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대본 추천할 거 있어요? >
박송이가 다크호스 격으로 있는 소규모 배우 기획사.
허나 지금은 고작 다크호스 격이 아니었다.
드라마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에 이은, 영화 ‘더 BAD’의 초대박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는 이 회사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나 다름없었고, 때문에 직원들은 차기작에 대한 건은 더욱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사나 매니저들이 열심히 대본을 고르든 말든, 정작 박송이는 박한울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번엔 드라마려나, 영화려나? 장르는 또 어떤 장르지?’
대박이 예상되지 않는다 해도 배우라면 자신이 하고 싶은 장르와 꽂히는 대본, 그리고 스펙트럼과 이미지를 고려하여 차기작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박송이는 지금까지 박한울이 고른 것 치고 끌리지 않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지금 방송되고 있는 ‘BJ김만수’ 또한 무척 매력적이었다.
대본도 그런데 캐릭터 또한 마찬가지다.
그거라면 더욱 문제가 없다.
그가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골라준다 했으니까.
그러니 회사 직원들이 고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녀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며, TV에 나오고 있는 심민정의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직접 제안할 만하네.’
현재 ‘BJ김만수’의 인기는 심상치 않았다.
비단 원작의 팬들뿐만 아니라, 원작을 모르는 이들의 흥미마저 확 사로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심민정.
드라마의 스토리와 캐릭터, 대사, 연출 모두 좋지만 다른 걸 제외하더라도 심민정의 연기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박한울이 고른 드라마, 박한울이 고른 배우.
이 드라마가 더 잘나갈수록, 더 재밌을수록, 심민정이 더욱 연기를 잘할수록.
박송이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갔다.
‘정채희도 이런 마음인가?’
정채희뿐만 아니라 그가 맡고 있는 아티스트들 모두 이런 마음일 것 같다.
뒤가 한없이 든든한 느낌.
“하여간 겉바속촉이라는 별명 하나는 잘 지었단 말이야.”
겉으로 하는 말들을 보면 얄미운 건 맞는데, 어째 밉지가 않다.
그녀가 이렇게 박한울을 떠올리며 한가롭게 소파에 누워 드라마를 즐기고 있을 때.
그녀의 핸드폰으로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뭐야, 한창 재밌게 보고 있는데.”
발신인을 보니 소속사의 이사.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핸드폰 너머로는 벨소리보다 훨씬 더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이야! 대박! 대박이야!
“뭐가요.”
-넷플릭스 대박작 주연 자리 들어왔다고!
“···네?”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은 자세로 바꿨다.
-이게 어떤 작품이냐면···
흥분한 이사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고, 그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박송이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져만 갔다.
“···일단 대본 좀 볼게요.”
-지금 이미 매니저 출발했어! 곧 있으면 도착할 거야.
전화를 끊은 그녀는 집중이 되질 않아 TV를 껐고, 고요한 거실 안에서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보는 것 정도라면···.”
박한울의 안목을 믿긴 하나, 이 작품 역시 허투루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대박이 예상된다는 넷플릭스 드라마.
넷플릭스 시청자들에게 인기 있을 만한 스토리와 장르.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제작사와 어마어마한 제작비, 믿을 만한 감독.
게다가 캐스팅 제안이 들어온 역할도 주연이었다.
액션 스릴러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액션이 별로 필요치 않은 역할이자.
네 명의 주연 중 하나.
딩동-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길 얼마.
매니저가 집에 도착했고, 그에게 시놉시스와 대본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이거 대박이다, 송이야.”
시놉시스 앞에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
제목만 봐도 내용이 어둡다는 게 느껴졌다.
현재, 세계의 컨텐츠를 관통하는 트렌드에는 그리 맞지 않는 내용.
이사님께 들었듯이, 이러한 분위기의 작품이라면 대부분은 쪽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아주 낮은 확률로 대박이 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초대박이.
그리고 회사의 직원들은 이 작품이 그 낮은 확률 안에 들어갈 것이라 보고 있었다.
제작사나 넷플릭스 또한 그 확률에 걸고 있는 것일 터.
박송이는 매니저에게 건네받은 시놉시스와 대본을 들고 곧장 식탁으로 갔다.
물 한잔을 옆에 두고 바로 시놉시스를 펼쳤다.
그렇게 네 시간이 지났다.
한 번 쭉 읽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으나.
