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 한잔 하실래요? >
혼란스럽고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던 1팀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균형.
강팀장이 다른 매니저들과 함께 고른 시나리오가 아주 처참하게 까이고, 본부장님께 한 소리 듣기까지 했다.
최실장이 골랐던 시나리오는 혼자 고른 데다가, 얼핏 보면 대박일 것 같기도 하여 참작됐지만.
강팀장이 고른 건 본부장과 대표가 보기에도 좀 아니었으니까.
“욕심이 과했던 거지. 목 밑에 칼날이 왔다갔다 하는데 무난한 걸로 골랐겠어?”
“맞는 것 같아요. 자기 능력 있다고 과시하고 싶어서 무리수 둔 거죠. 세상에 좀비 로맨스가 뭐예요.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근데 1팀은 다들 제정신인가? 혼자 고른 것도 아니라면서요.”
“그게 다 뭔 소용이야. 어차피 최종 컨펌은 강팀장님이 했을 텐데.”
“하긴. 그럼 밑에서 뭘 올려도 다 무용지물이죠.”
한가하게 담배를 피면서 남의 집 불구경하듯 가벼이 떠드는 다른 팀 매니저들.
최실장은 그 말을 듣고는 입꼬리가 씰룩씰룩 움직였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쭉 미끄러질 뻔했는데, 강팀장이 알아서 자신을 상대적 우위에 있게 만들어줬으니 고맙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사실 이 바닥에서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흥행 여부를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박한울의 능력이 그래서 대단한 거고, 그렇기 때문에 박한울 밑의 2인자가 되려는 것이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니까.
최실장은 방금 전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무안할까 봐, 그리고 좀 더 씹으라고 마음 속으로 말을 건네며,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머릿속엔 앞으로의 계획이 좀 더 구체화되었다.
박한울은 안목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신은 그의 밑에서 갖은 일을 모두 처리한다.
‘그래서 본부장님도 이렇게 하신 건가?’
안목이 좋은 대표님, 그 밑에서 효율과 합리를 추구하며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본부장님.
원래 본부장님처럼 2인자가 되는 게 목표였지, 그를 똑같이 따라하려고 한 건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지금의 그처럼 되는 게 목표가 되었다.
‘그러려면 강팀장도 숨 쉴 틈은 내줘야지.’
목표는 확고하게 정해졌으니, 이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움직여야 한다.
설령 4팀이 만들어진다 해도, 박한울이 3팀에 잔류할 지, 그가 팀장이 될지 실장이 될지, 어떻게 될지 지금으로선 아무도 모르는 일.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가 나오든 그에 따라 얼마든지 맞출 수 있게끔 강팀장은 최대한 이대로 살려놓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자신이 1팀을 완전히 맡아버리면 자유롭게 팀을 옮기기는 힘들어질 테니.
‘대신 그동안 능력은 계속 증명해야지.’
힘없는 말년 병장과, 실질적으로 소대를 이끌어가는 실세 상병.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과 얼추 비슷하다.
‘빨리 4팀 만들어졌으면 좋겠네.’
어제와 같은 맛을 계속 느낄 수 있게.
최실장은 대표님으로부터 내려온 시나리오 세 개를 떠올렸다.
이 시나리오를 누가 골랐는지는 뻔한 거였고, 그렇기 때문에 눈앞이 확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정답지가 있으니까 이렇게 일이 편하네.”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성호와 상의 끝에 결정한 하나의 시나리오.
뭘 골라도 흥행엔 상관없으니 오히려 더 선택의 기준이 다양해지고 넓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최실장은 입술을 핥으며 입매를 끌어올렸다.
흥행은 걱정할 필요 없게 됐으니, 자신은 다른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겠나.
그는 담배를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성공’이라는 것이 손아귀에 잡히는 듯한 느낌이다.
***
연예 언론의 사무실.
김기자와 후배는 핸드폰으로 방송을 보며, 노트북으로는 키보드를 쉴 새 없이 타이핑해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샴페인 노바와 유현지가 함께 나오고 있는 예능 ‘비하인드’.
원래 이렇게 실시간으로 기사를 작성할 때는, 예능이나 뭐나 아무런 감흥도 없이 작성하고는 하는데.
김기자는 문득 자신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 있다는 걸 깨닫고는 흠칫했다.
“···얘 대박 나겠네.”
시선은 방송이 나오고 있는 핸드폰에 둔 채로,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말하자.
후배 또한 자신과 같이 기사를 작성하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유현지 얘 이미 돌판에서 실력은 완전 인정 받았잖아요. 이제 인성이랑 성격, 매력 같은 것도 대중들한테 어필 됐으니까 날아오를 일만 남은 거죠. 요거요거, 이 방송을 기점으로.”
