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1위 >
최근 1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발을 까딱 잘못 내디뎠다간 그대로 쩌저적.
덕분에 1팀의 직원들은 매일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 시작은 모두 최실장이 이성호를 데려오면서부터였다.
“이성호 선배님은 제가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굳이 강팀장에게 그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당신은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
그때 강팀장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해졌지만, 강팀장이라고 별반 다른 수단은 없었다.
이성호가 그러기로 했다는데 뭐.
그렇게 신경만 잔뜩 곤두세우게 된 채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나리오 있는 거 몽땅 다 가져와!”
강팀장은 최실장이 보고 있든 말든 대놓고 소리쳤고, 최실장은 그걸 보며 차갑게 눈을 가라앉혔다.
“지금 남는 애들 누구 있어? 너랑 너랑 너. 따라와.”
최실장이 강팀장과 대립하는 구도가 되어, 강팀장은 질투와 조바심, 그리고 열등감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지금 강팀장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철철 넘쳐 흘렀다.
직원들은 강팀장의 강한 목소리에, 최실장의 눈치를 보며 그의 뒤를 따랐고.
최실장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시나리오를 한가득 들고 소회의실로 들어가는 이유야 뻔한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건 안 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들기는 한데 흥행은 완전 죽 쑬 것 같아가지고. 그래도 체면이 있는데, 흥행을 아예 신경 안 쓸 수는 없잖아?
분명히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는 마음에 든다고 말했었지만.
이성호의 태도는 며칠 만에 바뀌어버렸다.
여전히 시나리오는 마음에 드는 눈치기는 했는데.
태도가 바뀐 이유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본부장에게 보고한 다음날, 이성호에게 이러한 말을 들었으니.
‘박한울.’
일본에서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드라마의 인기와 정채희의 인기.
그리고 코어 팬들을 양산하고 있는 유현지.
지금까지 보여준 성과로 인해, 적어도 이 회사 안에서만큼은 그의 안목을 의심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고.
그의 말은, 처음부터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못 박았던 이성호의 마음조차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어떠한 배우든지 망하게 될 작품에 열정 있게 뛰어들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를 꽉 다문 최실장의 턱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왔다.
***
이런 걸 드라마틱한 효과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정해진 수순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주 뮤직캠프 1위는··· 유현지의 구름 위의 꿈! 축하드립니다!”
팍! 은박지 꽃가루가 터지며 무대 위로 흩날린다.
맨 앞에 서 있는 유현지와 샴페인 노바의 얼굴에 모두 미소가 자리한다.
대신 박수는 샴페인 노바와 그 외 다른 이들만 치고 있었고, 유현지는 트로피를 받고 있었다.
샴페인 노바는 지금이 가장 1위 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안타깝게 됐다.
그래도 다음에 현지랑 시기만 겹치지 않으면 언젠가 1위를 할 수 있겠지.
나는 다른 회사의 가수를 걱정하는 쓰잘데기 없는 짓은 금세 집어치웠다.
내 코가 석 자고, 갈 길도 멀었으며, 나한테는 우리 애들이 최우선이다.
무대 위에서 한 손에는 트로피를, 다른 한 손에는 마이크를 쥐고 있는 현지를 바라봤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고 손이 달달 떨리고 있다.
우리가 출연한 ‘뮤직 아메리카노’.
송하연의 커버곡, 샴페인 노바의 커버곡, 그리고 그녀의 싱글곡까지 세 개의 무대가 방송되며 유입이 많이 늘어났다.
아이돌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많이 어필이 됐기 때문이다.
원래 누가 얼마나 핫하든 아이돌에 관심이 없으면 아예 쳐다도 보지 않는데, 그녀가 그 프로그램에서 실력을 증명하며 여기저기 짤이 떠돈 덕분이기도 했다.
이에, 나는 오늘 현지가 1위를 할 것을 알았고, 우리 회사도 그러했으며, 댄스팀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유현지 그녀만큼은 아니었나 보다.
아니, 예상을 했어도 실제로 상황에 닥치니 감격스러움을 참을 수 없는 건가?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댔다.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 차올랐으며, 목소리도 덜덜 떨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1위를 처음··· 하는데요···.”
당연하다. 이게 데뷔곡이니까.
