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니저님이 낭중, 그리고 제가 지추 >
오늘은 무척이나 특별한 날이다.
아니, 특별한 날이 되었다.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한 날, 그리고 계약에서 해방되어 희망찬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적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잘할 수 있잖아?’
다른 멤버들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연예계를 떠날 준비를 미리부터 해왔기 때문에.
허나, 자신만은 달랐다.
연기에 대한 재능이 있었으니까.
이를 처음 느낀 건 애석하게도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드라마가 끝난 다음이었다.
관심도 없던 연기를 억지로 했었으니 당시에는 즐기지도 못 했다.
그런데.
그게 못내 아쉬웠다.
그 뒤로는 주어진 기회가 없었으니까.
‘나는 왜 못 떴지?’
이지연의 악성 개인 팬들의 악플, 그리고 기사와 대중들의 반응.
그 모든 것들이 답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지연의 편에 서서 말한 것이었으나, 스스로가 생각해봐도 그건 정답이었다.
“나는 실력이 없어.”
댄스, 그리고 노래.
인기멤버인 이지연은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는 것들이 자신에겐 그 무엇보다도 어려웠고, 그곳엔 희망이 없었다.
그래서 같은 상황에 처한 여느 연예인들이 늘 그렇듯, 심민정은 연기로 눈을 돌려봤다.
그런데, 트레이닝을 받겠다는 말에 회사가 내놓은 대답은.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본업에 충실해. 너 때문에 다른 멤버들까지 피해 입을 수도 있어.”
기획사들이 연습생들과 그룹 아티스트들에게 으레 하는 가스라이팅이었다.
네가 잘했으면 다른 애들도 같이 뜰 수 있었다, 너희가 뜨지 못하는 건 순전히 너희의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라고.
심민정은 그들의 이런 추악한 모습을 보며 기획사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어갔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걸까.
마지막 동아줄로 사비를 들여 등록한 연기 학원에서 재능을 발견했고.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서서히 희망이 자라났다.
‘나도 할 수 있어.’
나도 잘할 수 있어.
그 희망은 마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미래를 꿈꾸게 만들었고.
소속사와의 계약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녀는 모든 걸 다 가진 듯 기쁨에 차올랐다.
무얼 하든 즐거웠고, 앞으로 가족들에게 보답할 생각에 들떴다.
‘와! 역시! 박한울 매니저님 맞죠? 저 연기에 재능 있는 거 맞나 보네요?’
‘네?’
‘일부러 저 찾아오신 거 아니에요?’
‘일부러 찾아온 거 맞아요.’
비단 큐빅 엔터뿐만이 아니라, 다른 소속사들도 믿지 못한다.
자신이 스타가 아니니까.
명암이 이토록 뚜렷한 연예계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으려면 일단 스타가 되어야만 한다.
참 아이러니하지.
스타가 되기 위해 소속사에 들어가는 건데, 대우를 받으려면 스타가 되어야 한다니.
다만, 배우는 방법이 있었다.
먼저 드라마나 영화 오디션에 합격해서 스타가 될 수 있으니.
그런데, 그보다 더욱 좋은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했다.
박한울.
HJ엔터가 아닌 박한울이라는 사람.
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업계에 자자했고, 심지어 활동을 하지 못 하고 있던 자신의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시간 좀 드릴까요?”
“아뇨. 바로 해볼게요.”
그의 관리를 받을 수 있는 기회.
대본을 들고 있는 심민정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
지그시 감았던 그녀의 눈이 떠졌다.
그녀가 하는 연기는 독백.
긍정적인 그녀의 본래 성격과 맞지 않는, 어둡고 음험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주저앉으면 안 돼. 세상이 불공평한 건 당연한 거잖아.”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일상이라는 듯 태연한 목소리와 표정.
그녀는 엎어져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 무릎을 굽히고는 바닥을 바라보며 대사를 이었다.
“이대로 그만둘 거야? 복수 안 해? 이사장이 네 인생 망쳤다며. 아버지 죽게 만들었다며. 그런데 고작 여기서 그만둔다고?”
대사로 유추할 수 있는 상황과는 맞지 않는 여상한 목소리.
그녀의 광기로 물든 눈동자로 말미암아, 그녀의 일상 또한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그녀가 압도하는 분위기에 숨이 가빠져 온다.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어여쁜 그녀를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게끔 만든다.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어지는 연기.
타고난 재능, 그리고 끝없는 노력.
나는 그녀의 지나온 과거마저 보이는 듯했다.
대체. 저렇게 실력을 키울 때까지 어떻게 견뎌냈을까.
실력을 뽐내고 싶었을 텐데.
‘잘해줘야겠다.’
이미 잘해줄 생각이었지만 더 잘해줘야 할 것 같았다.
전 소속사에 불신과 불만이 쌓인 그녀가 내게 보내주는 신뢰가 너무 예쁘고 고마워서.