딸깍, 딸깍.
기사 하나를 올리고, 새로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풉. 근데 YU엔터는 어쩌냐? 와! 지금쯤이면 아주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겠네. 어떻게 이런 애를 놓치지? 이제는 아예 유현지가 샴페인 노바 완전히 제꼈지?”
후배가 실시간 차트를 확인하며 큭큭, 웃었다.
“이미 제꼈죠. 인기로 보나 팬덤 화력으로 보나. 규모는 얼추 비슷하려나? 근데 암튼 지금 차트는 쭉쭉 올라가고 있어요. 이러다가 오늘 안에 10위 안쪽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는데요?”
현재 순위는 13위.
유현지 팬들 하나하나의 충성심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지만 아직 규모로 보나 대중적 인지도로 보나 부족한 것도 사실.
그러나 방송이 끝난 뒤에는 이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와! 방금 진짜 귀여웠다. 인정? 웃는 게 무슨.... 하여간 피디가 센스가 있어. 그래, 이런 장면을 보여줘야지.”
연예인들이 TV에서 보여주는 건 전부 다 거짓이라고 외쳐댔던 선배 마저도 이렇게 반응하지 않는가.
시청자들도 눈이 있고, 기자인 자신들도 눈이 있다.
실제 인성과 성격이 정말 훤히 보이는 경우가 바로 지금.
유현지는 정말로 꾸밈없이 따스하고, 귀여웠으며, 예쁘고, 아껴주고 싶었다.
“···얘 진짜 대박 났으면 좋겠네.”
‘대박 나겠네.’도 아니고 ‘대박 났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무심코 튀어나오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자신이 이런 말을 내뱉은 것 때문에 놀라서.
그런데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유현지의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말투가 자신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켰으니까.
“진짜 대박 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연예부 기자들은 때로는 무자비한 하이에나 같기도 하고, 때로는 냉혹한 뱀과 같기도 하다.
그들의 본거지인 사무실은 얼마나 차갑고 딱딱할까.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다.
지금 이곳에서는 단지 흐뭇하게 미소 짓는 두 명의 삼촌팬들만 있을 뿐이었다.
전국에서 실시간으로 양산되고 있는 여타 팬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평범한 현상에 불과했다.
***
[유현지&샴페인 노바. 과거 함께 했던 연습생 시절 대공개!]
[예능 첫 출연 유현지! <비하인드>서 매력 뿜뿜하다!]
[신인 선후배의 평범한 일상. 음악으론 경쟁해도 여기서는 아니에요~ 샴페인 노바, 유현지 훈훈한 그림.]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끝난 지금도 기사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
방송이 너무 잘 나왔기 때문인지 긍정적인 기사들만 있을 뿐, 부정적인 반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커뮤니티와 SNS 또한 마찬가지.
-와 얘 ㅈㄴ귀여워서 찾아봤는데 무대 위는 완전 딴판이네··· 음방 교차편집 ㄹㅇ 미쳤다.
└’얘’가 누굴 말하는 거임? 유현지 맞지?
└ㅇㅇ 샴페인 노바도 귀엽긴 한데 유현지한테 입덕함. 나 어떡하냐;;; 한번에 훅 빠져버린 것 같 같은데.
└삐빅! 정상입니다. ㅋㅋㅋㅋ원래 현지 팬들이 다 그렇게 훅 빠짐ㅋㅋㅋ
-샴페인 노바 애들도 너무 착한 것 같은데? 보는 내내 미소 지었음ㅎㅎㅎ 힐링된다.
└이쁜 애들 잔뜩 나와서 기분 좋았는데 얘네들 얘기하는 거 보니까 진짜 마음까지 따뜻해짐. 오늘 상사 때매 개빡쳤었다가 지금은 계속 실실 쪼개고 있음ㅋㅋㅋㅋ
인터넷 반응을 보는 것도 정말 중독이라니까.
기분이 끝내주잖아.
대중들에게로부터 기대했던 효과들이 바로바로 나오고 있다.
음악방송을 아무리 해봤자, 음방 1위를 해봤자, 라디오를 나가봤자, 사실 대중들의 인지도에는 큰 변화가 없다.
서서히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다곤 하나, 역시 인기예능 하나만 못하는 게 사실.
“역시 주말 예능에서 화제 되는 게 최고라니까.”
증거는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뮤비나 무대 영상 등 현지와 관련된 모든 것들의 조회수가 일제히 상승하고 있었고.
음원 사이트에서도 변화가 나타났으니까.
[10. 구름 위의 꿈 – 유현지]
방송 도중에 13위까지 올랐던 차트 순위가 지금 막 10위에 안착했다.
