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86화 (86/170)

< 본격적인 시작점 >

추석은 언제나 어른들의 잔치다.

남자 아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또래가 없는 큰집은 정말 할 게 핸드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전라북도 김제시.

기차역이 있는 곳만 해도 상가도 있고 피시방도 있던 것 같은데 이곳 도장리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소들과 개, 닭, 그리고 논만 있다.

“···.”

더군다나 더욱 괴로운 건 식사 시간.

그나마 방구석에 있을 때는 핸드폰이라도 하지, 밥을 먹을 때는 그마저도 못 하게 한다.

어른들이 틀어놓은 TV 채널에서는 너무 재미없는 것들만 하고.

다른 거 보고 싶은데 그러자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저녁 시간에는 달랐다.

어른들에게도 인기 있는 프로그램, ‘우리의 컨텐츠’가 틀어져 있었으니까.

“저거 재밌더라. 저번에 이창호 나올 때 진짜 웃겨가지고. 하하하!”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하건, 아이는 TV에만 집중했다.

이성호, 정채희, 송하연, 유현지.

굉장히 화려한 라인업인 데다가 선공개 영상도 재밌게 봤었기 때문에 얼마간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특별 게스트로 샴페인 노바가 나온다고도 하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평소에 연예인에 그렇게 큰 관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 누구보다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민지 언제 나와]

[응 샴페인 노바 마지막에 5분밖에 안 나와~ 유현지만 나오면 됐지 ㅈㄴ귀엽네 진짜ㅋㅋ]

[ㅅㅂ]

단톡방에 올라오는 채팅을 보니 친구들도 저걸 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워낙 연예인에 관심도 없고 항상 게임이나 인터넷 방송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저 연예인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이 서로 어떤 사이인지는 자세히 몰랐다.

그저 예쁘고 귀엽고 실력 좋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런데 친구들은 이런 것까지 잘 아는 모양이다.

[야 저거 유현지가 샴페인 노바 도와주는 거임. 저번에 샴페인 노바가 비하인드에서 한 번 불렀었잖아. 그거 때문일 듯. 지금은 유현지가 훨씬 더 잘나가자나]

[응~ 개소리~ 도와주긴 무슨. 그냥 연습생 같이 했어서 아는 거지. 그리고 친해진 건 저번부터임ㅇㅇ]

[유현지가 도와주는 건 맞음]

[ㄲㅈ]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알겠다.

지금 TV에서도 둘의 관계가 나오긴 했지만 저렇게 자세하게는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부터는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수야. 밥 먹어. TV 좀 그만 보고.”

“네.”

진수는 TV에서 잠깐 시선을 떼고 숟가락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러나, 입은 꼭꼭 밥을 씹으면서도 눈과 귀, 정신은 TV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밥을 다 먹은 뒤, TV에서 이어진 연습실에서의 장면들은.

인터넷 방송과 게임만을 좋아했던 아이의 취향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2시간 20분 동안 꼼짝도 안 하고 TV만 본 진수는 방송이 끝나고 단톡방에 이러한 톡을 보냈다.

[나 오늘부터 유현지 팬 한다.]

[ㅅㅂ 너마저 이러냐? 샴페인 노바 개쩐다니까?]

[ㅇㅇ 걔네도 괜찮더라. 착하고 이쁨. 근데 유현지가 더 착하고 이쁨. 그리고 춤도 ㅈㄴ잘 춤 ㅅㄱ]

***

부모님과 누나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홀로 남은 집안.

본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어야 할 이찬영은 일진들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자퇴를 선택했다.

“이 상태로 친척들을 어떻게 봐.”

친척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예상이 가고, 뒤에서 뭐라고 할지 너무 뻔하게 그려져서 절대로 큰집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추석을 보내게 된 찬영은 언제나 그렇듯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했다.

검정고시 공부는 이따가 해도 괜찮다.

“아니면 추석 끝나고 해도 되고.”

찬영은 그렇게 게임에 빠져들었다.

아무런 간섭도 없고, 누구 하나 괴롭히지도 않고, 아프고 수치스러울 일도 없는 게임 속 세계는 찬영에게 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임을 할 때는 괴로웠던 기억도 떠오르지 않기도 하고.

타타닥-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며 보스 레이드를 마치고.

뿌듯한 마음으로 미소 지으며 기지개를 켰는데.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나며 허기짐이 몰려왔다.

이제 레이드도 끝냈겠다 밥이나 먹자며 부엌으로 온 그는 자연스럽게 TV를 틀었다.

“타이밍 딱 좋네.”

