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컨텐츠> >
심민정에게 대본을 골라줘야 하는 일도 남아 있지만, 지금 우리의 앞으로 닥친 일 또한 소화해야 했다.
<우리의 컨텐츠>가 바로 오늘부터 촬영이었기에.
그렇다고 심민정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었다.
그녀와 팀장님, 본부장님까지 나서서 대본을 고르고 있고, 나 또한 틈틈이 고를 예정이니까.
그러나 우선은 이것.
<우리의 컨텐츠>에서 유튜브에 업로드할 컨텐츠를 무엇으로 할지 정해야 했다.
“이제 저희도 슬슬 촬영 시작할까요?”
신피디가 말했다.
말의 형태는 분명 질문인데, 이미 카메라가 켜져 있다.
이것도 방송에 내보낼 셈이겠지. 뻔하다.
“다른 분들은 촬영 시작했대요?”
“네, 지금 다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4팀 특집이라 한들, 프로그램의 색깔과 포맷까지 바꿀 수는 없는 일.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시작은 각자 해야 한다.
그래서 촬영팀과 나는 지금 우리 회사가 잡아준 채희의 집에 들어와 있었다.
“채희야, 촬영 시작했어.”
채희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
“···오빠.”
“왜.”
“우리 쓸데없는 과정은 건너 뛸까요?”
그녀가 말하는 쓸데없는 과정이라 함은, 내 도움을 본격적으로 받기 전까지 헤매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리라.
보통 이 프로그램은 아티스트 혼자 고민하고 아티스트 혼자 카메라에 잡히는 게 일반적.
설령 스탭들과 함께 고민하더라도 방송의 중심이 되는 건 어디까지나 연예인이다.
대중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스탭들은 카메라에 별로 잡히지도 않고 분량도 거의 잡아먹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여러모로 보통의 상황과는 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처음부터 바로 개입하는 건 좀 그렇지. 원래 이건 연예인이 중심이 돼야 하는 거야.”
웃기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피식 웃은 그녀가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미 마이크도 달아놨고.”
그녀의 손가락은 나를 찍고 있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오빠를 위한 카메라도 있는데요? 이 프로그램에서 원래 어떻게 했든 이미 시작부터가 다르잖아요. 이왕 찍는 거 편하게 가요. 오빠 이제 벗어날 수 없다니까요? 그냥 출연자라고 생각해요.”
“···.”
“자, 일단 빨리빨리 카드부터 까볼까요? 제가 생각한 거 먼저 말할 테니까, 바로 오빠가 생각한 거 다 말하는 거예요?”
슬쩍 신피디를 바라보니 알아서 하라는 듯이 씩, 미소 짓고 있었다.
이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래, 뭐.”
될 대로 되라지.
프로그램의 포맷이고 컨셉이고.
그냥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면 나야 편하다.
내 도움이 필요한 출연진이 채희만 있는 것도 아니니, 빨리빨리 해결할수록 좋다.
“그럼 제가 먼저 말할게요? 음. 일단 유튜브에 올릴 컨텐츠로 두 개 생각해봤어요. 알다시피 제가 춤은 잘 못 추잖아요? 그러니까 댄스커버영상을 올리는 거예요. 저 같은 몸치도 제대로 출 수 있게 그 가수한테 해당 곡에 맞는 댄스를 배우는 거죠.”
“···다른 하나는?”
“알다시피 제가 노래는 잘 부르잖-“
노래를 잘해? 누가?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었다.
“됐고. 네가 진짜 잘하는 걸 해보자.”
“···애교?”
예능이라고 평소보다 한층 더 까불거리는 것 같은데.
넘어가줘야지. 예능이니까.
나는 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며 말했다.
“연기하자. 성호 삼촌이랑 둘이.”
***
“연기? 채희 씨랑 나랑 둘이?”
“서, 선배님. 편하게 말씀하셔도···.”
