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단 직원이 알고 보니 대표님 아들!(2) >
카페를 간다는 채희와의 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없던 일이 되었다.
우리는 대신 우리가 자주 모이는 소회의실로 들어갔다.
윤팀장님과 한실장님, 그리고 채희와 나.
사내가 시끌벅적할 테지만 이곳만큼은 예외였다.
아주 무거운 공기가 이 좁은 공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내 어깨만 짓누르는 것 같았다.
팔짱을 낀 한실장님과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윤팀장님, 그리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채희.
나는 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하하··· 어··· 크흠. 일단 죄송합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보고 있던 한실장님이 곧장 물었다.
“뭐가.”
“네?”
“뭐가 죄송하냐고.”
“···미리 말씀 못 드려서요.”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던 윤팀장님의 손가락이 멎었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왜 네 잘못이야. 오히려 보여준 능력에 비해 누리는 것도 적은데.”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왜 다들 이러고 있는 거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차마 물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턱 끝에서 왔다갔다하는 내 말이 들리기라도 했는지, 한실장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지금이라도 다 말해봐. 채희 맡게 된 거 우연 아니지? 내가 분명 그때 채희 오디션에서 떨어진 거 봤었거든.”
채희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놀란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입은 천천히 열렸다.
“그때···?”
이젠 눈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눈물을 흘리며 사옥을 빠져나갔을 때, 내가 다짜고짜 붙잡고서는 행운을 빈다고 말했던 것.
그리고 합격한 다음, 비상계단에서 내가 사실 주차장에서 오디션 준비하는 걸 봤다고 말했던 것.
머릿속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는 게 보이는 듯했다.
그래, 사실 이런 것들을 말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미 채희가 낸 결과물이 무척이나 좋으니, 뒷말이 나오지도 않으리라.
여기 모인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안 믿겠지만 그건 상관없고.
“맞아요. 사실 제가 뽑아달라고 말씀드렸어요. 안 뽑으면 후회할 거라고.”
속시원하게 말하는 진실.
나는 그렇게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뒤에서 했던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들만큼은 내가 가진 능력을 알아줘도 좋을 듯 싶었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신뢰가 생길 테니까.
“여기까지가 전부예요.”
“···.”
“···.”
“···.”
내 말이 다 끝났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채희는 입을 벙긋벙긋하면서도 소리를 내지 못 하고 있었고, 한실장님은 헛웃음을 흘렸으며, 윤팀장님은 나지막이 감탄사를 뱉어냈다.
“이야. 앞으로 진짜 잘 보여야겠네.”
“네?”
내 되물음에, 팀장님과 실장님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큭큭, 웃음까지 터뜨렸다.
“팀장님, 이 정도면 우리 팀에서 거의 유전 터진 거 맞죠?”
“그럼! 대박이네, 대박. 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미래의 대표님.”
이번엔 내가 얼떨떨한 반응을 보일 차롄가?
난 그들의 반응에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숨겨왔던 모든 걸 밝혔는데도 어색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좋다는 반응이라니.
‘다행이야.’
걱정했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들은 내게 진심어린 미소를 보여주었다.
내가 이래서 우리 팀을 좋아하는 거라니까?
***
분명히 내일 만나기로 했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이성호가 찾아온 거라, 온 김에 도장만 찍고 회포를 푸는 건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오늘은 제작사와 선약이 있었으니까.
“아,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배우들을 추천해준 게 너무 고맙다며 한잔 하자고 했던 ‘시리즈 마스터’의 이대표.
그의 눈빛에서부터 고맙다는 마음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대표님은 많이 바쁘시죠?”
“바쁜 게 좋은 거죠. 캐스팅 안 돼서 올 스탑 됐을 땐 정말 하루하루가 초조했다니까요.”
이대표는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보다, 축하드립니다. 이성호 선배랑 다시 계약하셨다면서요.”
도장을 찍은 후 바로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걸 발표하자마자 캐스팅, 예능, 광고 등의 제의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아마 직원들은 한동안 엄청나게 바빠질 것이다.
“이제 그놈이 또 매일마다 술 먹자고 할까 봐 겁납니다. 아주 대표실에 포장마차 차릴 기세예요.”
“하하! 그래도 두 분 다시 화해하셔서 다행입니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이제 뭐 기억도 안 납니다. 화해고 자시고 그냥 술 한잔 하자니까 대뜸 찾아오더라고요. 그래서 찌라시도 났던 거고.”
