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너무 제 뜻대로 했죠? >
원작 웹툰 에는 아주 많은 캐릭터가 나온다.
몇 년간이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해왔다는 말은 곧, 몇 년 동안이나 작품을 끌고 갈 힘이 있다는 것.
이는 적은 수의 캐릭터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인 드라마와 달리, 이 드라마는 원작의 팬들을 고려해야 하는 만큼 드라마에서 또한 웹툰의 ‘모든’ 캐릭터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캐릭터를 넣을 수밖에 없었는데.
애매한 캐릭터를 빼는 것도 신중을 기해야 하고, 스토리에 맞춰 꼭 넣어야 할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할 수 있게 징검다리가 되는 역할도 넣어야 했다.
말은 복잡하지만 어쨌든 단역도 많고 조연도 많다는 것.
그 많은 역할들 가운데서도 비중과 매력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여기.
그리 고퀄리티의 연기를 요하지 않는 역할을 맡은, 오로지 비주얼 싱크로율 덕분에 캐스팅된 여배우 박지수가 있었다.
“아니, 김혜진이 불륜으로 나가리될 거 알았으면 이 역할 안 했지.”
그녀는 대본 리딩장으로 가는 내내 매니저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가능, 불가능의 여부를 떠나, 심민정이 따낸 ‘민유정’ 캐릭터가 자신이 맡은 역할보다 매력과 인기 측면에서 훨씬 더 높았으니까.
비록 원작은 보지 않았지만 인터넷의 반응을 보면 이런 건 쉽게 알 수 있는 일.
박지수는 김혜진의 기사가 터진 뒤로, 자신이 맡은 캐릭터가 영 불만스러워졌다.
“하고 많은 역할 중에 악역이 뭐야, 악역이.”
비중이 그리 적지도 않고, 작품도 잘될 게 확실하기 때문에 캐스팅을 넙죽 받아들였지만.
김혜진이 불륜으로 떠내려가서 심민정이 배역을 맡게 된 건 배가 아팠다.
“오빠, 심민정 걔 꼴에 연예계 선배라고 나 후배 취급하지는 않겠지?”
“선배 맞잖아. 그리고 네가 선배 대우를 먼저 해줘야 사람들이 널 좋게 봐.”
“아니 연기로는 내가 선배 맞잖아!”
“비중이 없긴 해도 드라마에서도 걔가 먼저 데뷔하긴 했어. ‘자연스러운 척 치밀하게’ 몰라?”
박지수는 얼굴을 찡그리며 매니저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매니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 삐뚫어지는 버릇을 고쳐놓으라는 말을 팀장님에게 들은 상황.
그는 적어도 스텝들 앞에서만큼이라도 그녀가 가면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야, 너 기싸움 같은 거 꿈도 꾸지 마라. 그냥 최대한 착하고 예의바른 척해. 특히 오늘은 비하인드 촬영도 한다니까 더 조심해야 돼.”
“알아. 내가 무슨 바본 줄 알아?”
박지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연기가 그리 출중하지 않다는 것을.
어차피 김혜진이 없었더라도 자신이 그 역할에 캐스팅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단지, 그냥 좀 배가 아파서 매니저에게 토로한 것일 뿐이었다.
이런 걸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가.
항상 옆에 붙어 있는 매니저에게라도 말해서 감정을 털어버려야지.
박지수는 짧게 혀를 차고는 다시 대본을 살피기 시작했다.
***
대본 리딩장.
배우들끼리 친분이 있지 않아서 그리 화기애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쁜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와 대화를 나누고, 감독님이나 대표님 등 핵심 제작진들까지 모두 들어오자 비하인드 카메라가 켜졌다.
나는 일부의 매니저들과 함께 구석에 서서 대본 리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처음 시작은 주인공 ‘김만수’와 그의 주변 인물들부터.
심민정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뒤쪽에 있었다.
‘이 정도면 꽤 괜찮네.’
나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작사는 배우들을 연기력만 보고 뽑은 게 아닌 듯, 연기력이 특출난 이는 거의 없었으나.
그렇다고 연기가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이미지 싱크로와 연기력을 모두 어느 정도 만족시키는 적절한 선에서 배우들을 고른 모양.
예외라면 심민정, 그녀뿐인 것 같다.
오디션 현장에서 그녀보다 싱크로율이 높은 이들은 많았으나, 그녀는 싱크로의 부족함을 연기력으로 완전히 커버해버렸으니까.
그렇게 무난하게 펼쳐지는 연기 속에서, 대본은 점차 진행되었고.
주인공 김만수가 본격적으로 인터넷 방송인의 뛰어든 시점이 되었다.
이제부턴 심민정과 다른 인터넷 방송인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하는 때.
마침내 심민정이 연기할 때가 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박혔다.