콘크리트 팬덤이 즐비한 최상위 순위권에서, 데뷔곡으로!
나는 커다랗게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아내고는, 조수석에 앉은 현지에게 이 화면을 보여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현지야, 축하해. 10위 됐다.”
그녀의 첫 예능 방송을 기념하여 우리는 함께 방송을 모니터링했다.
연습실이나 소회의실이 아닌, 그녀의 집 앞에서.
사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와 본방 시작 전에 집에 바래다주려 했는데.
현지가 차에서 내리지 않았거든.
그래서 우리는 차 안에서 함께 방송을 보고 이렇게 반응 모니터링까지 함께 하는 중이었다.
현지는 내가 내민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행사를 하고 와서 참 화려하고도 화사하게 꾸몄다.
그녀는 잔뜩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을 배시시 흘리며 말했다.
“방송이 이렇게 재밌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지루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지루하긴 무슨. 사람들 반응 못 봤어? 힐링됐다잖아. 다들 너랑 걔네들한테 웃긴 걸 바라는 게 아니라니까?”
특히 현지에게는 천사 같다는 반응도 있었고, 순박한 시골 소녀 같다는 반응도 있었다.
누가 천사에게 큰 웃음을 바라겠나.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이제 음방 활동은 이번주가 마지막일 거야. 반응 크게 오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보자.”
“네.”
이미 평일 음방은 나가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 활동도 어느덧 막바지라는 거지.
“내일은 저녁에 행사만 나갈 거니까 푹 쉬어. 그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활동하느라 고생 많았어.”
이젠 송하연의 콘서트에 게스트를 나가는 것을 기점으로, 활동을 접고 슬슬 후속곡 준비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곡 작업을 이전과 같이 송하연과 할 생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선 그녀와 말을 맞춰봐야겠지만.
‘아마 하겠지.’
콘서트만 끝나면 그녀도 한가해질 테고.
그녀가 작업하고 싶어 한다는 건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으니까.
“오빠.”
“응.”
부름에 대답하며 그녀와 정면으로 눈을 맞췄다.
늦은 저녁,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이 행사를 마치고 와서 화려하게 꾸민 그녀의 옆얼굴에 내려앉았다.
이렇게 보니 귀엽다기보다는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보살펴주고 싶은 순박한 시골 소녀 같지도 않고, 왠지 마음 깊숙한 곳까지 숭고해져야만 할 것 같은 천사 같지도 않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그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와 같았다. 그런데 좀 말도 안 되게 심하게 예쁜.
그녀는 옅은 미소를 입에 머금고는 말했다.
“술 한잔 하실래요?”
술? 갑자기?
고개를 갸웃할 뻔했는데, 현지의 내일 스케줄이 저녁 행사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에 먹자. 내일은 채희 광고 건으로 미팅이 잡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찼어.”
일본 출장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면 여기서 다 해결해놓고 가야 한다.
미팅도 하고, 그들이 가져온 콘티도 확인하고, 어쩌면 계약까지 한번에 처리할 수도 있다.
물론 그건 내가 직접 처리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옆에 있기는 해야지. 상황 돌아가는 것도 파악하고.
“네, 알겠어요. 그럼 내일은 다른 매니저님 오시는 거예요?”
“응. 잘 다녀와. 아마 내일부턴 관객들 호응도 훨씬 더 클걸?”
***
집으로 들어온 유현지.
그녀는 방 안에서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머릿속에는 녹화 당시 들었던 그녀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방송에도 편집되지 않고 나왔던 대화.
-저는 사실 처음엔 데뷔한다는 게 좋긴 했었는데, 언니들이랑 계속 같이 붙어있게 되니까 좀 불편하긴 했었어요. 갑자기 어느 순간 확 풀려버려서 다행이지.
-맞아, 맞아. 나도 그랬어. 그때였잖아. 수연 언니가 술주정 부린 날.
불편한 관계를 확 풀어버렸다는 술주정.
-그냥 간단했어요. 저 언니가 애교를 부리더라고요. 진짜 완전 혀 짧아져가지고. 어떻게 했냐면요.
매니저와 불편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을 정채희 선배처럼 아주 편하게 대하지도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데.
“이렇게 하는 건가?”
유현지는 방 문이 꽉 닫힌 걸 확인하고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며 작게 입을 벌렸다.
“이..쁘다고··· 말해됴.”
화아악-! 붉어지는 얼굴.
그렇게 거울 속과 거울 밖, 방 안에는 붉디붉은 토마토 두 개가 나란히 놓이게 되었다.
이게 맞나?
< 술 한잔 하실래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