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76화 (76/170)

< 전직 아이돌 >

일단 나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 그녀가 만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그녀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원래는 오래 기다려야 했겠지만 여기는 그녀의 이모가 운영하는 가게.

이모에게 연락을 넣었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참.’

여전히 이쪽을 틈 날 때마다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는 심민정.

그 미소를 몇 번 마주치다 보면 왠지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녀에게 물어볼 게 산더미였다.

첫 만남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머릿속에 잘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커피를 몇 입 마시지도 않았을 때.

가게 안으로 심민정과 묘하게 닮은 분이 들어오셨다.

바로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 역시 이 가게의 사장인 이모님이신 듯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런데, 내가 입을 먼저 떼기도 전에 사장님이 먼저 내게 말을 건네셨다.

“어머! 진짜네! 안녕하세요! 오면서 찾아봤어요. 되게 괜찮으신 분 같던데 우리 민정이 좀 잘 부탁드려요. 애가 소속사를 잘못 만나서 그렇게 고생을 해가지고.”

아무래도 심민정의 성격은 유전인 모양이다.

외가 쪽 피를 진하게 물려받았어.

‘말씀하시는 것만 들어보면 벌써 우리 회사 들어오는 게 확정된 것 같네···.’

물론 계약하는 게 내 바람이긴 했지만, 아직 확정은 아니지.

아무튼 인사를 나눈 뒤, 심민정과 나는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휘핑크림이 웅장하게 솟아오른 허니 브레드가 새로이 놓여 있었고.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 우리 가게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엄청 맛있거든요. 어디서 봤는데 원래 제대로 대화 나누기 전에 단 거 먹으면 다 술술 풀린다더라고요.”

생글생글 미소를 띠며 포크를 드는 그녀.

나도 그녀가 권하는 대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허니 브레드를 잘라먹었다.

이모님께서 주신 성의도 있으니까.

“음. 정말 맛있네요.”

“맞아요. 이거 근데 살 엄청 쪄서 주의해서 먹어야 돼요.”

“···.”

나는 살짝 두툼하게 올라온 턱살을 만지작거리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이 웅장한 휘핑크림이 살덩어리로 보였다.

“어? 안 드세요?”

“네. 단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혹시 다이어트 하시는 거예요? 지금이 딱 괜찮으셔서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

“···아뇨, 그냥 안 먹을게요.”

“에이. 살 찐다고 말하지 말 걸 그랬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큼직큼직하게 잘라서 야무지게도 먹는다.

그런데 어째선지, 내가 먹지 못하는데도 그녀가 맛있게 먹고 있는 걸 보면 슬금슬금 만족감이 차오르는 느낌이다.

‘···이것도 무기라니까?’

얼굴이 너무 예뻐서 미세한 표정 변화에도 집중하며 지켜보게 된다.

‘이 사람은 왠지 채희한테 하는 것처럼 매콤하게 대해도··· 타격이 하나도 없을 것 같네.’

긍정적이고 상냥한 분위기가 뿜뿜 뿜어져 나오며, 그 에너지가 내게도 옮겨지는 기분.

이래봬도 아이돌 출신이라 이건가?

‘나쁘지 않아.’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잘만 하면 인기를 끄는 건 일도 아니겠다.

그러나, 앞으로에 대한 것도 계약이 성사돼야 의미가 있는 일.

우리 둘 다 서로 계약하기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전에 얘기는 나눠봐야지.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정말 산더미였으니까.

“제가 연기 때문에 찾아온 건 어떻게 알았어요? 민정 씨는 아이돌이잖아요.”

허니 브레드를 먹으려 크게 입을 벌리고 있던 그녀가 포크를 내려놓고 대답했다.

“매니저님이 일부러 저 찾아오셨다면서요. 솔직히 댄스랑 노래는 제가 보기에도 별로거든요. 애초에 레이니데이도 비주얼로 뽑힌 거기도 하고요. 그런데 매니저님이나 되는 분이 절 가수로 데려가려고 하지는 않겠죠. 배우라면 몰라도.”

그녀는 정말 놀랍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매니저님 기사가 다 사실이긴 한가 봐요. 제가 연기한 건 3주 배우고 들어간 드라마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 재능을 또 알아보시고. 유현지 가수도 다 못 알아볼 때, 혼자 알아보고 발전시킨 거라면서요? 신곡 진짜 잘 듣고 있어요. 되게 좋던데요?”