채희의 말에 성호 삼촌이 키득거리며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후배님인 정채희 씨랑 나랑 같이 짧은 대본으로 찍자는 거잖아? 저퀄로.”
손을 모은 채 꼼지락거리는 채희를 흘깃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그렇다고 막 저퀄은 아니죠. 삼촌이랑 채희가 연기하는데 어떻게 저퀄로 나오겠어요? 그리고 대본도 저퀄이 아닐 텐데. 그냥 촬영 환경만 저퀄인 거예요. 의상, 헤어, 메이크업, 카메라, 조명, 장소, CG···는 못하는구나. 암튼 음악, 음향, 그런 것들까지 뭐 있는 걸로 최대한 활용해야죠. 없으면 못 하는 거고.”
성호 삼촌이 손가락으로 꺼슬꺼슬한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음.”
“셀프 카메라로 찍어도 되니까 따로 크게 준비할 건 없을 거예요. 영화 촬영장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건 창의적으로 이용하셔도 되고요. 그니까 감독도 겸하는 거라고 보면 되겠죠?”
대놓고 B급을 표방하는 영화처럼.
“음. 확실히 괜찮긴 할 것 같긴 한데···. 네가 아이디어 짠 거지?”
“네. 혹시 더 괜찮은 거 있으면 하셔도 되고요. 대본은 작가님들 습작을 수정하거나, 아니면 보조작가 분들이나 작가 지망생 분들한테 대본 받을 생각이에요. 그중에서 고르는 건 자신 있거든요.”
역시 나는 기획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나 보다.
피디님은 퍽 괜찮다는 정도의 반응이었는데, 삼촌은 연신 고개만 갸웃하고 있으니.
“차라리 그렇게 할 거면 이건 어때?”
“어떤 거요?”
그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덧붙였다.
“그러면 너무 복잡해지니까, 채희 씨랑 나랑 둘이 연기해서, 두 영화 각각 예고편을 찍는 거야. 내 영화 따로, 채희 씨 영화 따로.”
“···오!”
“어?”
추석 시즌에 맞춰 영화를 개봉하는데, 추석 특집으로 방송될 예능과 유튜브에 올라올 영상마저 홍보에 이용할 수 있다면?
혹시 방송을 너무 홍보에만 이용하는 게 아닐까 싶어, 고개를 돌려 신피디님을 바라봤는데.
그의 눈동자는 이미 바쁘게 계산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는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네.’
성호 삼촌의 영화가 개봉하려면 아직 멀긴 했지만, 곧 개봉할 채희의 영화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도움이.
그도 그럴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성호 삼촌이 돕는 거잖아?
프로그램이 홍보의 장으로 변질되면 어쩌지? 라는 걱정 따위는 내가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 이후로 이런 컨텐츠를 반복적으로 하면 홍보는커녕 역효과만 날 테고.
나는 씨익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제작사측에 허락은 구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당연하게도 ‘OK’.
오히려 도와줄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만 하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이제부턴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예고편으로 어떤 장면을 넣을지 선택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고.
우리가 추구했던 ‘저퀄인 듯 고퀄’ 컨셉은 그대로 유지해야 화제성이 더 살 테니까.
아니, 고퀄인 듯 저퀄인가?
***
촬영팀의 카메라가 조용히 촬영하고 있는 가운데.
송하연은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고민에 잠겼다.
스탭들은 전부 그녀가 박한울의 연락이 오기 전까지 고민하는 척하며 그림을 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정말 고민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그녀 자신의 라이브 직캠 영상의 댓글들이 띄워져 있었고, 거기에는 송하연의 마음을 자극하는 댓글들이 여러 개 있었다.
-언니ㅠㅠㅠ 저 너무 힘들었는데 이거 보고 울었어요ㅠㅠ 진짜 천 번째 보는 중
-왜 송하연이랑 친구 된 것 같지?ㅋㅋㅋ 고마워요 저 반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는데 누나가 노래 부르는 표정이랑 가사 보니까 진짜 이런 게 친구인가 싶음. 당연히 진짜 친구 생기면 이것보다 훨씬 더 좋겠지만ㅋㅋ
-진짜 예전이 좋았다··· 매일 집에서도 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계속 스트레스 받는데 이 영상 보고 다시 힘 얻어가요.
