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87화 (87/170)

< 채희의 팬미팅 >

서울 신촌에 있는 대학교의 대강당.

오늘은 채희의 첫 번째 팬미팅 날이었고, 우리는 이날 팬들에게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만족감을 주기 위해 많은 준비를 마쳤다.

“역시 몸매가 좋으니까 태가 사나 봐요. 그쵸?”

요리조리 몸을 돌려보며 대기실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채희.

그녀는 흰 티와 청바지를 입고선 생머리도 자연스럽게 풀어헤쳐놓고 있었다.

메이크업 또한 가볍고 자연스럽게 하며 청순한 매력을 한껏 살려 놓았기 때문에 팬들이 가까이서 보면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고 볼 것 같았다.

"응. 태가 사네."

나는 그녀에게 대충 대답하곤, 그녀의 부모님께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오늘 팬미팅에 참석하기로 해서.

원래 오시는 건 계획에 없었던 건데, 내가 직접 전화를 드려서 오시라고 말씀드렸었다.

“부모님 있으면 창피한데···.”

말로는 창피하다고 하지만 이러다가 또 막상 부모님이 안 온다고 하시면 입술이 댓발 튀어나오겠지.

-여보세요.

“예, 아버님. 어디쯤이세요? 제가 마중나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니에요. 어차피 지금 할 것도 없어요. 혹시 거의 다 도착하셨나요?”

지금은 팀장님이 된 한팀장님이 한실장님이던 시절, 나와 한실장님은 채희와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에 놀러갔었다.

반딧불이가 참 예쁘면서 징그러웠지.

아무튼 그때 이후로 종종 찾아뵀어야 했는데 너무 바쁜 나머지 잘 챙겨드리지 못했다.

심지어 딸 역시.

채희도 영화 개봉날 나와 함께 영화를 보고, 부모님과는 다음날에 갔다고 하니까.

“아, 주차장이요?”

난 채희에게 밖에 갔다 온다고 눈짓하며 대기실을 빠져나왔고, 몇 분 뒤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 대기실로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엄마, 아빠. 나 어때? 이뻐?”

저 봐라. 부모님 오시니까 저렇게 기분 좋아할 거면서 무슨.

채희의 아버지께서는 채희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내 손을 꽉 잡으며 말을 건네셨다.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계속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던 걸 다시 하시나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이제 채희는 연기만 시켜도 되겠죠? 저런 모습 보이면 별로 이득 될 것 같진 않은데.”

“아빠!”

포즈를 잡으며 푼수처럼 자화자찬하던 채희가 미간을 좁히며 소리 냈다.

그런데 아버님은 아시나 몰라.

저런 모습을 보며 빠진 팬들도 많다는 것을.

그리고 채희의 팬들은 오히려 저런 모습을 보는 걸 되게 좋아한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요즘에는 자신을 감추거나, 일부러 단아하고 품격 있는 모습만을 꾸며내 보여주는 건 먹히지 않는 추세기도 하고.

난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오늘 팬미팅에서 준비한 것도 좀··· 저런 모습이기는 합니다.”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춤춰야 하는 음악에 그렇지 못한 댄스를 선보일 예정이고, 웃음을 자아낼 만한 성대모사와 하찮은 개인기를 할 예정이었다.

거기다 스크린에 틀어줄 VCR마저도 그런 식으로 찍었었다.

물론 진지한 VCR도 있기야 하다만.

“으음. 매니저님이 그렇게 준비하신 거면··· 다 뜻이 있으시겠죠.”

아버님은 채희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저번에 제주도에서 그녀의 부모님이 보내주신 신뢰가 책임감이 되어 어깨를 무겁게 했다면, 영화가 순풍에 돛 단 듯 슝슝- 나아가고 있는 지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이영진 감독의 영화를 앞지르는 걸 넘어, 지금은 700만을 코앞에 두고 있었기에.

나는 절로 어깨가 으쓱여졌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녀의 부모님은 미리 대강당에 가 계셨고, 우리는 시작 시간에 맞춰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이미 대강당 안에는 팬들로 가득 찬 상태.

대강당이 그렇게 크지 않아 그리 많은 인원을 수용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기에 팬들은 더욱 가까이에서 그녀를 볼 수 있을 터.

아마 지금쯤 두근두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나와 채희는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이제 곧 시작될 때가 되니, 그녀는 부모님이 보신다는 것에 창피해하는 것을 잊고, 오직 팬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굉장히 설레하기만 하는 듯했다.

팬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가수들과는 다르게, 배우인 그녀는 팬들을 이렇게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오빠, 저 진짜 심장 튀어나올 것 같아요. 우리가 준비한 거 팬들이 다 좋아해주시겠죠?”

