜해졌다.
애초에 그렇게 노력을 하고 있으니 내 앞에서나마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일 터.
훈련 선생님에게 듣기로도, 그녀가 말로는 투덜거려도 늘 열심히 한다면서 칭찬을 쏟아냈다.
“오빠, 소주도 한잔 드세요.”
“이러다 취하겠다. 술은 좀 천천히 먹자.”
“취해도 되잖아요. 어차피 우리 집이고 내일 일도 쉰다면서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고개를 꺾었다가 다시 내리는데, 그녀의 목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내가 선물해준 목걸이.
그녀에게 선물해준 뒤로 그녀의 목에서 빠진 걸 본 적이 없다.
술을 먹었기 때문일까, 난 머릿속에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너 그거 뺀 적 있어?”
내 시선을 따라 목걸이에 손을 올린 그녀는 생각을 하는 듯 눈을 굴렸다.
“으음. 아뇨.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같아요’는 뭐야.”
“한 번도 없어요. 근데 왜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뺐으면 섭섭할 것 같아요?”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물어봤어. 다행히 마음에 드나 보네.”
지나가다가 이쁘다고 해서 사긴 했지만 이렇게 한 번도 안 뺄 줄은 몰랐는데.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선물은 받는 사람이 기뻐해야 주는 사람도 기쁜 법이다.
이렇게 마음에 들어 하면 나도 더 기쁠 수밖에.
“그럼요. 특별히 저만 준 거잖아요. 오빠 성격에 다른 사람들한테는 당연히 선물 안 했을 거고.”
그녀는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히 소중하게 다루는 모양인지, 손길에서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아차, 하는 생각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둘이 있는 자리에서 줬으면 모를까, 송하연과 현지, 심민정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선물을 건넸었다.
아무리 천만 관객 기념이라지만 구경만 하는 입장에서 서운해하지 않을까?
심지어 내 입사 초기에 송하연이 내게 사인 굿즈와 앨범을 주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서 회사에 들른 적이 있었다.
또한 유현지에게는 실장 승진 선물로 넥타이 핀을 받기도 했고.
“그러네? 다 보는 앞에서 너한테만 선물 줬었네.”
“···어? 잠깐만요. 어··· 그러니까···.”
목걸이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고,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을 더듬었다.
반면 내 생각은 빠르게 돌아가 하나의 결론이 내려졌다.
“실수했네. 다 선물 돌려야겠다.”
“오빠···. 어··· 아! 근데 그런 식으로 선물해주면 오히려 안 좋아할걸요? 저한테 선물해서 억지로 쥐어주는 거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것도 그렇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고, 채희의 얼굴에는 화사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러니까 의미를 담아서 주라는 거지? 음. 확실히 그렇게 하는 게 맞겠다. 아무 의미 없이 줄 뻔했어.”
“···.”
“고맙다, 채희야.”
채희는 미소 짓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리고 술이나 더 드세요. 빨리요. 한잔 쭉 들이켜요.”
“너무 빠르잖아. 취한다니까?”
“그럼 술을 취하려고 먹지, 소독하려고 먹나? 잔말 말고 빨리 드세요. 제가 따라드릴게요.”
표면이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찬 소주잔.
나는 그녀의 매서운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켰다.
젠장. 취할 것 같은데.
***
YU엔터의 김대훈 대표.
그는 연습실에서 팔짱을 낀 채, 지난 며칠 간 이뤄진 변화를 흡족하게 쳐다보았다.
“형, 어때요? 괜찮아요? 그분 진짜 능력 제대로네. 처음엔 뭔 소린가 했는데.”
2000년대를 호령했던 슈퍼스타 ‘스노우’.
그 또한 김대훈 대표와 마찬가지로 미소 짓고 있었다.
한때 활동을 멈췄다가, 최근 다시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나이 때문인지 예전과 같지 않은 폼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신체가 문제였지, 실력만은 여전했고.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곡이나 안무, 컨셉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접근했었다.
며칠 전, 김대훈 대표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 알지? HJ엔터의 박한울 실장. 그 사람이랑 얘기해봤는데, 넌 지금도 여전히 실력이랑 매력으로 승부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 사람 안목도 있고 손해 볼 거 없으니까 얼마간 한 번 그 말대로 해봐. 일단 춤 출 때, 예전이랑은 다른 느낌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대.
-늙었으니까 파워풀한 거 포기하라고요? 안 돼요. 나 그건 포기 못 해.
-아니, 오히려 반대야. 젊었을 땐 조금만 움직여도 힘이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조금 부족하니까 좀 더 겉으로 드러날 수 있게 표현해보래. 최대한 야성적으로. 예를 들면, ‘커플링’ 도입 부분에서 체스트팝만 하지 말고, 발도 같이 밀어줘서 더 역동적이게 보이게끔.
스노우는 며칠 전 유현지와 박한울 실장이 회사로 찾아왔을 때, 우연히 로비에서 마주쳐 인사를 나눴었다.
“그때, 후배 대신 그분이랑 얘기했어야 했는데.”
“아쉬워하지 마. 월말평가 때 오기로 했으니까.”
“어! 진짜요?”
“응. 연습생들도 봐주기로 했거든. 그리고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피드백해줬어. 네가 가장 확연하게 잘 보일 것 같으니까 우선적으로 말했던 거고.”
과거의 인물이라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호령했던 레전드 가수다.
물론 전성기를 지나 유의미한 성장을 이뤄내긴 힘들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 박한울의 조언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관찰하기에도 쉬울 것 같았는데.
결과는 기대를 넘어선 대만족.
물론 고작 며칠 뿐이었기에 변화는 크지 않았으나, 다른 말로 하면 며칠 만에 이 정도라는 소리다.
김대훈 대표는 멀리 내다본 자신의 결정을 자화자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2000년대를 호령했고, 지금 역시 과거에는 못 미치지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스노우의 긍정적인 변화.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YU엔터는 국내 최대의 기획사.
스타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이거, 준 거에 비해서 받은 게 너무 큰 것 같네.’
김대훈 대표는 스노우에게 말했다.
“컴백하면 방송 나가서 꼭 썰 풀어. 그때 맞춰서 우리도 기사 내게.”
“그건 내가 또 전문이지. 걱정 마요. 지금 이 얘기랑 월말평가 때 만나서 얘기할 것들까지 싹 다 풀 테니까.”
스노우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는데.
곧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겨우 그걸로 끝낼 건 아니죠? 그 사람 하는 거 보면 자기 유명세를 이용할 줄은 알아도 유명세 자체를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던데.”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할지는 나도 고민해 봐야지. 그 사람이 먼저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고,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먼 훗날까지 바라보는 김대훈 대표였지만.
박한울이 먼저 부탁하기까지는 고작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그것도 부탁에 선뜻 응할 수 없어, 아주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커다란 부탁을.
< 아무 의미 없이 줄 뻔했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