나는 픽, 웃음이 나면서도 어쩐지 코 끝이 시큰해졌다.
원체 긴장을 안 하는 아인데, 우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 없이 귀여우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린다.
“아무것도 없는 제게 선뜻 손을 내밀어주시고··· 저보다 저를 더 믿어주시고··· 언제나··· 언제나 응원해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왠지, 저건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이게 연예대상만큼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수상소감에 항상 주위 사람들을 언급하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아진다.
뿌듯함과 보람이 물밀듯이 차오르고, 기쁨이 배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이를 악 물며 힘껏 박수를 쳤다.
그렇게 눈물을 참았는데, 눈동자가 벌게지는 것까지는 어떻게 막지 못했다.
댄스팀이 나를 보며 큭큭, 웃고 있다.
스피커에서 ‘구름 위의 꿈’의 반주가 나오고 무대 위의 가수들이 모두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이제 앵콜 무대 차례.
앵콜 무대에서는 목소리가 깔리지 않는 순수 MR만 나오기 때문에, 수많은 아이돌들의 흑역사가 되곤 한다.
그리고 지금의 이 앵콜 무대 또한 앞으로의 경력에서도 그녀의 역대 최악의 라이브로 손꼽힐 무대가 되었다.
“미룬하그 달르서어어. 다찌 않으으으···.”
엉엉 우느라고 노래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거든.
다만 역대 최악으로 라이브가 되지 않았는데도, 스텝들이나 댄서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어쩐지 따스한 미소밖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MR이 끊기고 카메라가 꺼지며 앵콜 무대의 끝을 알렸다.
이제 스피커에서는 그녀의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흐으으···!”
마이크를 손에 들고 팔목으로 눈물을 툭툭 찍어내는 현지.
그녀는 터덜터덜 무대 아래로 내려왔고, 내가 먼저 축하를 건네기도 전에 먼저 댄스팀에게 둘려싸여 격한 축하를 받아야만 했다.
“꺄아아아! 현지야 축하해!”
“유현지가 솔로퀸이다!”
“유현지! 킹현지!”
“첫 1위 너무 축하해!”
그들이 축하하면 할수록 현지의 눈물샘은 더욱더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 광대가 내려오지를 않네.
아무래도 나는 돌아가는 길에 축하해줘야 할 것 같다.
“현지야 가자.”
“···.”
내 말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현지의 발.
그녀는 팔목으로 흐르는 눈물을 막아내면서도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잘못 생각했나 보다.
역시 축하는 바로바로 해줘야지.
“1위 축하해.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줘서 고마워.”
고개를 살짝 끄덕거린 그녀가 물기가 잔뜩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감사합니다.”
길고 긴 말 따위는 필요 없었다.
짧은 말로도 진심은 내게 고스란히 닿았으니까.
“이제 가자.”
“네.”
음악방송 첫 번째 1위.
이 일을 하지 않았을 때는 별거 아닌 걸로 치부하고 아무런 관심도, 감흥도 없었으나.
지금의 나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몸이 너무 가벼워.
***
음악방송이 끝나고 미처 차에 타기도 전.
나는 윤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회사 앞 삼겹살 집으로 와! 오늘 파티다아!
소리가 울리는 걸로 보아,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나는 현지에게 물었다.
“삼겹살 먹는다는데 넌 어떡할래?”
“저도 갈래요.”
눈이 벌게진 채로 방긋 미소 짓는다.
어른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영락없는 꼬맹이다.
나는 그대로 현지와 함께 삼겹살 집으로 향했다.
차의 오디오에서는 당연히 현지의 곡만 반복으로 재생하고 있었다.
듣고 또 들어도 너무 좋잖아 이거?
역시 1위곡은 달라도 뭐가 다르지.
회사에 주차를 하고 나와, 삼겹살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마침 핸드폰에서 현지의 곡으로 설정한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은 송하연.
“현지야, 먼저 들어가. 난 전화 받고 들어갈게.”
“네, 빨리 오세요.”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전화를 받았다.
아마 축하해주려는 거겠지.
오는 길에 채희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축하를 보내줬던 것처럼.
“예, 하연 씨.”
-1위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하연 씨가 곡을 잘 만들어주셔서 그렇죠.”
그런데 용건은 따로 있었나 보다.
-제 콘서트에 게스트로 현지 씨 불러도 될까요?