오늘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어주고 따라온다고 해줘서.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면 나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짧은 연기를 마치고는, 눈을 감으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중인 듯해서, 우리는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숨소리도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나는 윤본부장님에게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는 입을 벌리고 눈썹을 잔뜩 모으며 충격스럽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연기 괜찮아요?’
나는 입모양으로 물었고, 그는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물어볼 걸 물어봐야지.
나는 눈을 뜨고 빙그레 미소 짓고 있는 심민정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희 회사에 온다고 해줘서.”
“절 알아보고 찾아오신 건 매니저님이잖아요. 제가 고맙죠. 어떻게 그 드라마를 보고 재능을 알아봤는지 아직도 미스테리라니까요?”
그녀는 눈썹을 장난스럽게 들어올리며 물었다.
“그러면 저 합격인가요?”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대번에 끄덕였다.
“네, 합격이죠. 그것도 수석 합격입니다.”
***
계약서를 쓰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녀에게 다듬는 과정은 필요가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연습이 아닌 실전.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경험을 양분으로 삼아 성장하는 것이었다.
“일단 오디션 보기로 했던 그 드라마는 하지 않는 걸로 하죠. 제가 대본 골라드릴게요.”
내 말에 그녀는 이유도 물을 필요 없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좋아요.”
“···이유는 안 물어봐요?”
“이유가 뭐예요?”
“···.”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매니저님이니까 믿고 맡겨보는 거예요. 전 아무거나 좋으니까 마음껏 연기할 수만 있게 해주세요. 일단은 전 그거면 만족해요.”
“그래도 이유를 아는 건 중요해요. 왜 이 드라마가 아닌지, 그리고 왜 이 역할이 아닌지. 제가 열심히 골라주겠지만 그래도 스스로 생각할 줄도 알고, 보는 눈도 키워야-“
나는 말을 잇다가 멈칫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입매가 길게 올라가 있어서.
“···왜요?”
“아뇨, 그냥 뭐. 역시 이번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싶어서요. 매니저님, 우리 팀명 정할래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팀명이요? 4팀의 팀명?”
고개를 젓더니, 손가락으로 나와 그녀 자신을 가리킨다.
“매니저님이랑 저요. 낭중지추, 어때요?”
내가 눈만 끔뻑이고 있자 설명이 이어졌다.
“매니저님도 1년차에 실장 달고 유명세 얻었잖아요. 저 같은 비인기 아이돌도 귀에 다 들려올 만큼요. 그리고 매니저님도 제 보잘것없던 연기 보고 재능 알아보신 거니까, 낭중지추가 딱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 팀명 이걸로 해요. 낭중지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잔뜩 신나서 얘기하는 목소리가 입꼬리를 강제로 끌어올린다.
왜 이렇게 귀엽지?
그런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우리 둘이 따로 팀명을 만들자니.
“두치와 뿌꾸, 뭐 이런 거예요?”
“···차라리 티몬과 품바로 하시지.”
“톰과 제.. 아니에요. 크흠. 뭐, 편하신 대로 하세요. 낭중지추. 좋네요.”
우리 사이에 일부 코드는 잘 안 맞나 보다.
두치와 뿌꾸, 톰과 제리가 뭐 어때서.
은비까비, 배추도사 무도사 아닌 게 어디야.
“그럼 매니저님이 낭중, 그리고 제가 지추. 나쁘지 않죠?”
두치와 뿌꾸를 무시할 처지도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왜 낭중이에요?”
“그럼 지추 하실래요? 강아지 시츄 같고 귀엽네.”
“···낭중 할게요.”
문득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이런 걸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거야?
“아무튼, 이제 곧 기사 날 거예요. 제가 직접 스카우트해서 계약했고, 제 담당으로 배우 하게 됐다고. 연기력이 좋으니까 대중들한테 이렇게라도 기대를 안기는 쪽이 좋을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인지도가 부족하니, 내 이름을 이용해서라도 일단 인지도를 높이는 쪽이 좋겠지.
참 씁쓸한 게, 어떻게 7년간 활동한 그녀보다 내 인지도가 더 높다.
나는 유명세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녀는 유명세를 간절히 바랐을 텐데.
“기사요? 하하! 진짜 재밌겠다!”
두 손을 모으며 눈빛을 반짝이는 그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가요?”
“뭐긴 뭐겠어요.”
씩, 웃더니 짧게 답한다.
“큐빅 엔터 반응이죠.”
아, 거기?
그러게. 나랑 억하심정은 없어도 꽤 재밌을 것 같긴 한데.
볼 수 없다는 게 좀 아쉬웠다.
***
큐빅엔터의 연습실.
이지연은 현재 솔로 컴백을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는 해체하기 전부터 해왔던 작업이었으며, 회사가 멤버들과 재계약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옛적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이는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
‘난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다.
이지연은 몇 년 간이나 반복해온 이 자기암시를 요즘 더욱더 많이 하고 있었다.