박한울이라는 확실한 선택지가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더 읽으며 심사숙고한 탓이다.
그래서 고민하는 데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정했어?”
대본을 탁, 하고 덮자, 기다리다 지친 매니저가 물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요란한 벨소리가 다시 울렸고.
발신인을 확인한 그녀는 득달같이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혹시 대본 추천할 거 있어요?”
너무 다급한 목소리에 핸드폰 너머에서 헛웃음이 들려왔다.
-왜 그렇게 조급해요?
“있냐고요.”
-있어요, 있어. 그러니까 좀 재촉하지 맙시다.
박송이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손에 쥐고 있는 작품이 이미 마음 속에 들어왔다.
제안이 들어온 역할은 너무 마음에 들었고, 박한울이라는 확실한 선택지조차 뒤로 미룰 만큼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촬영하지 않더라도, 나온다면 꼭 찾아보고 싶을 정도로.
박송이의 머릿속은 복잡했고,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목소리에도 그 심정이 담긴 듯 말끝이 떨려왔다.
“뭔데요?”
그러나.
이어진 박한울의 대답에.
그녀는 맥이 탁 풀린 듯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제목은 좀 별로예요. ‘우리들의 세상에 빛은 없다.’인데 여기 나오는 참모 역할이 그쪽이랑 꽤 어울리네요? 참고로 채희도 같이 들어갈 겁니다. 그쪽이랑 같은 주연으로.
***
처음 시놉시스를 보고, 대본을 봤을 때.
내 머릿속엔 번개가 쾅쾅 내리치는 듯했다.
나는 분명히 채희가 들어갈 작품을 고르며, 겸사겸사 박송이가 들어갈 작품도 고르고 있었는데.
대본을 읽을 땐, 그저 이전의 나, 그러니까 컨텐츠를 좋아하는 방구석 덕후의 입장이 되어 있었다.
‘더 읽고 싶다.’
뒤의 내용을 더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대본이 영상화된 것을 꼭 보고 싶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미친듯이 재미 있었다.
이 작품은 해외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었다.
이미 작품을 읽기 전, 대본을 내게 주며 최팀장님이 말해준 바.
원작 소설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했다.
‘이젠 불티나게 팔리겠네.’
나는 확신했다.
이번 드라마화로 말미암아, 그 작가는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오를 것이고.
이 작품에 들어간 배우들은 전부 다 해외에서 내로라하는 스타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
‘이미 채희도 해외에서 반응이 엄청나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냉정하게 따지자면, 아직 라이징 스타급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하고, 굉장히 만족스러운 속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거기서 단번에 몇 계단이나 훌쩍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이건 무조건 해야 돼.’
다만 걱정되는 게 있기는 했다.
“액션···.”
내 머릿속엔 불과 얼마 전 장면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홍보 일정으로 일본에 갔던 밤, 박송이와 함께 밖을 돌아다니다가 호텔에 들어왔을 때였다.
-저희 오늘 첩보 영화 찍은 것 같지 않아요? 진짜로 저 이런 거 찍으면 잘할 것 같은데. 액션도 막 팍팍! 이러면서. 그쵸?
날을 세운 손으로 허공을 휘적거리며 채희가 말했었고, 박송이는 내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대답을 내놓았었다.
-너 첩보 영화 찍으면 그거 망해. 완전히 폭삭.
나는 쩝, 입맛을 다시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열심히 훈련받으면 모르는 거니까.’
라고 하기에는, 팬미팅에서 댄스 퍼포먼스를 준비했던 나날들이 양심을 쿡 찔렀지만.
그래도 액션과 댄스는 다른 영역이다.
‘암, 그렇고 말고.’
나는 곧장 채희의 집으로 가서 대본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자신감 넘치지만 나로서는 쉬이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액션도 결국 연기잖아요. 저 메소드 하면 그냥 완전 날아다닐 수도 있어요. 걱정 마시라니까요?”
솜주먹을 쥐고 허공에 훅훅 뻗는 모습은 차라리 안 보느니만 못 해 보였다.
젠장.
“하아···. 알았어. 그리고 시간 없으니까 오늘 바로 액션 스쿨 들어가자.”
“네? 아직 확정도 안 났는데요?”
“확정 날 때까지 기다리면 늦어.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등록하려는 거야.”
그녀의 얼굴이 금세 울상으로 물들었다.
“그럼 저··· 오늘부터 운동하는 거예요?”
