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80화 (80/170)

< 송하연의 미니앨범 >

그녀들의 연습을 어느 정도 봐준 뒤로는 연습실에서 나왔기 때문에 딱히 할 것도 없었다.

현지와 샴페인 노바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뿐.

따라서 나는 차에 둔 대본들을 가져와서 읽으며 심민정의 작품을 선정하는 작업을 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잘 될 수도 있는 작품들은 몇 개 발견했으나 심민정이 들어갈 만한 역할이 마땅치 않다.

작품만 잘 되면 뭐하겠는가, 그녀도 잘 돼야지.

작품의 흥행, 심민정과 어울리면서도 대중들의 인상에 박히는 역할.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대본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대본을 고르는 일은 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인지도 있고 검증된 배우를 쓰겠다는 제작사, 방송사 입장도 무시할 수 없고, 이것까지 모든 걸 만족하는 작품일 땐, 오디션을 보지 않고 내정된 배우가 있는 것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몇 개의 대본을 더 살폈을 때, 제작진이 촬영이 끝났음을 알렸다.

시간을 보니, 참 오래도 연습했다.

내가 대본들을 정리하고 일어나고 있는데, 좀 쉬긴 했는지 땀의 흔적만 남아 있는 그녀들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샴페인 노바와 유현지.

나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빛에서는 감사함이 철철 흘러 넘치고 있었다.

“실장님, 이제 들어가세요?”

리더 박수현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여기 YU엔터의 김대훈 대표님과 저녁 약속이 있다.

촬영이 끝날 때까지 있어야 한다고 말하니까 나를 기다린다고 했지.

어차피 현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건 로드 매니저에게 맡길 터였으나 그래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나도 대기한 거였다.

“김대표님과 약속이 있어서요. 그런데 안무는 잘 짜셨어요? 너무 급하게 짜지 않아도 돼요. 서로 충분히 의견 나누시고 짜세요.”

그녀들은 내 물음에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다들 신나서 아이디어가 너무 많이 나오더라고요. 정리하는 게 일이에요. 다듬기도 해야 하구요.”

이 촬영은 그녀들의 관계성과 스토리가 중요하니, 내가 너무 많이 봐주는 건 우리의 목적과 맞지 않았다.

하여, 나는 그녀들이 1차적으로 완성했을 때 봐주기로 했고, 피드백 후 2차적으로 완성했을 때 또다시 봐주기로 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샴페인 노바는 여러 번 거듭 감사를 표하고 떠났고, 현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오늘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요즘 많이 힘드실 텐데 술까지 많이 먹으면 건강 나빠져요.”

글쎄. 그게 될까?

봐야할 일이었으나 나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조금만 먹을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현지.

저 맑고 투명한 눈이 마치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왜?”

“아니에요. 그리고 당분간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제 스케줄 안 따라오셔도 돼요. 그동안 좀 쉬세요.”

“···그래. 알았어.”

난 그 맑은 눈빛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바쁜 나를 걱정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게다가, 현지는 지금 후속곡 활동을 이어가며 이 촬영까지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가 개입할 일이 이제 별로 없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를 걱정해주는 그녀의 마음이 내 속을 어딘가 간질거리게 했다.

썩 괜찮은 느낌이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많이 드시지 마시구요.”

“알겠어. 너도 잘 들어가.”

현지는 집으로, 그리고 나는 김대표님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나는 술에 푹 절은 몸으로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덕분에 얻어낸 게 있다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것.

다른 이도 아닌, 이 바닥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김대표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란 말을 하니, 몸은 술에 절었어도 마음만은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이왕 이런 찬스를 얻어낸 거, 아끼고 아꼈다가 진짜 도움이 필요할 때 써먹어야겠다.

***

채희와 성호 삼촌의 컨텐츠 촬영 당일.

나는 미리부터 현장에 나와 여러 가지를 살폈다.

장소와 의상, 그리고 소품 같은 것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고칠 만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B급이네. 아니, 이 정도면 E급인가?’

우리는 제작비가 무척이나 모자란 현장을 그대로 답습했다.

재활용과 재활용과 재활용.

채희의 영화와 성호 삼촌의 영화의 예고편을 둘 다 찍어야 하니,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최대한 찍을 수 있는 것들을 다 찍기로 했다.

여기저기 조각조각 촬영한 것들을 다 모아서 편집하면 두 편의 예고편이 뚝딱 나오게 되는 거지.

두 영화의 예고편을 찍는 데 이용하는 장소는 총 네 곳.

