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실장님 없으면 작업하기 힘들겠네 >
OTT 최대 공룡 기업, 넷플릭스.
넷플릭스가 한국 컨텐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지도 이미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대박을 터뜨린 주옥 같은 작품들이 몇 개나 쏟아졌고, 지금 역시 수십 개나 되는 작품들이 제작 과정 중에 있었다.
이들이 작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데, 자체적으로 컨텐츠를 개발하기도 하고, 기존에 있는 작품의 판권을 사기도 하며, 제작사에 제작비를 지원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넷플릭스와 벌써 몇 개나 함께 작품을 만들었으며, 지금 역시 만들고 있는 대한민국 최대의 제작사가 있었다.
‘시크 라이트’, 이들은 새로운 작품 제작에 착수했다.
“음. 마땅한 배우 없나?”
이미 제작 결정은 물론, 스태프 구성까지 모두 끝났다.
이제 판이 다 깔렸으니, 그 위에서 뛰어놀 수 있는 배우들을 섭외할 차례.
그러나 캐스팅 디렉터와 감독, 그 외 스태프들은 캐스팅 과정에서 애를 먹고 있었다.
“정감독은 눈 여겨 봤던 친구 없어?”
연차로 돌아가는 바닥인 만큼, 캐스팅 디렉터가 연출 지휘를 맡은 감독에게 반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최현 캐디의 물음에 정수진 감독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눈 여겨 봤던 배우들은 엄청 많죠. 그런데 이 역할을 맡을 만한 친구는 딱히 생각이 나진 않네요.”
넷플릭스에서 지원을 받으며 제작할 때의 가장 큰 장점.
제작비 지원이 아주 빵빵하기 때문에 TV 드라마로 방영할 때 꿈도 꾸지 못했던 장르와 장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방송을 하기에 적합하지 못한 내용과 장면을 다뤄도 괜찮다는 점.
이 두 가지의 장점을 모두 담은 작품이 이 작품이었다.
잔인한 장면이 다수 포함된 액션 스릴러 판타지.
“일단 연기 잘하는 친구들은 많아요. 몸매 좋고 액션 잘하는 친구들도 있고. 그런데 이···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친구가 안 떠올라요. 그렇다고 공개 오디션 보기엔 이름 있는 친구 데려오는 게 훨씬 장점이 크고, 오디션 본다고 해서 꼭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요.”
다른 스태프의 말에 캐스팅 디렉터가 작게 혀를 찼다.
그 말대로,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많은데 이 작품은 분위기가 생명.
특별한 연출 없이 오로지 연기만으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배우들을 찾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으음.”
모두가 침음만 흘리고 있던 그때.
정감독이 고개를 갸웃하며 의견을 냈다.
“혹시 정채희는 어때요?”
요즘 가장 핫한 이름이 튀어나와 모두 고개를 들어올렸다.
국내 관객은 이미 천만을 진작에 넘겼고, 최근에는 해외개봉을 통해 외국인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내고 있는 영화 <더 BAD>의 여주인공.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상승세를 치고 있는 배우였다.
캐스팅 디렉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채희 너무 좋지. 진짜 최고지. 해외에서 반응도 지금 폭발적이잖아. 정채희가 이미 알려진 나라에서는 역시 정채희라면서 아주 난리고, 정채희를 몰랐던 나라에서는 거의 충격과 공포 수준이라니까. 그만큼 외모 좋고 연기 끝내주는 배우도 없어. 아마 비슷한 나이대에서는 정채희가 최고일걸?”
캐스팅 디렉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액션이 안 되잖아···. 다른 거 다 되면 뭐해. 지금부터 액션 배운다고 해도 어설프지 않겠어?”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그래, 아직 모르는 일이긴 한데, 캐스팅 다 결정해놓고 액션까지 배우면서 촬영까지 간다고 해. 그런데 막상 리허설해보니까 영 애매하면 어떡할 거야? 그때 가서 캐스팅 철회할 수도 없고.”
“모든 장면에 액션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서 해당 부분만 집중적으로 연습하면 처음 액션 찍는 배우들도 곧잘 하곤 합니다. 액션 경험 있는 배우로 선택지를 좁히면 오히려 캐릭터도 안 맞고 나이나 외모, 연기력도 애매할 수도 있어요. 차라리 이 경우엔 하루 빨리 캐스팅해서 연습하게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요?”
캐스팅 디렉터는 나중에 가서 액션이 되질 않아 작품의 전체적인 퀄리티가 낮아질 것을 염려하고 있었고, 감독은 액션을 제외하고 다른 부분은 오히려 차고 넘치도록 만족하니, 아직 모르는 일에 지레 겁을 먹지 말자는 의견이었다.
