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56화 (56/170)

< 첫 만남 >

공용 대기실, 우리 파티션의 공기는 평소보다 높게 올라가 있었다.

나는 상기된 현지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팬들한테 인사 잘하고, 많이 웃어줘. 밥 먹었냐고도 물어보고.”

오늘은 드디어 팬들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날.

부디 인터넷에서 그랬던 것처럼 열정적으로 응원해줬으면 좋겠는데, 팬들도 이번이 처음이라 많이 어수선할 것 같았다.

현지도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거고.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떨려요.”

저번에 뮤비 티저가 나올 때, 그녀는 떨린다는 말을 내뱉는 것과 달리 전혀 떨려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척 보기에도 많이 떨려 보인다.

상기된 볼, 설레 하는 표정, 그리고 평소보다 더 들떠 있는 눈.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팬들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첫 대면.

지금 현지보다 더 떨리면 떨렸지, 덜 떨리지는 않으리라.

인터넷에서 본 그들의 반응은 정말 최정상 보이그룹 코어팬 저리 가라였으니까.

“이제 가자.”

“네.”

대기실 문을 열면 바로 앞에 공개홀의 문이 보인다.

지금은 꽉 닫혀 있지만 팬들은 이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방금 전 팬들이 줄을 서서 입장했을 때의 그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 때문에 현지가 이렇게 더 떨려 하는 거고.

우리는 그 입구 옆에 있는 계단 쪽 통로로 돌아갔다.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복도는 여전히 평소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저 안에선 팬들도 스태프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마침내 무대로 올라가기 전, 거울이 있는 작은 대기 공간 안에서 우리는 멈춰 섰다.

현지는 거울을 보며 심호흡했다.

이제 살짝 고개만 내밀어도 팬들을 볼 수 있다.

“현지야.”

“네.”

딱딱한 표정.

현지도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안다는 걸 이제 처음 알았다.

가슴에 손을 올리며 길게 숨을 내쉬는 게,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모양이다.

그녀의 눈은 또렷하게 빛나 내 눈을 직시했다.

“팬들 즐겁게 해드려야지. 신나게 놀고 와.”

“아···. 네.”

그녀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듯했다.

“이제 올라가시면 되는데, 무대 전에 팬들이랑 너무 오래 말하지는 마세요. 피디님이 말씀하시면 바로 준비하셔야 합니다.”

조연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현지가 평소보다 무거우면서도 들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무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의 가림막 사이로 현지가 잠깐 모습을 드러낸 걸 보고 팬들이 소리를 냈다.

그리고 철컹철컹 계단 올라가는 소리에 팬들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마침내 짧은 계단을 오르고 조명이 내리는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팬들은 고요했던 공개홀이 콘서트장이라도 된 것처럼 아낌없이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귀를 울리는 그 커다란 소리에 무대 위로 올라가라고 했던 조연출이 무심코 탄성을 내뱉었다.

“와.”

내 시선이 조연출에게 향했고,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큰 소리는 보통 거르고 거른 코어들만 낼 수 있는 소린데, 역시 라이징 스타답네요.”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라이징 스타.

맞지. 곧이라도 구름 위로 솟구칠 만큼 무서운 기세로 올라가는 라이징 스타.

***

떨려 죽을 것 같았다.

우연히 식당에서 보게 된 유현지의 무대.

그 한 번의 무대, 한 번의 미소는 복학생 김유민이 여기까지 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김유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친구한테 듣기로는 무대 앞쪽에 많아야 스무 명쯤 서서 응원하는 거라고 했는데, 실상은 달랐다.

좌석이 꽉 차 있지 않은가.

이게 음방의 배려 덕분인지, 아니면 인기가 많아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괜시리 뿌듯해지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실 무대의 바로 앞에서 보는 게 더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았겠지만, 유현지는 이번이 팬들과의 첫 만남.

그녀를 더욱 기쁘게 만들려면 역시 이렇게 좌석이 꽉 차 있는 게 더 나을 터.

김유민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가수가 나오는 입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자꾸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내 슬쩍 모습이 드러났다.