‘어디 얼마나 하나 보자.’라는 듯 거만한 눈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고, 기대, 혹은 걱정과 의심의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이미 오디션장에서 그녀의 연기를 본 핵심 제작진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 눈을 반짝거리며 한껏 집중을 끌어올린 표정이었다.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할게요. 오늘 뱅송 알찼다. 그쵸? 내일 방송은 여덟 시에 킬 건데, 늦을 수도 있음. 난 분명히 말했어요? 늦을 수도 있다고. 여덟 시에 킬 수도 있고 안 킬 수도 있으니까 그냥 참고만 하시라고. 큭큭.”
눈매는 나른하고, 눈빛은 총명하다.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지만 귓가에 쏙쏙 박히게 또렷하다.
그녀는 시청자들과 장난을 치듯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대사를 내뱉었다.
작중, 그녀의 집에서 이뤄지는 독백 씬.
이 씬에서 함께 연기할 사람이 없다 보니, 모든 배우들의 시선까지도 그녀의 얼굴에 꽂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자신의 연기를 평가하는 눈초리들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정말 집에 혼자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이기만 했다.
“내일 마인 크래프트 하냐고요? 배경화면 달력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해서 그게 공식 일정은 아니에요. 그냥 내가 적은 거야. 이때 이걸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적은 거라고. 문제 있어? 내가 그냥 적어놓고 싶어서 적어놓은 건데 왜. 아무런 문제없지? 그러니까 내일 다른 거 한다고 막, ‘에? 왜 마크한다고 해놓고 다른 거 해?’ 이러지 마세요? 오케이? 오케이. 그럼 진짜 오늘 방송 끝!”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나는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려던 것을 겨우 참아냈다.
모두가 정말로 그녀의 방송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으니까.
연기를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려던 이들의 얼굴마저도 지금은 그녀가 연기를 시작하기 전과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불과 1분도 되지 않아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휘어잡아버린 것이다.
채희처럼 강렬하게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상황에 스며들어 몰입할 수 있게끔.
어쩌면 상황에 따라서 이게 더 무서운 재능일지도 모르겠다.
“같이 합방할 사람 없나. 슬슬 새로운 그림 좀 만들어야 하는데.”
그녀의 독백 연기가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정신 못 차리고 계속 그녀의 연기에 스며들어 있었고.
씬이 모두 끝나자, 그제서야 몰입에서 빠져나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만약 원작이 따로 없었으면, 나는 여기서 확신했을 것이다.
그녀의 분량은 앞으로 급격히 늘어나리라는 것을.
그런데 원작이 있으니 그건 안 되겠지.
‘아쉽긴 해도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어.’
다만, 굳이 분량이 아니더라도, 제작진의 임의에 따라 임팩트는 다르게 들어갈 수도 있다.
난 핵심 제작진들의 표정을 슥 살펴봤다.
역시나.
나는 감독님과 대표님, 그리고 각색 작가님과 메인 카메라 감독님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나오는 장면들은 모두 하나같이 제대로 뽑혀나올 거라는 것을.
***
대본 리딩 중에 가진 잠깐의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던 심민정의 옆으로 박지수가 다가왔다.
박지수는 싱긋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민정 씨 연기 잘하시네요?”
“아, 감사합니다.”
심민정도 같이 칭찬해줄까 하다가, 연기 경력은 저쪽이 더 많으니 그냥 칭찬만 감사히 받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데 너무 어깨에 힘 들어가 있더라. 리딩이 처음이라 그럴 수도 있는데, 원래 그렇게 막 실전처럼 하진 않아요.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참고하시라고. 혹시···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심민정은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 칭찬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의 내용은 상냥하게 조언을 건네는 거지만, 뉘앙스와 태도에서 속을 살살 긁으려는 의도가 훤히 보이고 있었다.
거기다 나이나 데뷔나 자신이 위인데 은근슬쩍 반말도 섞고.
지금 이 순간, 심민정의 머릿속으로는 몇 가지의 선택지가 파바박 떠올랐는데.
아까 매니저가 해준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민정 씨, 오늘은 힘 좀 줘야 할 거예요. 대본 리딩이라고 힘 뺄 필요 없어요. 출연진 중에 누가 살살 하라고 해도 연기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런 조절 잘 못 한다고 해버려요.
리딩장으로 오며 차에서 그는 가만히 있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심민정은 굳이 그럴 생각이 없었다.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그의 의도는 안다.
혹여나 주눅 들까 봐 걱정해서 한 말이겠지.
그런데 주눅 들기는커녕 화나지도 않고 귀엽게 보이기만 한다.
그러니 오히려 앞으로를 생각해서라도 품고 가는 편이 좋겠지.
심민정은 꾸며내지 않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아무 타격 없이 돌아와 다시 진행된 리딩에서.
심민정은 쉬는 시간 전에 보였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집중력을 보이며 연기에 최선을 다했다.