성호 삼촌의 집, <우리의 컨텐츠>의 방송사인 HBC, 우리 회사 HJ엔터, 그리고 여기 이곳, 분식집이 전부였다.

“···이거 맞아요?”

채희는 주변을 바라보며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스탭들의 얼굴에 띠어진 웃음과는 대비되는 표정.

성호 삼촌은 피식 웃음기를 띠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이럴 줄 예상했겠지.

“왜.”

내가 뻔뻔하게 묻자, 채희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무리 B급이어도 그렇지, 분식집에서 푸아그라가 나온다고요?”

“돼지 간이나 거위 간이나 그게 그거지.”

“···.”

채희는 이에 대해선 포기한 듯 다른 부분으로 넘어갔다.

두 팔을 벌리고 자신의 상태를 보라는 듯 묻는다.

“이건 뭐로 보나 조폭 아니면 래퍼 아니에요? 재벌이 무슨 추리닝에 두꺼운 체인 금목걸이에요? 이 장면 분명히 드레스랑 명품 목걸이로 기억하는데.”

그건 내 아이디어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넣어봤다.

그리고 역시나 채희한테 입히니까 역시 참 볼 만했다.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냥 그런갑다 해요. 언제는 나더러 감독이라 생각하라 하더니.”

성호 삼촌이 채희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건 예고편이 아니라, 새로운 대본으로 짧은 단막극을 찍자고 했을 때의 얘기였는데.

채희는 그의 옷차림을 보며 조심스럽게 투정을 부렸다.

“···선배님은 정장이시잖아요.”

“이게 더 이상해. 꾸민 것 같잖아.”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들이 다, 두 제작사에게 컴펌을 받은 것들이었다.

인기 많은 예능이기도 하고, 화제가 될수록 더 좋은 걸 저들도 아는 거다.

진짜 예고편이 나오면 이것과 비교하기 위해서라도 진짜 예고편을 더 집중해서 살펴볼 수도 있을 거고, 나중에 또다시 2차로 화제가 될 것도 계산한 거지.

심지어 ‘분식집 푸아그라’는 제작사에서 아이디어를 건넨 거였다.

“어휴, 진짜···. 아무튼 연기는 제대로 하라는 거죠?”

“응. 진짜 촬영에 임하는 것처럼 해야 돼. 그게 포인트거든.”

배우가 이 둘이 아니었다면, 제작사에서도 난색을 표했겠지.

이 둘의 연기를 믿으니까 예능으로나마 이런 예고편을 만들 수 있게 한 것이다.

촬영의 시작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야, 준비할 게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순대와 간, 허파가 올라와 있는 테이블에 두 배우가 마주 앉았다.

두 배우가 본격적으로 감정을 잡기 시작하자 복작복작했던 분식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리고 미디어에 비춰지는 전형적인 영화감독이 된 듯, 선글라스를 낀 신피디가 큐 사인을 보내며 마침내 둘의 연기가 시작됐다.

종화그룹 로열 패밀리. 재벌 3세 이연서.

그리고 그런 재벌 3세에게 담대하게 사기를 치려는 일당의 대장.

지금 이 촬영분은 예고편의 중간 부분에 해당되었다.

“···.”

“···.”

“저··· 연서 씨.”

그의 짧은 대사.

대사를 하기 전까지 초조함과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면, 대사를 내뱉는 순간에는 뒤에 감춰둔 분노와 굴욕감이 불쑥, 수면 위로 올라와 있었다.

나는 성호 삼촌의 연기를 직접 눈앞에서 보며,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잘게 떨리는 눈빛과, 마치 한 음절마다 감정을 꾹꾹 눌러내는 듯한 목소리는 그렇다 치고.

무릎에 올려둔 손의 디테일한 움직임과 고갯짓, 턱짓, 눈짓 하나하나에 배우로서의 경력과 재능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는 듯했다.

내 시선은 이제 채희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성호 삼촌을 살짝 쳐다본 뒤, 태연하게 순대를 입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음식을 씹으며 말했다.

“우리 인연이 깊나 봐. 저번에도 우연히 찾아오시더니, 여기에서도 우연히 마주친 건가?”

영화의 초반에는 말로나마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면,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수없이 반복된 보복에 지쳐 항복하러 온 그에게, 비웃음조차 머금지 않고서도 고압적인 분위기를 풀풀 풍겨냈다.

재능이다.

표정과 몸짓, 눈짓, 목소리 등 겉으로 표현되는 것들은 그저 태연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의 것인데.

그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게 만들고 있었다.

‘···난리 나네.’

그들이 연기를 시작하기 전까진, 실제 대본과 무척이나 상이한 의상과 장소, 음식에 스탭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는데.