둘의 의견 모두 맞는 말이었다.
캐스팅 디렉터의 경력이 더 된다지만 정감독 또한 경력이 그리 짧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외 다른 것 또한 생각하고 있었다.
캐디의 말마따나 리스크가 있다지만 그건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다.
작품의 퀄리티도 중요한데 자신의 커리어는 더욱 중요하니까.
‘액션 조금 애매하다고 해서 퀄리티가 그리 낮아지는 것도 아니야.’
그에 비하면 정채희의 연기력은 그 단점을 메꾸고도 남을 정도였으며.
지금 영화 <더 BAD>에 대한 해외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정채희를 캐스팅하면 이번 작품 역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정채희로 하자고?”
정수진 감독은 확신을 담아 얘기했다.
“네. 그리고 저희가 원한다고 해서 꼭 캐스팅 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지금쯤 HJ엔터에 작품 엄청 쏟아지고 있을 텐데.”
캐스팅 디렉터는 그런 정감독의 머릿속을 꿰뚫고 있었다.
정감독 또한 자신이 말하지 않은 이유를 캐디가 모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둘 모두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말로 할 필요는 없으니 언급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정감독이 원하면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감독인가. 감독이 강하게 원하면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캐스팅 디렉터는 그녀의 의견에 수긍하기로 했다.
걱정되는 리스크를 말했음에도 감독이 짊어지기로 결정했다면 어쩔 수 없으니까.
더군다나, 정말로 막상 해보면 잘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그래도 액션 안 나오는 장면은 매 장면 하이라이트 확정이겠네.’
캐스팅 디렉터는 그렇게 생각하며 픽 웃었고, 회의는 곧장 다른 캐릭터에 대한 캐스팅으로 넘어갔다.
***
송하연은 이전에 약속한 대로 랩독의 곡에 피처링을 해주기 위해 작업실로 향했다.
곡은 이미 전달받았고, 꽤 마음에 들기도 했다.
원래 힙합에 그리 큰 관심은 없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관심이 생겨버려 힙합만 듣다 보니 이 곡이 얼마나 괜찮은지도 알 수 있었다.
또한.
‘내 목소리에 어울리는 곡이네.’
자신의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피처링을 부탁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겠다.
이러니 작업이 더욱 기대됐다.
힙합에 피처링을 하는 게 처음이기도 하고.
그런데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박한울의 부재.
그와 함께 작업을 했을 때 얼마나 편했는지, 얼마나 만족했는지를 떠올려보면, 오늘 작업은 꽤 피곤해질지도 모르겠다.
‘디렉팅을 얼마나 잘하든지 나한테는 실장님이 제일 잘 맞아.’
그러나 이건 자신의 곡이 아닌 랩독의 곡.
디렉팅은 전적으로 저쪽에 맡기는 편이 더 옳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제안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는데 힘드시진 않으셨어요?”
“괜찮아요. 별로 안 멀어서.”
랩독의 작업실에는 랩독 말고도 다른 이가 있었는데.
그가 속한 크루 ‘새비지’의 프로듀서인 ‘식서브 다이스’였다.
아무래도 오늘 디렉팅은 저 사람이랑 같이 봐주나 보다.
“안녕하세요, 하연 씨. 저번 무대로 팬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연 씨 디렉팅을 봐도 될지 모르겠네요.”
“하하. 괜찮아요. 힙합이 처음이기도 하니까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웃으며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눈 뒤, 송하연은 바로 부스 안으로 들어가 입을 풀었다.
식서브 다이스가 기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준비 다 됐으면 말씀해주세요.”
“다 됐어요. 목은 오는 길에 풀어서요.”
“우선 들어보실래요? 아니면 바로 하실래요?”
“바로 할게요. 처음부터 틀어주세요.”
씨익 웃은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비트를 틀었고.
송하연은 활기차고 신나는 비트에 리듬을 타며 랩독이 미리 녹음한 랩을 들었다.
‘확실히 잘해.’
비트와 랩독의 랩,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
완성될 작품은 자신마저 기대될 정도로 상당히 조화가 잘 맞을 듯했다.
송하연은 박한울 없이 녹음한다는 불편함을 곡에 대한 기대감으로 애써 떨쳐내며 숨을 들이쉬었다.
“괜히 여기서 꾸물대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해. 널 보면 답답해서 내 맘이 아파. 난 네 팬이야. 넌 분명 잘 될 거야. 이건 내 감이야. Boys, Be Ambitious. 내가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야. Boys, Be Ambitious. 내가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야.”
첫 번째 파트의 녹음.
송하연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만약 자신 혼자 녹음했더라면 중간에 끊고 다시 했을 테지만, 일단 저들과 처음 작업해보는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불렀다.