“네?”
콘서트 게스트?
우리에겐 좋은 일이다.
무대를 즐기려고 오는 그 수만 명 앞에서 라이브를 선보일 수 있다는 거니까.
일반 대중들, 그리고 직접 콘서트에 오는 사람들의 수를 똑같이 놓고 봤을 때, 후자에 더 무게가 실리는 건 가수의 입장에서나 회사의 입장에서도 당연한 거고.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죠. 그런데 콘서트 준비 다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 다 끝나진 않았어요. 그리고 무대 하나 추가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요.
송하연은 유현지가 음방에서 1위 한 번 했다고 아쉬워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즉, 이건 유현지에게 기회를 주는 셈.
‘그래, 이 정도면···.’
사실 어차피 그녀의 앨범 작업은 도와줄 생각이었다.
단지, 당장 바로 하자고 할까 봐 애매하게 대답했을 뿐인데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이야.
“저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서 상의하고 말씀드릴게요. 아마 될 거예요.”
나는 대답을 잠시 미뤘다.
어차피 송하연도 이를 알고 있을 텐데, 굳이 나한테 먼저 전화를 한 것이다.
-네,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장난기가 슬쩍 묻어나는 밝은 목소리.
나는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윤팀장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껴안으려는 건가? 아무리 기뻐도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하연 씨한테 전화 왔습니다. 콘서트에서 게스트로 현지 부르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팀장님의 팔이 스르르 내려갔다.
대신 입매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당연히 콜이지! 마셔!”
나는 이 다음 날, 입사 후 처음으로 지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내게 눈치를 주거나 혼내지는 않았다.
***
다시 고양시 덕양구의 스튜디오.
정채희는 간이의자에 앉아 담담한 얼굴로 대본을 천천히 살피고 있었고, 박송이는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어쩐지 힘이 없어 보여서.
박한울과 함께 있을 때랑은 너무 다른 텐션이었다.
박송이는 짧게 혀를 차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간이의자를 직접 들고서.
“야, 원래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
“네?”
대답을 해주기는커녕 채희의 옆에 태연하게 의자를 놓고 앉는다.
채희는 갑자기 생뚱맞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토끼눈을 뜨고 있었는데,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박송이는 입을 열었다.
“눈이 있으면 주변을 봐봐. 뭐 달라진 거 안 느껴져?”
정채희의 시선이 현장을 두루 훑었다.
“어? 조용하네요?”
“평소엔 어땠었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대답했다.
“좀 더··· 활력 넘치고 발랄한···?”
박송이는 그대로 채희에게 턱짓했다.
“그래. 좀 더 활력 넘치고 발랄했지. 너도 그렇고 현장도 그렇고.”
“아···.”
이미 현장의 활력소가 된 채희가 박한울이 없을 때에는 이렇게 대본만 주로 살피니, 어쩐지 스텝들은 조금 아쉬워 보였다.
대본을 살피는 게 절대 나쁜 건 아닌데도 말이다.
“너 너무 매니저한테 의지하는 거 아냐? 암만 부적이라도 그렇지, 그 사람이 언제까지 네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조금 정신적으로 자립할 필요가-”
그렇게 말을 하던 도중, 채희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박송이의 입이 다물려졌다.
채희는 싱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 이제 그렇게 의지 안 해요. 오빠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요. 지금까지 너무 도움을 많이 받아서 앞으로도 그러면 너무 염치가 없을 것 같기도 하구요. 이젠 저도 도와줘야죠. 해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박송이는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애가 현장에서 이렇게 대본만 살펴?”
허나, 박송이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채희가 현장에서 굳이 대본을 살피지 않았던 이유는.
박한울이 모든 걸 다시 되짚어줬기 때문이었다는 걸.
그래서 채희는 어깨를 여유롭게 으쓱이며 대답할 수 있었다.
“좀 더 좋은 연기 보이고 싶어서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퍽이나 그러겠다.”
하지만 잠시 후.
둘이 촬영에 들어갔을 때, 박송이는 느낄 수 있었다.
괜한 데 신경을 써줬다고.
‘부적이 없어도 괴물인데··· 내가 누굴 걱정한 거야?’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밝은 목소리로 외치는 정채희를, 박송이는 질린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첫 1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