“어!”

자신과 같이 그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다른 팬들의 입에서도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철컹철컹.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적막한 공개홀에 울려 퍼지자, 숨이 딱 끊어졌다.

마침내 무대 위로 하늘하늘한 블라우스를 입은 채 등장하는 그녀를 발견하곤.

“우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팬들은 포효하듯이 목소리를 내질렀다.

마치 이곳이 콘서트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방금 전의 그 고요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무대 중앙에 서서 환희에 찬 표정을 지으며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유현지.

그녀의 목소리가 핀마이크를 타고 팬들의 귀를 간질였다.

“안녕하세요, 유현지입니다.”

다시 한번 커다란 함성이 터지자, 유현지는 입을 가리지도 않고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을 그대로 내보였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염없이 기다린 보람이 있다. 아니, 차고 넘쳤다.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그 잠깐의 기다림 정도는 별거 아니었다.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다들 식사는 하셨어요?”

“네에에에!”

“유현지 귀여워!”

고인물들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피디의 재량에 따라 인사를 더 길게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팬들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아랑곳않고 툭툭 끊고는 하는 음방 PD.

허나, 희한하게도, 이제 막 데뷔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PD는 이들의 대화를 끊지 않았다.

팬들로서는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저 피디 악명 높지 않아요?”

“저도 엄청 가차 없다고 들었는데. 역시 현지가 인정을 받아서 그런 거겠죠. 아니면 PD가 팬 됐다거나. 하하.”

농담식으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그건 사실이었다.

김피디는 마치 삼촌팬이라도 된 것처럼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띠우며 유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큭큭,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이래서 그러는 거였구나···.’

음방PD를 하고 있지만 정작 그는 여기 찾아오는 팬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어떨 때는 미친놈 바라보듯이 할 때도 있었다.

근처 카페가 가득 찼을 때는 한겨울에도 바깥에서 밤을 꼴딱 새기도 하고, 지방에서 이거 하나 보려고 올라오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방방 뛰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매주 보다 보니, 이젠 자신과는 다른 생명체라 여길 정도였는데.

‘이젠 이해가 되네.’

자신만 해도 그녀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오늘도 대기실을 따로 줘야 하나 깊은 고민을 했었으니까.

‘음방 피디 하기를 잘했지.’

팬들이 신의 직장이라고 말하는 게 뭣도 모르고 하는 소리라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음방이 끝나고 그녀와 길게 얘기도 나눌 수 있고, 리허설부터 본녹화까지 다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신의 직장까지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직장 만족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기는 했다.

그렇게 음악방송이 나가고.

유현지는 드디어 메인 음원사이트 차트에 진입할 수 있었다.

[98. 구름 위의 꿈 – 유현지]

***

이젠 마치 또다른 내 집 같기도 하다.

익숙한 동네, 익숙한 아파트, 익숙한 엘리베이터.

나는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친숙한 향기, 친숙한 공간.

내가 채 신발을 벗기도 전에, 채희는 방 문을 열고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해줬다.

“오셨어요?”

“응.”

“이게 며칠 만이에요. 항상 매일 보다가 이러니까 더 반갑네.”

난 피식 웃으며 거실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시간은 넉넉하니까 아침부터 먹을까?”

“그럴까요? 시간이 일러서 배가 안 고프기는 한데, 그래도 든든하게 챙겨 먹어야지.”

지금은 아침 6시.

오늘은 감독님이건 배우들이건 모두가 기다리던 크랭크인 날이었고, 우리는 이렇게 여유 시간을 넉넉하게 가지며 만났다.

나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어제 통화했을 때 오늘 일찍 만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했거든.

정말 매일 보다가 며칠 안 봐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오빠, 뭐 먹을래요? 김치찌개 끓였는데 이거 드실래요? 진짜 맛있어요. 제가 어제 유튜브 보고 만들었거든요. 셰프님 따라서 그대로 만드니까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더라고요. 처음에는 정량 내 맘대로 해서 별로였는데-“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가스 불을 켜고 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간단하게 세수만 했는지 머리는 전체적으로 부스스한데, 이마 위 머리에만 물기가 살짝 묻어 있다.