할 말이 없다.

왠지 대화가 말리는 느낌이라, 그녀가 잘라놓은 허니 브레드를 집어먹으며, 어질어질해지려는 머리를 달랬다.

“안 드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먹고 싶어졌어요. 당 떨어져서.”

“많이 드세요. 칼로리는 엄청 높은데 맛있긴 하잖아요.”

“네, 많이 먹으려고요.”

“듬뿍듬뿍 드세요. 이모한테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하면 되니까요. 아니다, 그냥 지금 말할게요. 이모! 이거 하나 더 주세요! 매니저님이 맛있대요!”

“···.”

그녀는 태연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저 이제 연기 보여드리면 돼요? 지금은 엄청 잘해졌어요. 매니저님 안목이 또 맞았다는 걸 확인시켜드릴게요. 바로 대본 가져올까요? 카운터에 있는데.”

“카운터에 대본이 있어요?”

“네. 연기 학원 다니거든요. 틈틈이 연습하고 있죠. 다닌 지는 좀 됐어요. 회사에서는 레슨을 안 시켜줘서.”

인기 있는 이지연에게만 투자를 했던 큐빅엔터.

눈앞의 심민정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이 미디어에 얼굴을 비치는 일은 극도로 적었다.

참 안타까웠지.

말만 그룹이고, 활동하는 건 늘 인기 멤버인 이지연 혼자였으니까.

‘대단하네.’

아마 다른 데서 일도 못 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기 학원도 사비로 다녔겠지.

회사에서는 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테고.

이 정도로 방치되면 심적으로 지치고 힘들어할 만도 한데.

지금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괜시리 내가 다 속이 답답해져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물었다.

“회사에는 연기 안 보여줬어요? 이젠 잘한다면서요.”

“예전에 회사에서 레슨받을 때까지만 해도 많이 보여줬죠. 그리고 드라마 끝난 직후에도 보여줬어요. 근데 제가 생각할 때 전 연기 천재 맞는데 소속사에서는 안 믿어주더라고요.”

‘연기 천재’ 같은 자잘한 건 일단 넘어가는 게 좋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으니.

“그때는 그때고요. 연기 잘해진 다음엔요?”

“안 보여줬어요. 어차피 계약도 끝나가겠다, 새로 시작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 딱 매니저님이 나타나니까 너무 좋은 거 있죠. 진짜 안 보여주길 잘했지. 저 원래 혼자 시작하려고 했어요. 오디션 보면서 차근차근 가려고요. 왜, 있잖아요. 회사에 들어갔다가 오디션도 마음대로 못 보게 하는 경우도 많고, 얘기 들어보면 신인배우가 기획사부터 찾는 게 꼭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아, 근데 HJ엔터는 제외. 매니저님은 믿을 만하니까.”

하하, 밝게 웃으며 말을 마쳤다.

성격은 밝은데, 기획사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긴, 7년 동안 고생했는데 말 다했지.

이미 연예계의 어두운 면에 대해 알 거 다 알기도 할 테고.

“그럼 갖고 있는 대본이 오디션 보려고 한 대본이에요?”

“네. 가져올까요? 아, 가져올게요. 잠시만요.”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향하는 그녀.

한 손에는 새로운 허니 브레드 접시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대본이 들려 있었다.

젠장. 나갈 때 계산하고 나가야겠다.

공짜로 먹고 가기엔 눈치 보여.

“많이 드세요. 더 먹고 싶으시면 말씀하시구요. 매니저님한테는 무한제공해드릴게요. 근데 저 만약에 계약하면 매니저님이 직접 관리해주시는 거 맞죠? 정채희 배우나 유현지 가수처럼.”

“네. 계약하면요.”

“대박.”

이쯤 되니 속에서 일말의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설마 예전에 내가 알아봤던 그 연기 재능이 엉망이 된 건 아닐까?

혹시 연기 학원에서 재능을 망쳐놓았다거나.

나는 큼, 작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이제 계약에 대해 얘기할 차례.

“그럼 오디션 보실래요?”

“이 드라마요?”

“아뇨, 회사 오디션이요.”

다른 연예인들처럼 이미 보여준 게 많다면 모를까, 그녀처럼 보여준 게 없으면 오디션을 보는 게 맞다.