자신이라도 회사에 강력하게 요구해서 멤버들에게 활동을 시켜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은 수차례 해왔으나 자신 역시 을의 입장.
슈퍼스타라면 모를까, 이지연 역시 그 정도까지의 스타는 아니었다.
그저 널리고 널린 스타들 중에 하나였지.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모두 가수를 하기 위해 걸었기에, 경거망동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난 나쁘지 않아.’
멤버들의 아픔을 언제나 옆에서 봐오며, 기쁨도 마음껏 즐길 수 없었고, 몸과 마음이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티를 낼 수도 없었다.
그녀들이 보기엔 배부른 투정일 테니.
이지연은 고개를 털며 상념을 떨쳐내고, 다시 음악을 틀어 땀방울을 흘리며 연습을 이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연습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팀장님이 사색이 된 얼굴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지연아!”
“네? 무슨 일 있-“
“민정이! 민정이한테 전화 걸어봐! 빨리!”
“···왜요?”
팀장님은 연습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걸 경계하듯 흘깃 쳐다보고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민정이 HJ들어갔대! 유현지 매니저가 직접 스카우트했다더라. 대표님은 또 우리 탓만 할 텐데 이게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 그니까 민정이한테 네가 연락 좀 해봐. 얘기 좀 해보게. 내 전화는 안 받거든?”
도통 안절부절못하는 팀장.
반면, 그와 마주하고 있는 이지연의 얼굴에는 살짝 금이 가 있었다.
언제나 딱딱하게 쓴 가면이 부서지듯.
그리고 그 얼굴 위로, 나른한 미소가 아주 살짝 번져갔다.
“저 핸드폰 꺼졌어요. 배터리 다 돼서.”
***
큐빅엔터의 대표실.
그곳에서는 한바탕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장 김실장이랑 이팀장 데려와!”
살벌한 호통으로 레이니데이를 담당했던 김실장과 이팀장을 찾았다.
대표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다시 핸드폰으로 심민정에게 연락해보지만 역시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런 썅!”
인터넷에서 갑자기 화제가 된 기사에 대해 방금 전에 보고 받았다.
[미다스의 손 HJ엔터 박한울 실장, 다음 타겟은 레이니데이 심민정!]
[큐빅에서 버린 연예인이 알고 보니 안 긁은 복권? 심민정 배우로 활동 이어가다.]
[실패한 아이돌 멤버, 인기 배우로 탈바꿈 성공할까?]
[“이게 웬 떡?” 계약 만료되자마자 부리나케 찾아간 박한울 실장, 이미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의미일까.]
헐레벌떡 기사들을 찾아보니, 보고 받은 대로 심민정과 박한울이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SNS 계정도 새롭게 만든 상태.
일이 어떻게 됐는지는 명백했다.
커뮤니티에는 다른 사진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거 내가 몰래 찍은 사진인데 기사 풀려서 이제서야 공개;; 내가 송하연 팬이라서 박한울 얼굴 알거든? 근데 갑자기 내가 있던 카페에 들어오는 거임ㅋㅋ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내가 있던 카페 직원 찾아온 거더라고. 얘기하는 거 귀 활짝 열고 들어보니까 직원이 레이니데이 심민정이었음ㅋㅋㅋ 혹시 문제될까 봐서 사진을 찍어도 차마 올릴 수가 없어서 갖고 있었는데ㅋㅋ 와 이게 하루도 안 돼서 계약해버리네? 박한울이 픽한 거면 사실상 성공 확정 아님? 큐빅엔터 불쌍해서 어쩌냐?ㅋㅋㅋㅋㅋㅋㅋ 개웃기네 진짜ㅋㅋㅋㅋ]
당장 댓글들도 난리가 났다.
-ㅋㅋㅋㅋㅋㅋ박한울이 직접 찾아간 거면 진짜 스타 확정 아님?
-박한울이 누군데?
└한 번 찾아봐라. 레전드임.
-근데 심민정 노래랑 춤 다 별론데;;; 안목 확실한 거 맞음?
└배우라잖아. 사진에서도 대본 있는 거 안 보임?
└YU엔터가 그렇게 유현지를 놓쳤었지ㅋㅋ 근데 큐빅은 그보다 더하네 7년 데리고 있었으면섴ㅋㅋㅋㅋ 꼴 좋다 개쌤통임.
-심지어 드라마도 한 번 찍었었다는데··· 레전드.
조롱하는 게 재밌는지 여러 커뮤니티에 퍼지고 또 퍼진다.
이렇게 금세 화제가 된 이유는 바로 얼마 전에 박한울이 화제가 됐기 때문이기도 했고, 큐빅 엔터에 불만이 많은 아이돌 팬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바로 어제 레이니데이의 해체 기사가 났으니, 이것들이 합쳐지며 재밌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도덕도 없는 새끼들!”
물론 큐빅엔터의 입장에서는 영 재미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 매니저님이 낭중, 그리고 제가 지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