TV에는 마침 송하연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의 컨텐츠> 추석특집.

그는 TV를 보며 국과 반찬, 밥을 식탁에 차렸고.

계속 TV를 보며 식사를 시작했다.

혼자였지만 괜찮다.

가족들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과 화를 쏟으며 큰집에 갔지만 괜찮았다.

형이 자신을 한심하게 보며 무시하지만 괜찮았다.

어떤 취급을 당하던, 자퇴를 하기 전보다는 백 번 나았으니까.

‘역시 자퇴하길 잘했어. 진작 이렇게 할걸.’

요즘엔 검정고시로 졸업해도 그렇게 문제 없다는데 왜 그렇게 학교에 매달렸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음식을 목구멍에 수월하게 넘기며 TV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목이 메여오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꼭 이겨내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 강해질 필요는 없어.

─꿈이 없어도 괜찮아. 모두가 꿈을 이루는 건 아니니까.

─아프고 힘들 때면 여기로 와서 기대. 잠깐 쉬어가도 괜찮아.

TV에서는 여전히 송하연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쓴 가사와 그녀의 따스한 목소리가.

그리고 그 포근한 표정과 눈빛이.

목을 메이게 하여 밥을 잘 넘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던 중, 갑자기 한순간에 깊숙한 곳에서부터 감정이 울컥, 복받쳐 올라왔다.

눈이 뜨거워지며 눈앞이 흐려진다.

눈물이 차오른 것.

그는 수저를 놓지도 못하고 그렇게 뿌연 시야 사이로 TV를, TV속 송하연을, 그녀가 건네주는 위로를 똑똑히 바라봤다.

“끄흑!”

꼴사납게 울음을 터뜨리기 싫어 소리를 꽉 막아보는데, 오히려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더욱 울컥이는 감정을 부추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은 한심한 패배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고마웠다.

***

방송이 끝나고, 반응은 곧바로 올라왔다.

[이성호&정채희, 연기 괴물들 환상케미! 관객수 탄력 붙나?]

[유현지와 샴페인 노바의 댄스 영상, 업로드하자마자 화제.]

[송하연 “위로하고 싶었어요.” 학생들 울리다. 커뮤니티 폭발!]

[<우리의 컨텐츠> 추석 특집 대성공.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화려한 만찬.]

기사들이 우후죽순 쏟아졌고,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기사들의 몇십 배나 되는 글들이 올라왔다.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나는 그 반응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송하연이 어째서 혼자 하겠다고 했는지 이제서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진솔한 마음을 담은 곡에 다른 사람의 개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시청자들에게 있어 천지차이 만큼이나 크게 다가올 테니까.

이번 방송은 유쾌한 재미와 감탄, 그리고 따스함과 감동을 모두 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추석 특집다운 방송.

우리는 인터넷에서 화제를 싸그리 끌어모으고 있었다.

-영화에 흥미 떨어져서 안 본 지 엄청 오래 봤는데, 저건 봐야 할 듯. 인터넷 살펴보니까 관객들 반응도 미친 수준이네.

-이성호랑 정채희가 진짜 연기 깡패긴 한가 봐···. 어떻게 분식집에서 추리닝 입고 저런 분위기를 낼 수 있냐ㅋㅋㅋ 보면서 진짜 어이가 없더라.

-개무서운 건 이성호한테 정채희가 전혀 안 밀린다는 거임ㅋ 딱 봐도 안 봐준 거 보이던데. 이게 ‘시너지’인가?ㅎ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준 만큼 우리도 얻은 게 많다.

첫 번째로 기대되는 것은 영화의 관객수.

고작 며칠 만에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던 게, 지금 이 방송이 나간 뒤로는 걷잡을 수 없이 상승할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아이돌인 현지가 얻은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

아이돌 판은 여전히 대중들의 관심을 필요로 했고, 이번에 현지가 얻은 것은 그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래서 아이돌~ 아이돌~ 하는구나. 뭔가 힐링되네.

-유현지랑 샴페인 노바 같이 있는 거 진짜 보기 좋더라. 보기만 해도 흐뭇해짐.

-내가 사람 볼 줄 아는데 유현지는 찐이야. 착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착한 거임. 얼굴도 이쁜데 진짜 마음까지 이쁘면 안 좋아하고 배겨?ㅋ

마지막으로는 송하연.

그녀는 이미 미니 앨범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받고 있었는데.

