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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52화 (52/170)

< 이미 만족해서 다른 건 상관없었어요 (유료 시작) >

내가 이 회사 대표의 아들이란 것이 밝혀져서 시끌벅적하긴 했어도, 내 생활에는 별반 달라진 점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로드였고, 여전히 정채희와 유현지를 맡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고는 그저 나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 정도?

소문이 어떻게 퍼진 지는 몰라도, 어느새 내가 믿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사실로 밝혀져 있었다.

참 희한하지? 아마 나나 아버지가 직접 말했으면 믿지 않고 의심부터 했을 텐데.

직원들의 집단지성과도 같은 과정을 통해 밝혀지니 철썩 같이 믿고 있다.

그래도 그뿐이다.

그것 외에는 정말 없었다.

채희와 함께 연기 연습을 하고, 유현지의 안무와 노래를 다시 또 봐주는 쳇바퀴 같은 며칠.

그러나 오늘은 특별한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유현지와 내가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스케줄, 뮤직 비디오 촬영.

우리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했지만 마치 놀이동산에라도 놀러가는 것처럼 전혀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 미소만이 가득했지.

이렇게 신난 유현지와 나를 보고는 윤팀장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좋을 때다. 이게 얼마나 지치는 작업인지도 모르고.”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능글맞게 대답했다.

“원래 놀이동산도 오래 놀면 지치잖아요. 자주 가도 지치고. 그런데 지금은 너무 기대돼요. 스튜디오 구경도 빨리 하고 싶어요.”

“우리 이틀 동안 풀로 찍는 거 알고 하는 소리지? 자켓도 찍고 비하인드 컷도 찍고, 비하인드 영상도 찍어야 돼. 가뜩이나 제대로 된 휴식 공간도 없는데 신경 써야 할 게 계속 있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자요. 다 끝나고 돌아갈 때면 완전히 파김치 돼 있을걸?”

대기 시간도 길고, 여러 가지로 힘들다고 듣기는 했다.

그런데 나도 비슷한 몇 가지 경험은 있다.

반사전제작이긴 했으나 이미 드라마 촬영도 했었고, 채희를 완전히 담당하기 전에는 여러 아티스트의 스케줄을 메뚜기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다양한 환경들을 겪어봤다.

윤팀장님도 이를 모르지는 않으실 테니, 그냥 만만치 않다고 말하고 싶으신 모양이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어차피 데뷔하면 훨씬 더 바쁠 텐데.”

인기가 많아져서 곳곳에서 찾을 테니까.

내 이런 자신감 넘치는 말에 윤팀장님은 큭큭 웃었다.

“자신감 있을 만해. 누구 덕분에 노래나 안무나 진짜 잘 뽑히기는 했지.”

“뮤비 시안도 잘 뽑혔어요. 뮤비랑 안무는 제가 짠 게 아니긴 하지만요.”

어디는 해외 로케를 가고, 어디는 양평이나 제주도로 가고는 하는데.

우리는 이틀 동안 계속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돈을 안 들였다는 건 아니다.

현지에 대한 회사의 기대가 크기도 했고, ‘돈=퀄리티’라는 공식이 꼭 틀린 말은 아니니까.

우리는 스튜디오에 도착해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스태프들에게 인사했고, 현지는 바로 의상을 갈아입고는 분장팀에게 메이크업을 받았다.

여기까지만 했는데도 팀장님은 벌써 지친 표정이다.

“한울아, 감독님이랑 얘기 좀 나누고 올 테니까 구경을 하든 쉬든 알아서 하고 있어.”

“네.”

팀장님이 대기실을 나가자마자, 유현지가 입을 열었다.

“구경하러 가실래요?”

“그럴까요? 시끄러운 소리 안 들리는 거 보니까 이제 세트도 다 설치했나 봐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현지.

나는 그녀와 함께 영화 촬영장처럼 멋지게 꾸며진 세트장과 미술품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이러고 있으니 왠지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정말 박물관에라도 놀러 온 것 같았다.

이렇게 편하고 즐거운 와중에, 나는 그녀도 과연 그 소식을 들었을까 궁금해졌다.

아직 우리는 이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

주위를 둘러보니, 스태프들은 이런 우리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 하기에 바빴다.