송하연은 부스 밖에 있는 저들을 바라봤다.
역시, 저들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톤이나 호흡이나 음정, 박자 다 전체적으로 너무 좋아요. 되게 깔끔하거든요? 그런데 조금 강조해주셔야 할 부분은 처음 ‘괜히 여기’ 할 때, ‘괜히 여’ 부분이랑 ‘ambitious’할 때, ‘앰비셔’ 부분 뿐이에요. ‘맘이 아’ 부분이랑 ‘팬이야’, ‘감이야’, ‘말이야’ 부분은 따로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좀 물 흐르듯이 평소처럼 노래 부르시던 대로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저들은 자신이 만족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실장님이면··· 바로 알았을 텐데.’
그렇다고 저들의 능력이 모자란 것은 아닐 거다.
그저 신경 쓰는 부분이 좀 다를 뿐일 테니까.
송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다시 틀어주세요.”
송하연은 다시 노래를 불렀다.
저들이 잡지 못하면 자신이 잡으면 그만이다.
“와! 완벽해요! 역시 하연 씨, 최곱니다!”
랩독은 역시 그거라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고, 식서브 다이스는 엄지를 치켜올리며 칭찬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송하연만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해볼게요.”
“···다시요? 아··· 네, 그럼 다시 틀게요?”
“네.”
네 번째 테이크.
“다시 할게요.”
다섯 번째 테이크.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열한 번째 테이크.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만 틀어주세요.”
이런 부분이다.
항상 작업을 할 때, 예민해지고 까칠해졌던 이유가 자신에게 만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박한울과 함께 편하게 작업하며 성격이 굉장히 유해졌다고 느꼈는데, 그 없이 작업하니 다시 그가 없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다시-“
“저··· 하연 씨.”
부스 너머 저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환한 미소가 띠워져 있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빛에선 감탄과 존경이 조금씩 묻어나고 있었다.
“저희가 듣기엔 너무 완벽했는데 어느 부분이 별로였던 것 같아요? 맘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거기만 부르시는 게 어때요? 통으로 부르지 않고 끊어서 부르셔도 되는데. ”
옛날이야 통으로 녹음했다고 하지만 요새는 한 글자씩 녹음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떨 땐 호흡만 따로 녹음하기도 할 만큼 아주 세세하게 녹음을 진행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느낌이 조금 안 사는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갈게요.”
그러나 송하연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건 전체적인 부분.
저들은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는 이러한 모습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임의로 계속 딜레이하는 건 저들에게 민폐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송하연은 답답한 마음과 더불어 미안한 마음까지 겹겹이 쌓여가고 있었다.
"네. 그럼 다시 틀겠습니다."
송하연은 눈을 지그시 감고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2% 부족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스스로 내건 합격점은 넘었다.
송하연은 크게 감탄하며 자신을 보고 있는 저들에게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어떻긴요. 다 너무 좋았어요.”
“완벽했어요. 평소에도 이렇게 작업하시는 거죠? 역시 이러니까 최고가 될 수밖에 없죠. 통으로 부르는데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지?”
그녀는 민망한 듯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깐깐했죠?”
식서브 다이스가 거세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뇨. 저희 곡에 이렇게 최선을 다해주시면 저희가 더 감사하죠. 시간은 신경 쓰지 마시고 원하시는 대로 해주세요. 그리고 고작해야 테이크 열세 번밖에 안 됐어요. 처음부터 너무 잘하셔서 더 길게 느껴진 거지, 이 정도면 진짜 엄청 짧은 시간에 한 거잖아요.”
“···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이미 박한울과의 작업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무의식 중에 열세 번도 너무 많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그와 함께 작업했더라면 대부분 다섯 번 안에 끝이 나니까.
‘···이제 실장님 없으면 작업하기 힘들겠네.’
처음 그와 만났을 당시, 정규 앨범 작업에 애를 먹고 있을 때처럼.
어쩌면 그 없이는 앞으로도 완전히 만족할 만한 앨범은 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이 짧은 파트조차, 그녀에게는 100% 만족스럽지 않았으니까.
‘앞으로도 여유는 가지면 안 되겠구나.’
송하연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와 언제까지고 평생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당장 내년에 그가 갑자기 직장을 관둘 수도 있다.
아니면 그가 팀장으로 승진하며 팀이 다시 개편된다거나.
‘그러니까 있을 때 해야 돼.’
그가 자신의 옆에 있을 때.
최대한 퀄리티 높은 곡을, 최대한 많이 뽑아내야 했다.
정말로 언제나 같이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회사를 그만둔다거나, 회사 내 사정은 그렇다 치고.
사람 사이에, 그리고 남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기도 하고.
< 이제 실장님 없으면 작업하기 힘들겠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