“응. 여전사로 변신할 차례야 이제. 나 회사에서 일 좀 볼 테니까 준비하고 있다가 로드 오면 같이 액션 스쿨 가.”
나는 흐린 눈으로 절망하는 그녀를 뒤로한 채 그녀의 집에서 나왔고.
시동을 걸고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통화 상대는 박송이.
“어떻게 또다시 이렇게 되네.”
‘헌만사’, 그리고 ‘더 BAD’에 이어 연속 세 번으로 그녀와 함께 작품을 하게 될 테지만.
‘상관없어.’
스토리와 캐릭터, 대본의 분위기, 그리고 장르가 장르인 만큼.
채희와 박송이가 함께 찍는다 해도 그 누구도 지겨운 그림이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환상의 콤비라고 하면 몰라도.’
그만큼 그 캐릭터에는 그녀를 제외하고는 딱히 마땅한 배우를 떠올리기 힘들었다.
-여보세요? 혹시 대본 추천할 거 있어요?
“왜 그렇게 조급해요”
-있냐고요.
“있어요, 있어. 그러니까 좀 재촉하지 맙시다.”
그녀의 뛰어난 연기력으로 그 캐릭터를 잘 살려준다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
YU엔터의 스타 프로듀서 김준민.
소속 아티스트와 매니저들 사이에서 최근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모든 연락과 방문을 거부한 채, 작업에만 매달리고 있었으니까.
김준민 피디가 이럴 때면, 늘 히트곡이 나오곤 했는데.
이번엔 그 시간이 좀 길었다.
그러니 아티스트들이 더욱 군침을 흘리며 기대하고 있을 수밖에.
아직 남자 노래인지, 여자 노래인지, 그룹 노래인지 아닌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었으나.
그거야 편곡을 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누구의 접촉도 마다한 채, 작업실과 집만을 오가던 그는.
마침내,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치고 기지개를 쭉 켤 수 있었다.
“하아···. 일단 만들긴 했는데···.”
영감이 떠올라 만들기 시작한 게, 두 곡이 되고, 세 곡이 되고, 어느새 열 곡이 되었다.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았으나, 이 정도만 되어도 일단 제안을 하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은 유현지에게 제안하기에 그리 괜찮지가 않았다.
그 또한 화장실과 식당, 집을 오갈 때, 사내 분위기가 지금 어떠한 지 알 수 있었으니까.
“이걸 유현지한테 주겠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하려나?”
프리랜서도 아니고, YU엔터와 계약한 전속 작곡가였다.
그렇다고 사내 아티스트들에 어울리게끔 못 만지는 것도 아니며, 군침을 흘리는 아티스트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 회사의, 그것도 기세가 너무 엄청나서 사내 아티스트들을 하나둘씩 다 제껴버리고 있는 괴물 신인에게 주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내가 대표라도 절대 안 된다고 하겠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회사와 전속으로 계약했는데 뭐 어떻게 하겠나.
뒤로 빼돌릴 수도 없으니 당연히 곡은 오픈해야겠지.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그는 다이렉트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김준민은 대표에게 직접 접촉해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볼 위치가 아니었다.
이 회사를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까지 올린 일등공신이기에.
-어, 김프로. 이제 다 완성했어?
다른 이들도 작업하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는데, 그가 모를 리 만무.
김대훈 대표는 밝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네. 완성하긴 했는데··· 음. 일단 이리로 오실 수 있어요? 드릴 말씀도 있고.”
-부탁?
“아뇨, 부탁까지는 아닌데. 되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
-누구 주고 싶은 사람 있나 봐?
역시 척하면 척이다.
그런데, 다른 회사 사람이라는 건 모르겠지.
김준민은 그의 당황한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단 곡부터 들어보세요.”
-지금 일이 있어서, 삼십 분쯤 뒤에 갈게. 괜찮지?
“네.”
전화를 끊은 김준민은 열 곡을 처음부터 차례차례 틀어보며, 머릿속으로 유현지를 곡에 입혀 보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낸 곡들만큼 그녀에게 안성맞춤으로 딱 맞는 곡은 아니었다.
약간, 아주 약간 부족한 정도.
그러나, 좋은 걸로만 따지자면 크게 자신이 있었다.
‘···박한울.’
그리고 만약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있게 된다면.
아주 약간 부족했던 부분마저 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혹시 대본 추천할 거 있어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