내 말에 그녀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지금 바로 보여드릴게요.”

곧바로 대본을 펼치려 하길래 나는 손으로 막았다.

“이거 다 먹고 회사에 가서 보여주세요. 여기서는 다른 분들 시선도 있으니까.”

이미 옛날옛적부터 다른 손님들의 시선을 잔뜩 끌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튼 회사에서 진득하게 요목조목 뜯어보며 오디션을 보고 싶었다.

***

우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시선을 확 끌어 모았다.

내가 난데없이 미녀와 함께 나타났으니.

“···심민정 아니야?”

“심민정이 누군데.”

“레이니데이. 이지연 있는 데.”

“아, 레이니데이 멤버야? 해체했잖아. 그런데 왜 박실장님이랑 같이 있··· 헉! 설마?”

수군거리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는 모두 내가 비밀리에 다녀왔기 때문.

나는 심민정을 캐스팅한다는 걸 아버지와 윤본부장님, 그리고 최팀장님께만 말했다.

그것도 여기로 오는 길에.

‘이렇게 얘기가 잘 풀릴 줄은 몰랐거든.’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영락없이 연예계를 떠나려는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몰래 갔다가 이렇게 덜컥 사람을 데려가고 있다고 전하니 얼마나 놀라던지.

하물며 다른 직원들은 아무 정보도 없이 목격하게 됐으니 저렇게 수군거릴 만도 했다.

내가 그녀와 함께 이곳에 올 이유로는 하나밖에 떠오르는 게 없을 테니까.

“와. 왠지 막 벌써 스타 된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절 이렇게 바라본 적이 없었는데.”

“배우 했으면 진작에 스타 됐을 거예요.”

“그러니까요. 하. 진짜 재능이 너무 아깝다니까요?”

이제 나도 슬슬 저 자신감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힘든 나날을 보냈을 텐데도 밝은 모습을 보이는 게 대단하기는 한데.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객관적으로 판단한 거예요. 제가 재능이 있으니까 매니저님도 찾아오신 거잖아요? 틀린 말도 아니라는 거죠. 하하.”

생글거리는 미소와 발랄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내 입에서도 작게 웃음이 터졌다.

얼핏 장난기가 보이기도 하고 진심으로 미소 짓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멘탈이 되게 단단한가 보네.’

이건 단순히 긍정적이어서 될 게 아니야.

우리는 직원들의 시선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겼고, 4팀에 도착했다.

바깥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최팀장님 대신 윤본부장님이 미리 마중을 나와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와요.”

심민정은 주위에 잔뜩 모인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밝은 목소리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4팀에 합류하게 될 신인배우 심민정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도장 안 찍었잖아요.”

“그래서 합류하게 ‘될’이라고 했잖아요. 당찬 포부라고 생각해주세요. 오디션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자기암시랄까?”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윤본부장님을 바라봤다.

딱 봐도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 얼굴.

오는 길에 통화를 했다지만 그때 조수석엔 심민정이 있었고, 예고도 없이 급작스럽게 데려왔으니 궁금한 게 많겠지.

연예인으로서 그녀에 대한 매력도 잘 모르실 테고.

그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얘기 좀 하자.”

“예. 회의실 말고 연습실로 가요.”

나도 연기를 보기 전엔 딱히 말씀드릴 게 없으니까.

만약, 연기를 잘하면 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납득이 되겠지.

윤본부장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연습실로 가자는 내 말에서, 무슨 뜻인지 단번에 눈치 채신 듯했다.

“아직 안 본 거야?”

“네, 이제 보려고요. 전 예전에 가능성만 봤거든요.”

“음···.”

그는 입술이 마르는지 침을 바르고는 우리를 연습실로 이끌며 앞장섰다.

막상 연습실로 들어가니, 나도 살짝 긴장이 됐다.

그녀에게 재능이 있었다는 건 확실하고, 그녀 또한 자신의 재능을 알아 열심히 노력했다 하니 그리 불안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일단 연기부터 보자고.

그 재능을 잘 살렸다면 바로 도장 찍는 거다.

“시간 좀 드릴까요?”

“아뇨. 바로 해볼게요.”

나와 윤본부장님, 그리고 심민정까지 셋만 있는 연습실.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대답하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전직 아이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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