이번 방송으로 정말 그녀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하연 누나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펑펑 울었어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꿈이 없는 고3··· 이제 수능 얼마 남지도 않아서 너무 힘들었는데 노래 듣고 위로받았어요ㅠㅠㅠ

-직장 다니면서 자존심 없애고, 자존감도 한 톨도 안 남았었어요. 죽을 것 같았는데 이 노래 들으니까 힘이 나네요 ^^ 이게 음악의 힘일까요?

-정식으로 음원 발매해주세요 제발 ㅠㅠㅠㅠ 진짜 안 하면 확 드러누워버릴 거임 ㅠㅠ

유튜브의 조회수도 폭발하며 이렇게 몇 명이서 화제를 독식하듯 나누고 있었는데.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하나였다.

“다 4팀이라는 거지.”

HJ엔터테인먼트의 4팀.

우리 회사, 그리고 우리 팀이었다.

***

“하아. 하아.”

HJ엔터테인먼트의 연습실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활동이 끝난 유현지.

그녀는 요즘 스케줄이 줄어들어, 남은 시간은 거의 연습실에 쏟아붓듯이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안 돼···.’

그녀가 이렇게 활동이 끝났음에도 쉬지 않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안무 창작에 크게 관심이 생겼기 때문.

‘우리의 컨텐츠’에서 샴페인 노바와 함께 안무를 짜서 나온 댄스 동영상이 팬들과 대중들한테 공개되었는데.

그들이 보내주는 열광적인 반응은 현지의 새로운 욕심을 자극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방송도 방송이지만 정말 열심히도 짰었다.

그렇게 창작해서 대중들에게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

지금까지 가사는 써봤어도, 정식으로 작곡을 하거나 안무를 만들어보지는 않았다.

‘이게··· 맞는 걸까?’

잘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아서 가슴 속에서 의심이 피어났다.

차라리 이렇게 시간이 날 때 제대로 휴식을 취하거나, 아니면 노래를 더 연습하거나 춤을 연습하는 게 낫지 않을까?

괜히 잘하지도 못하는 안무 창작에 소중한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는 거 아닐까?

그녀의 걱정과 상념은 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벌컥,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온 매니저 덕분에.

“현지야, 연습해?”

“···네.”

그의 표정엔 걱정이 역력하게 묻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역시 괜한 짓을 한 것 같았다.

댄스팀에 있을 때도 창작엔 관여하지 않았었는데.

“푹 쉬어도 돼. 혹시 조급한 마음 드는 거 아니지?”

그의 물음에 현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빨리 떴는데 왜 조급해한다는 말인가.

현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냥 심심해서 안무 짜는 거 연습 좀 해봤어요. 이제 푹 쉬려고요.”

자신은 그의 얼굴을 보면 그의 마음이 어떤 지 알 수 있었다.

평소에 눈치가 빠르기도 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

그런데, 그건 상대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묘한 눈빛으로 자신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한 번 보여줘볼래?”

현지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마음이 들여다 보였으니, 숨겨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참에 확실히 확인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안무 창작은 안 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어도 별로 실망할 것 같지는 않았다.

대중들은 안무 창작을 누가 했는지 그리 신경을 쓰지 않기도 하고.

이게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 별로 관심이 없는 분야니까.

아이돌은 그저 춤을 잘 추고 노래를 잘하면 실력 있는 걸로 받아들여지니까.

“네, 해볼게요.”

***

안무 창작.

그건 일견 별거 아니라고 볼 수 있으나.

깊이 들어가보면 이는 매우 가치가 높은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아티스트로서 그녀의 색깔을 더욱 짙게 해줄 테니까.

또한, 그로 인해 만들어질 색깔은 그녀의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며.

아티스트로서 고유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잘만 한다면 말이지.’

아직 춤에, 그리고 노래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 실력이라면 모를까.

이제 그녀 정도의 실력이 되면 이렇게 창작을 하는 건 재능의 발전을 도모하는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한다.

가뜩이나 천재적인 재능 위로, 고유적인 색깔까지 짙게 덧입혀, 재능을 더욱 끌어올리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

나는 착착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 일련의 과정들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어쩌면···.’

다음에 준비할 정규 1집이 가수 유현지의 본격적인 시작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번 후속곡에서처럼 소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닌, 세계에서도 존중받을 수 있는 아티스트로 발돋움할 수 있는 첫 걸음.

내 머릿속엔 실력과 개성을 모두 갖춰 세계 무대에서 최고가 된 수많은 빌보드 아티스트들이 떠올랐고.

그녀가 창작한 안무를 본 뒤엔.

그 이름들 끝에 한 명의 아티스트가 더 추가되었다.

물론 당장은 아니겠지만, 훗날엔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 본격적인 시작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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