윤팀장님도 감독님이랑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현지 씨는 그 소식 들었어요?”

“어떤 거요?”

“저에 대한 거요. 저희 아버지가 우리 회사 대표님이세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이 되지는 않고 되려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유현지라면 뭐라도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그도 그럴 게,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의문투성이였을 일들이 여러 번 있어 왔음에도 그녀는 이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으니까.

내 짐작으로는, 그녀도 대강 눈치는 채고 있을 것이리라.

“아, 그거 들었어요.”

“안 놀라시네요? 알고 있었어요?”

“아뇨. 자세한 건 몰랐어요. 그래도 뭐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왜 안 물어보셨어요?”

마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직원들을 비롯한 우리 팀 식구들은 큰 반응을 보였었는데.

내 질문에 그녀는 깨끗하고도 순수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상관없을 것 같아서 안 여쭤봤어요.”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 재능 알아봐주시고 옆에서 많이 보살펴주셨잖아요. 저한테 보여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해서 다른 건 상관없었어요.”

“···.”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냥 내가 대표의 아들이 아니라, 일반적인 로드 매니저였어도 상관없었다는 거다.

숨겨진 내가 아닌, 눈앞에 보이는 나한테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은 걸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나 보다.

“현지 씨, 조명 색깔 이쁘죠? 의상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네, 너무 마음에 들어요.”

우리의 대화는 다시 되돌아왔다.

그거에 대해선 굳이 말할 필요 없다잖아.

상관없다잖아.

나는 제어장치가 고장난 기계처럼 한동안 입꼬리가 내려갈 줄을 몰랐다.

***

유현지의 데뷔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채희의 영화도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이제 리딩까지 단 하루를 앞두고 있었다.

주연 캐스팅을 제외한 프리 프로덕션을 미리부터 준비한 덕분이었다.

‘리딩이 내일인데 너무 여유롭네.’

우리는 리딩을 코앞에 두고서도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이미 준비는 오래 전에 끝났으니까.

이젠 정말 배우들 간의 호흡과, 감독님의 디렉팅, 현장에서의 실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오늘도 연습을 하기는 했지만, 단지 평소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훑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빠, 이거 같이 봐요.”

짧은 연습이 끝난 뒤의 한가로운 거실.

TV가 틀어져 있는데도, 그녀는 핸드폰에만 시선을 고정했었다.

그리곤 무엇을 발견했는지 밝은 톤의 목소리로 내 옆에 찰싹 붙어 핸드폰을 보여줬다.

[화제의 인기작! 드라마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 일본에서 방영 시작.]

[수많은 팬들을 낳았던 ‘헌만사’. 일본에서의 반응은 어떨까? 첫 방송을 앞두고 현지 커뮤니티 시끌시끌!]

[일본에서도 ‘정채희 앓이’ 시작될까? 새로운 한류스타의 탄생을 목전에 두다.]

드라마의 일본 방영에 대한 기사가 한가득 보였다.

수출계약을 했을 당시에도 이미 기사가 많이 나왔었었는데 또 나왔다.

아무래도 첫 방송이 목전에 있으니 팬들이나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거라도 다시 한번 기사를 내는 건가 보다.

“그런데 이게 왜.”

“왜냐뇨! 이제 저 한류스타 될 수도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우쭐대듯이 말하고 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왜 이렇게 반응이 무미건조해요? 사람 김 빠지게···.”

왜냐니.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걸 보고 새삼스럽게 좋아하고 있으니까 심드렁하지.

심지어 이번엔 내 비상한 안목 같은 것도 필요 없었다.

이미 팬들도 다 채희가 한류스타 대열에 합류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으니까.

“네가 새삼스러운 거지. 한 번 팬카페 가봐라. 누가 그거에 대해서 떠드는 사람 있나.”

“아! 팬카페! 한 번 봐야지!”

팬카페를 훑는 그녀의 눈은 한없이 초롱초롱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대충 읽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 몇 번이나 곱씹어 읽는 것도 있었다.

“진짜네요? 일본 방영은 별말 없고, 다들 내일 리딩이나 영화에 대한 것만 말하고 계세요.”

“그치?”