“당연하지. 무조건 좋아해주실 거야.”

이곳에 온 팬들은 그녀가 뭘 해도 좋아해주실 거다.

심지어 노래까지도.

내 귀에게 미안할 정도의 실력인 데다가,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어서 빼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댄스나 기타 등등을 잘한다는 건 아니었는데, 확신컨대 팬들은 정말로 기쁘게 즐길 것이다.

“후우.”

마침내 대강당 안, 무대 뒤쪽에 들어선 우리.

아직 팬들에게 우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섭외한 MC는 먼저 무대 위로 올라가, 쉴 새 없이 말을 내뱉고 있다.

간단한 농담과 말재간으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던 그는 우리가 도착한 걸 힐끔 보고는 본격적인 진행을 시작했다.

이제 곧 무대 위로 올라갈 그녀.

이미 팬들을 볼 생각에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미소 짓고 있었다.

첫 번째 순서는 팬들이 직접 적은 포스팃으로 진행하는 Q&A.

그 다음엔 미리 찍어둔 VCR을 함께 보고, 개인기와 성대모사, 댄스 등 장기자랑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마치고는 바로 사인회.

최소 세 시간에서 네 시간까지 소요되는 과정이었다.

“재밌게 놀다 와.”

“네.”

그녀는 사뿐사뿐 가볍게 걸어 무대 위로 올라갔다.

***

Q&A.

포스트 잇에 질문들이 적혀 있는데, 그중에서 말하고 싶은 질문들을 뽑아 대답하는 코너.

스툴에 앉아 질문들을 살피던 그녀는 어떤 걸 발견하곤 씨익 미소 지으며 포스트 잇을 떼어냈다.

오늘의 TMI, 최근 가장 맛있게 먹은 것, 이런 질문들보다는 좀 더 팬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번에 영화 촬영하면서 가장 재밌었을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이네요.”

채희는 한눈에 들어오는 팬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모두 미소를 머금고 있고, 눈빛에서는 진한 애정이 느껴진다.

“인터뷰 같은 데서 비슷한 질문들을 정말 많이 받았었는데, 사실 그런 곳에서는 영화랑 관련된 얘기를 하는 게 좋잖아요. 그래서 정말 재밌었던 걸 얘기하지 못했었는데···.”

귀를 쫑긋 기울이며 듣고 있는 팬들.

그녀는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대본 연습할 때, 우리 매니저 오빠가 여자 캐릭터 역할 해줄 때가 제일 재밌었어요. 사실 일부러 연습 잘 안 된다고 조를 때도 있어요. 연기를 어떻게 하는 줄 알아요? 다들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죠? 그 얼굴로 막-“

신이 나서 말을 쏟아내자, 흐뭇하게 바라보던 팬들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종종 웃음이 터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MC는 짓궂은 미소를 보이며 이런 말을 했다.

“그럼 또 안 볼 수가 없죠? 매니저님, 어디 계시나요.”

“어! 도망간다! 그러면 안 되죠! 빨리 와요!”

그녀의 말에 뒤로 돌던 매니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무대 위로 터덜터덜 올라와 재연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팬들이 보고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어색하고 경직된 연기.

그녀와 팬들은 그 모습을 보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정채희···. 팬미팅이 천 년 만 년 이어지지는 않아.”

“여러분! 여기요! 이 사람이 저 협박해요!”

팬들과 함께 있으니 가수들이 왜 무대를 그렇게 고집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연기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짜릿함.

그녀는 이어지는 VCR 시간에도 색다른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미리 찍어둔 것인데도 불구하고, 팬들이 즐거워하는 웃음 소리가 들리니 자신 역시도 즐거워지며 웃음이 터져 나온다.

영화관에서와는 다른 느낌.

일부러 코믹하게 찍기를 잘했다.

팬미팅이 모두 끝날 때쯤엔 진지하게 찍은 영상도 나올 테니 부족함도 없을 테고.

그리고 이어진 대망의 장기자랑 시간.

그녀는 대기실에서 의상을 갈아입고 무대 위에 섰다.

“우와아아!”

“채희야!”

지금까지 중에 가장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강당 안에 그리 많은 인원들을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호성 소리는 거의 일당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의상은 딱 봐도 아이돌 의상.

그리고 헤어 역시 길게 풀어헤친 스타일이 아닌, 높게 질끈 묶여 있었다.

그녀는 열띤 팬들의 함성 속에서 뒤로 돌아 포즈를 취했고.

이내, 유현지의 데뷔곡 <구름 위의 꿈>의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곡의 정체를 알고 숫제 괴성 같은 함성을 내지르고 있는 팬들.