옷도 잠옷 그대로.

나는 이 상황에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늘어나는 현지의 인기와 반응에 알게 모르게 계속 흥분했었는데.

지금은 가슴이 잔잔하다.

오늘 영화 촬영이 시작되는 날인데도.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김치찌개를 보며 식겁했다.

“야, 무슨 고기를 이렇게 많이 넣었어?”

“목살 적당히 넣었는데, 넣고 보니까 좀 애매하게 남더라고요. 그렇다고 다른 것까지 넣으면 또 정량 안 지켜서 맛없을까 봐서요. 그냥 고기만 더 넣었어요. 고기는 많이 넣으면 많이 넣을수록 좋잖아요.”

그 말을 들으니까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인정이지.

“잘했어. 진짜 맛있겠다.”

“그쵸?”

히히, 빙그레 미소 짓는 채희.

우리는 몇 분 뒤, 흰 밥과 함께 이른 아침 식사를 하며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얘기를 꺼냈다.

그러다가 요즘 회사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서도 얘기가 나왔다.

“오빠, 최실장님이 이성호 선배님 맡게 됐다면서요?”

성호 삼촌을 가져간 1팀 최실장님.

아버지나 삼촌과 이에 대해 말할 기회가 없었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듣기로는 최실장님한테 집중관리를 받기로 한 것 같았다.

“자세히는 몰라. 최실장님이 어떻게 잘 꼬셨겠지. 술로 유혹했나?”

“설마 그러겠어요?”

“성호 삼촌이라면 가능성 있어.”

가볍게 농담을 뱉어내며 우리는 화제를 넘겼다.

이 또한 다른 화제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서.

우리는 그저 며칠 동안 쌓였던 얘기들을 풀어내거나,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쉼 없이 웃고 떠들며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현장으로 향했다.

***

최실장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세 개의 시나리오들을 보며 미간을 모았다.

“셋 다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이성호에게 쏟아진 시나리오들 중에 추리고 추려서 이 세 가지다.

최실장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골라 추천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는 자신만의 의사가 아니었다.

그날, 차에서 많은 얘기를 나눈 것 중에 하나.

이성호는 이렇게 말했었다.

-난 내가 하고 싶은 작품 할 거야. 그런데 꼭 이렇게 말하면 아예 신경을 꺼버리더라고. 결정은 내가 해도 매니저 의견 정도는 참고하고 싶은데 말이야. 그러니까 계속 알아서 추천해줘봐. 이렇게 하다 보면, 우리 둘 다 서로 더 편해질 거야. 내가 헤까닥 해서 이상한 작품 하겠다고 하면 막기도 쉽고, 내가 추구하는 것도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그리고 내가 의견 안 굽힌다고 매니저도 너무 순순히 물러주면 그땐 아래로 쭉쭉 떨어지게 될 수도 있어. 최실장은 그러지 마. 그래야 나도 의지하면서 뭘 믿고 맡기든가 하지.

그러면서 내준 숙제가 시나리오를 추천해달라는 거였다.

말은 숙제지만 사실 매니저로서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말이 숙제라서 더욱더 신중해지긴 했다.

그의 비위에 맞추는 게 아니라, 그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매니저는 매니저로서의 주관을 지켜야 한다는 게 이성호의 생각이었고, 또한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최실장은 한 시간을 더 고민한 뒤에야 마침내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고르기 전에도, 그리고 고른 후에도 박한울의 능력이 새삼 너무 부러워졌지만.

그를 받쳐주고 2인자가 되려면, 자신의 능력도 끊임없이 증명하며 실력을 쌓아야 했다.

“이걸로 성공한다.”

이건 성공할 작품이 분명했다.

최실장은 품고 있던 일말의 의심과 불안을 애써 지워내곤, 핸드폰으로 통화를 걸었다.

결정이 내려졌으면 바로 밀어붙여야지.

“네, 선배님. 시나리오 하나 추천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 첫 만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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