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57화 (57/170)

< 주문 효과가 바꼈나 봐요 >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스튜디오.

우리는 스태프들이 꾸민 세트를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인사를 돌았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밝게 인사를 하고 다니니, 스태프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폈다.

예의바른 채희의 성격을 보며, 이번 영화는 걱정을 덜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테고, 아직 크랭크인이라 체력이 받쳐줘서 쉽게 웃음이 나오는 걸지도 몰랐다.

감독님은 초췌하지만 생기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셨고.

크랭크인이라서 구경하러 오신 조수연 작가님은 감독님과는 대비되게 아주 푹 쉬어서 번쩍번쩍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주셨다.

그렇게 다른 스태프들에게까지 모두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이 영화의 또다른 주연인 최종윤 배우에게 향했다.

그는 이미 일찍이 일어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너덜너덜한 대본을 들고,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채희의 90도 인사에 최종윤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라고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하게 해주세요. 그래야 연기도 더 자연스럽게 잘 나올 거예요. 그리고 미리 합 맞춰보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채희가 갓 전입한 신병처럼 딱딱하게 대답했다.

“저도 먼저 맞춰보자고 해도 될까요? 채희 씨가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요. 많이 밀리지 않으려면 좀 귀찮게 해드려야 할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저는 당연히 괜찮죠! 얼마든지요! 아무때나 상관없어요!”

시종일관 너무 정중하게 대하는 최종윤의 태도에 채희가 어려워하고 있었다.

경력 차이가 많이 나는 선배이기도 하니까.

그냥 얘한테는 박송이 같은 사람이 딱 잘 맞나 보다.

박송이가 아무리 까칠하게 대해도 채희는 다 튕겨내고 오히려 더 편하게 대하고는 했다.

아, 그래서 나한테도 가끔 건방지게 구는 건가?

아무래도 언제 한 번 젠틀의 끝판왕을 보여줘 봐야겠다.

어떻게 반응할까?

“매니저님, 식사는 하셨어요?”

최종윤이 묻는 질문에, 나는 채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채희가 해준 목살찌개 먹고 왔습니다.”

“목살찌개요?”

“네, 찌개긴 찌갠데 목살 반, 국물 반이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채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오빠가 장난 치시는 거예요. 아까는 진짜 맛있게 드셨어요.”

“누가 맛없었대? 맛있었어, 목살찌개.”

“누가 봐도 김치찌개였잖아요. 근데 고기가 좀 더 들어간.”

이를 아득 물고 내뱉는 목소리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최종윤 배우는 그런 우리를 보고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 좋네.’

최종윤 배우가 나한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는 덕분일까?

그는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채희와 한참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최대한 맞춰주고 배려해주려는 마음으로 한가득이었다.

잘됐지.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모두 분위기가 좋으니 최상의 연기력을 펼쳐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오빠, 오늘은 송이 선배님 안 나오시죠?”

“응. 안 나온다고 들었어. 오늘 촬영 씬에도 없잖아.”

“아쉽다. 오늘 컨디션 진짜 좋은데.”

왜? 컨디션 좋으니까 이참에 아예 기를 확 눌러버리려고?

라고 내뱉으며 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옆에 있던 최종윤의 표정을 보니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그의 웃는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져버렸으니까.

***

슛에 들어가기 전.

채희는 평소와는 약간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다 고쳐진 건가···?’

원래 본능적으로 매니저가 있는 쪽으로 신경을 기울이게 됐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스스로 자신감이 생겨서 그런 걸까, 아니면 실력이 많이 늘었기 때문에?

극복에는 어쩌면 이렇다 할 드라마틱한 계기가 필요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지금까지 함께 두 작품을 해오고, 함께 연습을 하며 서서히.

점차 공포증이 옅어지다가 종래에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아니··· 오빠 자체가 계기이기는 하지.’

그가 없었다면 이렇게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공포증이 심했을 때, 그는 아주 큰 역할을 해주었다.

채희는 저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박한울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언제나 효과가 좋았던 그 주문을 속으로 되뇌었다.

‘행운을 깃들게 해주는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이제 공포나 부담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 100% 확신할 수는 없기는 한데 이제는 공포증도 극복한 것 같았고, 박한울이 또라이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이 주문을 외우니 마음이 더더욱 편하게 이완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안 봤다가 봐서 그런가.’

아까 오빠에게도 말했었는데, 역시 오늘은 컨디션이 매우 좋은 것 같았다.

부적의 효험이 더 높아졌나?

채희는 매니저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쪽을 바라보는 스태프들의 기대가 피부 위로 느껴지고 있었고, 베테랑 최종윤 선배가 진심을 다해 연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이러한 것들에 그저 덤덤하기만 했다.

마치 자신의 매니저와 함께 연습을 하듯 안락한 느낌마저 든다.

채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캐릭터에 이입하여 감정을 끌어올렸다.

집중력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진짜 자신이 ‘이연서’가 된 듯한 기묘한 감각.

가끔, 아주 가끔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했던 그 느낌이 지금 손끝에 닿아 찰랑거리고 있었다.

왜인지.

지금 이 느낌을 꼭 기억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이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연기해야 할 것 같았다.

“후우-“

얕은 숨을 길게 내쉬며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고, 그녀의 눈빛은 더욱더 깊어졌다.

채희는 마주보는 최종윤의 눈에 이채가 돌며 당황하는 게 보였으나, 그녀는 단지 손끝에 찰랑이는 그 느낌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참 타이밍이 좋게도.

“레디-“

감독님의 사인이 천천히 울려 퍼졌다.

원래는 준비됐는지 묻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어쩌면 이전에 겪지 못했던 초집중상태인 자신을 꿰뚫어본 걸지도 모르겠다.