그녀가 팬카페를 즐겁게 읽는 걸 구경하고 있었는데, TV에서 나는 익숙한 소리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그녀와 내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치킨이 좋긴 한데, 맨날 비슷한 맛만 먹으니까 질려···. 뭐 새로운 맛 없을까?

-하하하! 새로운 맛을 찾는다면! 바로 자이언트 스윙 치킨!

-자이언트··· 스윙··· 치킨···?

채희가 찍은 치킨 광고.

나는 채희가 닭다리를 뜯고 “으음~”하는 모습을 보며 결국 입밖으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풉.”

“···.”

채희의 얼굴을 힐끗 살피니,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해져야지.

나는 도리어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이 물었다.

“왜 부끄러워해? 당당해져야지. 광고가 창피해? 인기의 지푠데 자이언트 스윙 치킨이 창피해?”

“···자이언트 스윙 치킨은 안 창피한데 오빠는 왜 웃으세요? 광고가 웃겨요?”

“귀여워서 웃은 거지, 누가 웃겨서 웃었대?”

“순 거짓말.”

“난 태어나서 거짓말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야.”

“진짜 뻔뻔하시네요? 지금까지 대표님 아드님인 거 숨겨놓고서?”

“그게 무슨 거짓말이야? 말을 안 한 거지. 우리 아빠가 대표인 게 죄는 아니잖아?”

“···진짜 어이없어요. 숨긴 게 거짓말이죠! 그럼 예를 들어-“

시간이 넘쳐나니 이런 일도 있는 거지.

연습을 좀 덜 해놓을 걸 그랬다.

조금이라도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면 지금도 연습하고 있었을 텐데.

‘손댈 곳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박송이는 지금쯤 한창 연습하고 있겠지?

어쩌면 내일 눈이 시뻘게져서 올지도 모르겠다.

우리랑은 다르게.

***

자정이 넘은 시각.

세수를 한 박송이는 거울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며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하하.”

더욱더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에 얼굴은 조금 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일은 본격적인 영화 촬영에 앞선 전초전.

지금껏 리딩을 앞두고 이렇게까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적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모두 정채희와 합동연습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 황당하리만치 폭력적인 재능을 목도했기 때문에.

정채희가 어느새 또 한 번 자기자신을 극복하며 성장했기 때문에.

“너만 성장해? 나도 성장할 수 있어.”

박송이는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껏 자신이 해온 그 어떠한 캐릭터보다도 이번 캐릭터를 더 잘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또한, 과거의 그 어떤 때보다도 지금의 연기력이 가장 봐줄 만할 거라고.

물론 아직 정채희를 이긴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송이는 자신의 성장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역시 이 작품을 하길 잘했어.”

비록 주연이 아닌 조연이지만 이번이 영화 첫 작품이니 딱히 억울해할 것도 없다.

그녀가 이 결정이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 캐릭터를 맡은 것, 그리고 정채희와 다시 한번 연기를 하게 된 것.

“그러고 보니, 이거 추천해준 것도 그 사람이었지?”

겉바속촉 매니저, 혹은 겉촉속촉 매니저, 혹은 부적.

그 사람의 소문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대표의 아들이란 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짧은 시간동안 그가 이룬 업적들 때문에.

“···내일 볼 만하겠네.”

아마 감독이며 작가며, 제작사 대표에 주연배우들까지 전부 그 사람을 둘러싸며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을까?

감독과 작가, 제작사 대표는 이번이 채희와 함께 하는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하고.

이번 작품에 주연들을 추천해준 것도 그 사람이라고 하니까.

“진짜 어떻게 그러지?”

업계의 모두가 혀를 내두를 만한 기가 막힌 안목.

그 덕분에 우리 영화에 대한 업계 사람들의 관심도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순전히 과장이나 운으로 치부하고 있기도 했지만.

자신은 그게 조금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란 것을 직접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이 역할을 자신한테 추천해준 것만 봐도 그렇다.

완전히 자신만을 위한 캐릭터인 듯, 이렇게 잘 맞는 역할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으니까.

“확실히 부적 매니저가 능력이 있긴 해.”

< 이미 만족해서 다른 건 상관없었어요 (유료 시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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