박지수는 자신의 말을 완전히 무시당한 것에 열이 뻗쳤는지, 아니면 연기에 눌렸는지, 이전보다 더욱 집중을 하지 못 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럴수록 심민정은 더욱더 좋은 모습만을 보여줬다.
그리고 리딩이 모두 끝났을 때.
심민정은 박지수에게 다가가 대뜸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혹시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번 주 안에 밥이라도 한 번 먹어요.”
“···.”
심민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박지수.
그녀는 핸드폰을 건네받고는 천천히 번호를 찍었다.
“···이번주는 바빠서 안 돼요.”
“그럼 다음주에 먹죠 뭐. 제가 먼저 연락드릴게요.”
박지수는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리딩장을 빠져나갔다.
***
리딩이 모두 끝나고 돌아가는 길.
나는 심민정을 흘끗 보며 은근하게 물었다.
“박지수 배우랑 번호 교환했어요?”
“네.”
해맑은 미소를 보이는 그녀.
나는 그 미소를 슬쩍 보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죠?”
언뜻 보기에 뭔가 분위기가 묘했었다.
이는 자신만 느낀 게 아니었다.
아까 뜬금없이 번호를 물으며 밥을 먹자고 하는 심민정을 많은 이들이 쳐다봤었다.
번호를 건네주고는 휙 나가버린 박지수의 분위기도 좀 이상했고.
그런데 역시나.
내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묻자, 그녀는 아까 있었던 일들을 모두 실토하며 덧붙였다.
“실장님이 애써 조언해주셨는데 제가 너무 제 뜻대로 했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기만 했고.
나는 그 밝은 목소리가 왠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멘탈적인 측면에서 나보다 오히려 성숙하구나.
하긴,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도 그러했다.
분명 연예계에 싫증을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갔었는데, 그녀에게서 나타난 반응은 한없이 희망적이고 긍정적이기만 했었지.
나는 빨간불에 브레이크를 밟고선 그녀의 눈을 잠시 빤히 바라봤다.
"잘했어요. 그게 더 낫겠네. 밥도 맛있게 먹고요."
그녀의 얼굴 전체에 화사한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그리고 그녀는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실장님이 연기 칭찬부터 먼저 해주실 줄 알았는데. 오늘 연기는 좀 별로였나 보다."
칭찬을 바라는 말에 픽, 웃음이 튀어 나왔다.
그건 하루종일도 해줄 수 있는데.
"연기 좋았어요. 민정 씨 연기하는 거 보면 원작 팬들도 원래 캐릭터는 머릿속에서 잊혀질걸요?"
"에이.... 음.... 그렇죠? 그만큼 잘하긴 했죠? 솔직히 가능성이 없진 않다."
리딩장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리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역시, 우리의 입에선 웃음이 마르지 않았다.
***
제작사 '고려 스튜디오'의 임대표와 윤형진 감독은 해물탕 가게에서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까 있었던 대본 리딩에 무척이나 만족해하는 듯, 그들의 입에서는 연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당연하게도 오늘 보여준 배우들의 연기.
중심은 역시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였던 심민정이었다.
임대표는 말했다.
"연기도 연긴데, 인성도 좋은 모양입니다."
심민정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기에 그가 누구를 두고 얘기하는지는 분명했는데.
윤형진 감독은 의아함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인성이 좋은지는 어떻게 아십니까?"
임대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우리 직원이 화장실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심민정과 박지수가 화장실에서 했던 대화는 제작사 직원의 입을 타고 그대로 위에 전해졌고, 그 말은 다시 임대표에게, 그리고 다시 이 자리에서 나왔다.
윤형진 감독은 그의 말을 듣고 눈빛을 빛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버틴 거겠죠. 뚝심이 있는 사람은 역시 다르네요."
"그렇죠. 뚝심이 있죠. 이 바닥에서 쓴맛만 봤을 텐데 새로운 분야로 다시 도전해서 이렇게 잘해내니. 적어도 촬영하면서 스탭들 피곤하게 하거나 멘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둘은 그렇게 술잔을 한잔씩 기울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단지 오늘 리딩에 대한 감상만 말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리딩을 보고 내린 앞으로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한 자리.
감독과 대표는 이렇게 하는 게 어떤지, 혹은 저렇게 하는 게 어떤지, 기탄없이 말하며 의견을 조율했는데.
심민정에 대해서는 완전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원작 때문에 분량 조절은 못 해도 비하인드나 다른 매체에 노출할 때 집중적으로 조명하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 그리고 심민정 배우가 나올 땐 연출적으로 힘을 주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심민정이 나올 때는 그녀가 가진 연기력에 맞게 힘을 팍팍 실어주기로.
둘은 이 자리에서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분량 조절은 못 해도, 힘을 주거나 빼는.
임팩트 조절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 제가 너무 제 뜻대로 했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