“액션!”

사인이 떨어지고.

정채희, 아니 ‘이연서’의 얼굴근육이 미세하게 조정되기 시작했다.

의지에 따른 명령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성격, 습관, 경험, 감정, 생각에 의해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표정.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진정한 ‘메소드’를 난생 처음으로 살짝 맛보듯 경험할 수 있었다.

***

“컷! 오케이.”

오케이 사인을 외치시고는 침을 꿀꺽 삼키는 구선학 감독님.

감독님은 채희를 멍하니 바라봤다가 허겁지겁 방금 찍은 장면을 모니터링했다.

그리고 채희와 함께 연기를 펼친 최종윤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었고.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서로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마치 ‘봤냐?’하고 묻듯이.

모두 방금 전 씬에서 채희가 보여준 연기 때문이었다.

카메라가 아닌 육안으로 봐도 느껴지는, 빨려 들어갈 듯한 흡입력.

그리고 평소와는 달랐던 집중력과 캐릭터 소화력.

이곳에서 그녀를 지켜본 모두는, 강제로 몰입이 되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메소드···.’

개나 소나 한다는 반쪽짜리 메소드가 아니었다.

전세계를 뒤져봐도 아주 소수의 배우들에게만 허락된 영역.

비록 완전하지는 않은 듯했지만, 그녀는 지금 평소의 연기와는 그 궤를 달리하는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봤다.

오케이 사인이 버튼이라도 되는 듯.

모두를 경악케 만든 연기를 펼쳤던 그녀가 발갛게 젖은 얼굴로 걸어온다.

그 얼굴에서는 방금 전의 그 강력했던 연기를 펼쳤던 것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연서’가 아닌 채희의 모습.

나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설마 내가 잘못 보기라도 한 건가?

그런 연기를 해놓고 이렇게 바로 빠져나온다고?

“오빠. 저 뭔가 느낌이 이상해요. 오빠도 봤어요?”

흥분한 듯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뿐.

감정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배우들은 굳이 메소드가 아니더라도 감정을 수습하는 게 쉽지 않다던데.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메소드에 대한 지식을 잠깐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내가 이론에 빠삭한 전문가도 아니고, 사실 메소드에 대해 떠도는 정보들이 죄다 낭설일 수도 있잖아?

위험하다느니, 어쩌다느니,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느니.

그리고 일단, 지금 채희의 모습에서는 위험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금 연기도 미친듯이 끝내줬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기분은 어때? 느낌이라든가.”

“엄청 좋았어요! 집중이 너무 잘 돼서··· 이런 느낌은 못 받았었는데 약간-”

빠르게 말을 잇다가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는지, 눈이 커진다.

“설마 이거 메소드나 뭐 그런 건 아니겠죠? 와. 진짜 이게 말로만 듣던 그거? 느낌이 뭔가 다르다 했더니.”

“혹시 탈력감 든다거나 감정에서 못 헤어나오겠다는 느낌은 안 들었고?”

“···전혀요. 그럼··· 메소드 아닌가? 아니, 그래도 살짝은 맞았던 것 같은데···. 요만큼?”

평소와 같은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소드 때문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확인.

진짜 메소드를 하는 이들 중 그녀가 특별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완전한 메소드가 아니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가능성이 높은 건 아무래도 전자 같았지만.

나는 머릿속이 금방 팽팽해졌다.

만약, 그녀가 정말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특별한 체질인데다가, 메소드를 조절하는 법을 익혀서 적재적소에 써먹을 수 있게 된다면?

정말로 채희에게는 메소드가 자신을 갉아먹는 양날의 검이 아니라면?

나는 눈을 번뜩이며 채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다는 격이지 않은가.

“채희야. 우리 메소드라는 거 한 번 연습해볼까?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거야?”

내 질문에 채희는 눈을 살며시 내리깔며 대답했다.

“···주···문.”

“···응?”

“그··· 확실하진 않은데··· 아무래도 주문 효과가 바꼈나 봐요···.”

아무래도 디메리트를 없애주는 주문은, 메리트를 주는 쪽으로 진화한 모양이다.

***

일본.

가깝고도 먼 그 나라에서는, 지금 전국적으로 커다란 열풍이 불어닥치기 일보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

젊고 뜨거운 감성을 녹여낸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10대, 20대, 30대 사이에서 그 인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할 기미가 스멀스멀 보이고 있었다.

그 시기는 정확히 채희의 비중이 팍 늘어나기 시작한 5회가 방송되면서부터였다.

“너 어제 방송 봤어?”

“헌만사?”

“어? 헌만사가 뭐야?”

“헌팅에서 만난 사이. 한국에선 이렇게 줄여부른대.”

어디를 가도 드라마의 얘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카페, 식당, 학교, 직장, 백화점···.

드라마에 나오는 ‘신수아’의 스타일을 따라하고, 화장품 가게나 옷가게에서도 ‘신수아’의 사진을 걸고 비슷한 스타일을 진열하고 있었다.

“···미쳤네.”

일본으로 유학을 온 지 3년이 지난 한국인.

그녀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드라마의 인기에, 그리고 정채희의 인기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느낌은 3년 동안 있으면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크게 인기를 끌었던 한국의 드라마, 영화, 아이돌도 종종 있었으나.

이렇게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뻥!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이건 백퍼 떡상각이다.”

한국에 안 들어간 지 오래이긴 하지만, 인터넷으로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꾸준히 지켜봤고, 여러가지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누가 얼마나 인기가 있고, 뭐가 화제가 되고 있는지 등등.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정채희의 인기는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훨씬 더 높아질 거라고.

그것도 아주 가까운 시일 안으로.

< 주문 효과가 바꼈나 봐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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