지금 저 둘이 연기를 펼치기 시작한 순간, 연기 이외의 것들은 아무렴 상관이 없게 되었다.

그들의 시너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폭발적이다.

나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 아름답기까지 한 연기에 감탄하며 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컷.”

예고편 촬영이기에 씬은 길지 않다.

마침내 나지막한 컷 사인이 울리자, 둘의 연기를 보기 위해 카메라 뒤에 빼곡하게 모여 있었던 스탭들의 입에서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감탄한 것은 저 둘 또한 마찬가지.

이성호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와. 진짜 연기 잘하네. 본촬영 때도 이렇게 한 거죠? 이 영화는 꼭 봐야겠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최고세요! 감사합니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후배의 입장에서는, 대선배에게 ‘연기 잘하시네요.’라며 칭찬을 할 수도 없으니 말을 고르며 우물쭈물했지만.

표정과 눈빛에서는 정말 감탄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만족스럽고 기대된다는 얼굴로 방금 찍은 장면을 모니터링했다.

그리고 모니터를 마친 채희의 고개가 홱! 돌며 나를 향했다.

그녀의 동공은 이미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오빠···. 인간적으로 체인 목걸이는 빼고 다시 찍으면 안 돼요?”

모두의 입에서 크게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내 대답은 단호했다.

“놉!”

그거라도 없으면 이건 더 이상 B급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둘이 함께 한 연기가 S급이었거든.

***

그로부터 일주일.

숨가쁜 촬영 일정이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샴페인 노바와 현지의 댄스, 채희와 성호 삼촌의 두 영화 예고편, 그리고 송하연이 홀로 작곡한 곡의 라이브까지.

대중들의 반응이 어떨지 기대감이 무럭무럭 드는 것들로 한가득이었다.

덕분에 추석엔 풍요로워지겠지.

이토록 기다렸던 추석이 또 언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전.

전야제라고 하기엔 이 또한 메인 이벤트지.

송하연의 미니앨범.

마침내, 5곡을 담은 미니앨범의 발매 날이 오늘로 다가왔다.

이미 포토 티저와 뮤비 티저를 본 팬들이 오후 6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나는 그녀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담당 매니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앨범에 실리는 5곡을 모두 함께 만들었잖아?

“오셨어요?”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된 기색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성호 삼촌이 하고 싶은 영화를 한다고 말했으면서도 흥행을 완전히 놓지 못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곡을 벌써 수십 개나 냈으면서도 아직 대중들의 평가가 어떨지 떨리는 모양이다.

역시 이런 건 짬을 먹는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니라니까?

난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이미 테이블 위에는 인터넷이 켜진 노트북이 세팅되어 있었다.

“드시고 싶은 음료 있으세요? 감귤 주스랑 포도 주스 있는데.”

“아뇨, 전 물이면 될 것 같습니다.”

후다닥 주방으로 간 그녀는 컵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자신도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는 걸 알았는지, 양볼이 살짝 상기되어 부끄럽다는 듯 웃는다.

“많이 긴장돼 보이죠? 평소보다 더 떨리는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거니까 괜찮아요. 원래 다들 그러잖아요.”

노트북에 시선을 둔 그녀가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아뇨, 그게 아니에요. 평소랑 달라요. 이번엔 더··· 느낌이 좋아서요. 너무 잘 뽑혔잖아요, 곡들이.”

6시가 되기 직전.

그녀는 유튜브와 음원사이트, 그리고 포털 사이트와 팬 카페, 커뮤니티를 모두 켜놓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같이 열심히 만들었으니까 저번보다 더 잘 됐으면 좋겠어요. 팬들도 지금까지 중에 제일 좋아하셨으면 좋겠고요.”

그리곤 대답을 바란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얼마 안 있으면 실제 사람들의 반응이 쏟아져 나올 텐데, 내 말을 듣고 싶은 모양이다.

“하연 씨, 저는 빈말 잘 안 하는 거 아시죠? 제가 하나 말씀드리자면-”

“빈말 잘 안 하세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자주 하시는구나.”

“뭐 어쩔 때는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어느새 입꼬리를 올린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래서 하나 말씀해주실 게 뭔데요?”

내가 미리 6시에 맞춰놨던 핸드폰 알람이 울리는 순간.

나는 입꼬리를 마주 올리며 말했다.

“이번 앨범도 많이 사랑받을 거라는 거예요. 그것도 엄청 많이요.”

예상하시던 대로, 그리고 바라시던 대로.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많이 말이다.

< 송하연의 미니앨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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