노래는 히트곡 중에 하나인 <푸르른 하늘에게>였다.
-우리 아파트 뒤, 그 풀밭 위, 즐겁게 뛰놀던 우리.
-8차선 도로가 옆에 있는 그곳이 우리에겐 초원이었어.
-그때의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지. 마치 지금처럼.
-지금은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비록 지금 함께 있지는 않지만, 저 푸르른 하늘 아래 우린 같이 있잖아.
-그럼 지금 우리 같이 있는 거 맞지?
“그런 뜻 아닌데···.”
아이들이 위로받을 만한 가사가 아닌데.
아이들은 이 노래로 위로를 받고 있다고 한다.
대체 얼마나 힘들면. 얼마나 자신을 좋아하면.
그녀는 그 댓글들이 너무나도 마음이 쓰였다.
“하아···. 안 되겠어.”
원래는 박한울의 도움을 받으며 컨텐츠를 생각하려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 계획을 모두 철회해야겠다.
그녀에게 새로운 기획이 떠올랐으니까.
마침 <우리의 컨텐츠>라는 좋은 기회도 있으니, 딱 알맞다.
송하연이 그렇게 결심을 굳혔을 때.
기다리던, 아니 기다렸었던 연락이 왔다.
“네, 매니저님.”
-하연 씨, 컨텐츠는 잘 짜고 계세요? 힘드시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하연은 스크롤을 내리며 다른 댓글들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 올리고 싶은 영상 생겼어요.”
-네? 어떤 거요?
“간단한 노래 하나 만들려구요. 힘든 아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음악이요.”
송하연은 이 음악만큼은 매니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퀄리티가 조금 떨어져도 좋으니, 이것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고 싶었으니까.
***
“혹시 하고 싶은 거 있어?”
박한울의 물음에, 유현지는 전에 봤던 수십 개의 댓글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현지 떡상ㅋㅋㅋㅋㅋ YU엔터 진짜 땅 치고 후회하고 있겠네 얘 버리고 선택한 게 샴페인 노바라니.
└샴페인 노바가 뭐 어때서? 아니 왜 유현지 얘기에 활동 잘하고 있는 샴페인 노바가 나옴? 어이없네.
-아무리 봐도 유현지 하나가 샴페인 노바 전체보다 훨씬 나은데 대체 YU엔터는 왜 유현지 데뷔조에서 탈락시킨 거임??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당시에는 그랬다잖음ㅋㅋㅋ 사실 샴페인 노바도 킹쁘지 않음.
└ㅇㅇ샴페인 노바도 나름 실력 괜찮아. 유현지가 괴물이라서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거지.
-샴페인 노바 멤버들도 속으로 유현지랑 같이 그룹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ㅈㄴ생각할 듯ㅋㅋㅋ ‘아 얘 빼고 유현지 넣었으면 대박이었는데’ 막 이런 겈ㅋㅋㅋ
└ㄹㅇ 킹능성 있다 ㅋㅋㅋ
“오빠, 도와줄 사람 불러도 돼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굳이 신피디님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많이들 그렇게 했으니까.
“부르고 싶은 사람 있어?”
유현지는 내 눈을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마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네, 샴페인 노바요.”
그 대답에 스탭들 사이에서 희미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유현지와 샴페인 노바의 스토리는 이제 대중들도 많이 알 만큼 유명하다.
정확히 말하면 유현지가 유명해지면서, 그녀가 YU엔터 소속이었다는 것과, 데뷔조에 탈락해 댄스 팀에 들어갔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었다.
또한, 사실은 피디의 강요와도 같았으나, 겉으로나마 샴페인 노바가 먼저 손을 내밀었던 예능 <비하인드>도 큰 화제가 되었었으니.