채희는 어수룩한 실력으로 춤을 모방했다.

양쪽 어깨가 위와 앞, 뒤를 번갈아 빠르게 움직이는 동작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으쓱이는 동작으로 대체된다.

원곡의 그 화려했던 퍼포먼스가 지금은 율동으로 바뀌었으나, 팬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띠고 이 시간을 즐길 뿐.

3분 30초의 시간이 흐르고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마이크를 잡고 물었다.

“어때요? 솔직히 얼마 안 배운 것 치고는 재능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질문에 팬들은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마치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 커다랗게.

“네! 아이돌 데뷔하자!”

“천재 같아요!”

채희는 역시나, 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재능만 믿지 않고 연습도 열심히 했어요. 무대 괜찮았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만 진심이었던 콩트까지 끝이 나고.

이어진 성대모사와 개인기.

그녀는 드라마와 영화의 명대사들을 일부러 코믹스럽게 오버하며 따라했다.

사실 댄스도 코믹의 일부였는데 그건 아마 본인은 모를 터.

사인과 더불어 또다른 VCR까지.

팬미팅은 성황리에 끝이 났고.

그녀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연기할 땐 그렇게 떨렸었는데, 저 아무래도 가수 체질인가 봐요. 진짜 아이돌 했으면 더 일찍 성공했을 수도?”

나와 함께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아버지.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뒤풀이는 하십니까?”

“당연히 해야죠, 아버님.”

채희의 말에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다른 이들이 전부 잘나가고 있을 때, 비상할 날을 기다리며 아직 웅크리고 있는 이도 있었다.

심민정.

오늘 그녀와 함께 웹툰 원작의 드라마, 의 대본 리딩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샵에 다녀왔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꽤 이질적이었다.

아직 연기가 대중들에게 증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그녀에게 품은 기대감은 무럭무럭 자라나기만 하고 있었으니까.

모두 우리 팀의 아티스트들이 엄청나게 잘나가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는 양날의 검.

잘하면 역시, 라며 찬양을 받을 테고, 반대라면 모진 폭풍이 그녀에게 휘몰아칠 것이다.

이를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저주를 퍼붓는 건지.

그녀의 실력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내는 기사들이 점점 나오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걸 오늘 증명해볼 생각이었다.

이 대본 리딩 영상은 얼마 뒤에 바로 유튜브에 올라갈 예정이라 하니까.

“민정 씨, 오늘은 힘 좀 줘야 할 거예요. 대본 리딩이라고 힘 뺄 필요 없어요. 출연진 중에 누가 살살 하라고 해도 연기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런 조절 잘 못 한다고 해버려요.“

“알겠어요.”

“그리고 누가 애드리브로 처리해버리면 절대 당황하지 말고 아무 소리나 해버리세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그렇게라도 하는 게 나아요. 애드리브가 이상하게 나와도 처음 시작한 사람 잘못이 되니까요.”

대본 리딩에 참여하는 게 처음이라 노파심에 말하고는 있는데.

내 말을 듣고 있는 그녀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게 보였다.

하긴, 그녀 또한 이 바닥에서 7년을 굴렀으니 이러한 자잘한 신경전 같은 건 이골이 나 있겠지.

오히려 나보다도 훨씬 더 잘 대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딱 비아냥을 듣기 좋은 포지션 아니었나.

한 명만 떠버린 걸그룹의 병풍 멤버.

“···다 알아도 일단 귀담아 들으세요. 드라마 쪽이라서 유형이 다를 수도 있잖아요.”

“에이. 좋아서 그런 거예요. 걱정해주시는 게 고마워서요. 저 정말 귀담아듣고 있었는데, 한 번 말해볼까요?”

그녀는 아예 대놓고 웃음을 띠며 내가 방금 전에 했던 말들을 되풀이했다.

여유가 딱 보이는 게, 누가 이 사람을 처음 대본 리딩하는 사람이라고 보겠어.

그녀에게는 중고 신인이라는 말도 퍽 어울리는 것 같았다.

“더 걱정해주셔도 돼요. 저 정말 좋아서 웃은 거라니까요? 화나신 거 아니죠?”

“화는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살짝 서운하셨나? 저 웃음을 잘 못 참아서요. 하하!”

“서운하지도 않았어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역시 긴장한 기색 따위는 없다.

송하연보다도 훨씬 선배니 더 말해 뭐하겠나.

우리는 그렇게 차 안을 웃음 소리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가득 채우며 대본 리딩 현장으로 나아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것도 이제 걱정 없고, 연기에 있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예 걱정이 되지 않았으니.

우리는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즐겁기만 했다.

< 채희의 팬미팅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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