알만큼 아는 네티즌들은 현지와 샴페인 노바 사이에 크게 벌어진 현재 상황을 두고 지금 그렇게들 떠들어대고 있는 거였다.
나는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의 뜻은 잘 알겠다.
‘샴페인 노바를 돕고 싶다는 거겠지.’
당시에 더 인기가 높았던 그녀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기도 했으니, 이번에는 반대로.
나는 그녀의 예쁜 마음에, 옅게 웃으며 물었다.
“샴페인 노바랑 뭐 하고 싶은지는 생각해봤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돕고 싶은 마음은 앞서는데 아이디어가 받쳐주지 않는 것.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대체 뭐가 좋을까?
컨텐츠도 컨텐츠지만, 돕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도 제대로 이뤄주고 싶었다.
‘샴페인 노바···.’
그녀들의 무대가 머릿속에 스치고, 내가 파악했던 그녀들의 장단점이 속속 떠오른다.
슬슬 감이 잡힌다.
단지 예능에 출연시켜 잠깐 화제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로 하여금, 현지와 비교되어 ‘YU엔터의 실수’라고 낙인 찍힌 그녀들의 이미지를 쇄신시킬 수 있게끔.
‘음···. 고리타분하긴 하지만 이만큼 효과가 좋은 게 또 없지.’
역시 나는 창의성은 젬병인가 보다.
난 생각을 정리하곤 가볍게 아이디어를 던졌다.
“너랑 같이 댄스 컨텐츠 해보는 게 어때? 다른 걸그룹들이랑 비교했을 때, 걔네 강점이 댄스잖아.”
내 말에 신피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샴페인 노바 안무는 간단하고 따라하기 쉬운 거 아니었어요?”
적극적으로 개입하진 않으나, 피디의 목소리가 예능에 들리는 건 요즘 예능에서 예삿일.
시청자들이 느낄 의문을 대신 물어보는 모양새였다.
나는 작게 웃으며 현지에게 말했다.
“봤지?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무리 내가 현지의 재능을 크게 개화시키기 전이었다지만, 그래도 댄스 팀에 들어갈 만큼 실력이 있던 현지와 경쟁해서 살아남은 이들이다.
그런 그녀들이 과연 댄스를 못 출까?
해외 팬들로 인해, 걸그룹의 안무 트렌드가 점차 퀄리티 높고 화려한 것들로 주를 이루게 되긴 했는데.
샴페인 노바는 신인 걸그룹이기도 하고 컨셉이 컨셉인 만큼 안무는 굉장히 쉬운 편에 속했다.
사실, 가진 실력들은 그렇지가 않은데.
“대중들은 잘 몰라. 청순 걸그룹 멤버들이 연습생 때 어떤 춤들을 췄는지.”
보통은, 그룹의 멤버들마다 댄스 실력의 편차가 심하거나, 대부분의 멤버가 잘하면 꼭 한두 명씩은 구멍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샴페인 노바는 예외에 속하는 그룹이었다.
‘걔네들 중에 그렇게 엄청난 애는 없더라도 모든 멤버들이 평균 이상은 되거든.’
현지는 신뢰가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나를 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좋을 것 같아요.”
“이왕이면 안무도 너희가 같이 짜 봐.”
그래야 방송을 통해서 실력 어필이 더 잘 될 테니까.
‘가뜩이나 열렬했던 팬들이 더 뜨거워지겠네.’
현지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현지가 왜 그녀들과 함께 하려는지 모를 리가 없으니까.
아마 방송이 나가면 현지의 인성 또한 재차 조명되겠지.
난 이 컨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신피디님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역시.
그의 표정은 이미 밝아져 있었다.
댄스 컨텐츠는 지금까지 차고 넘쳐서 더 이상 신선하다 할 것도 없었지만.
방송쟁이들은 또 스토리를 중요시하거든.
다른 댄스 컨텐츠들이랑은 결이 다르다 이거지.
< <우리의 컨텐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