박대표는 가볍게 웃으며 소주를 입에 털어넣었다.
남들은 부럽다고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친구와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는 게 더 기껍게 다가올 뿐이었다.
자신도 그렇고, 이성호도 그렇고.
어떻게 나이만 먹고 예전이랑 하나도 안 달라졌는지.
다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둘은 몇 순배를 더 이성호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오늘 모이게 된 이유에 대한 것으로 다시 화제가 돌아갔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정말··· 추천해주신 배우 분들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다른 배우들은 생각도 안 날 정도로요.”
오디션을 회상하듯 초점이 살짝 풀린 눈으로 고개를 젓는 이대표.
그 반응에 박대표는 급격히 기분이 올라갔다.
사실 이대표와의 약속을 이리 일찍 잡은 것도 이러한 반응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기 위해서였다.
“대표님, 그거 사실 제가 추천해준 거 아닙니다.”
“예···?”
박대표는 싱글벙글 웃음 지었다.
이성호에 대해 얘기할 때와는 다르게, 겉으로도 그 기쁨이 밖으로도 온전히 표출되고 있었다.
“제 아들놈이 추천해준 거예요, 그거.”
“아드님이요?”
고개를 갸웃하는 이대표.
아직 소식을 못 들었나 보다.
박대표는 속으로 ‘옳다구나!’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사실은 제 아들놈이요-“
지금껏 아들을 자랑을 할 데가 김본부장뿐이어서 무지하게 답답했었는데.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박대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박한울이 했던 모든 것들을 다 말했고.
그 말을 듣는 이대표의 눈은 불신에서 놀라움, 그리고 경악으로 이어졌다.
“···그럼 아드님이···.”
“예. 조수연 작가 웹드라마를 고른 것도, 구선학 감독 드라마를 고른 것도, 그리고 이번 영화를 고른 것도 다 우리 아들놈입니다. 아마 이번도 대박 터질 거예요.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빗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놈이라서요. 제가 봐도 신기하다니까요? 또 어떤 일이 있었냐면-”
그야말로 신명나는 술자리.
박대표의 자랑은 도통 그칠 줄을 몰랐다.
***
집에서 좋은 음악을 찾아들으며 하릴없이 뒹굴던 송하연은.
전화를 건 강팀장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네? 뭐라고요?”
-박한울 매니저, 대표님 아들이라고.
“···!”
송하연 또한 다른 직원들과 대동소이한 반응.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자 강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하연이 너 박 매니저가 담당됐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아직 모르는 거니까 한 번 더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잘 말해서 우리 팀으로 데려와. 이미 정채희랑 유현지 있다곤 해도 걔네들이 너랑 비교가 돼? 안 되지! 아마···
“일단 끊어봐요.”
말허리를 뚝 자른 송하연은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눈을 껌뻑이며 머리를 굴려보려고 애썼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화내야 하나? 아니··· 화를 왜 내. 그럼 서운해해야.. 아니, 이것도 아니지.’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며 머릿속을 정리하던 송하연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정말 4팀 만들 수 있는 거 아냐?”
잘하면 4팀을 만드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박한울이 새로운 팀의 팀장을 하든 아니면 실장으로 가든, 일단은 팀이 새로 만들어지면 자신이 팀을 옮겨도 문제가 없을 터.
그럼 자연스럽고도 매끄럽게 박한울이 자신의 매니저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의 태도로 보아 자신만 관리하게 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일단 담당이 된다는 게 중요하지.”
송하연의 입가에 화사하고 진한 미소가 피어났다.
“나한텐 좋은 일이네. 다른 건 알 거 없지.”
송하연에게 있어 기타 등등에 대한 문제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의 담당 매니저가 될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 하나뿐.
***
채희의 집으로 데려다주고 있는 차 안.
난 조용히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옆에서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조수석에 앉은 채희는 내 얼굴을 슬쩍 쳐다보는 것도 아니라 아예 대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
“···.”
왜 보냐는 듯이, 할 말이 뭐냐는 듯이 힐끗거렸는데.
그녀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옅은 미소만을 띠우며 지그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본 뒤에야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부 다 오빠가 해준 거였네요? 저 알아봐준 것부터 시작해서 다.”
“뭐 또 오글거리는 말 하려고 그러는 거면 때려쳐. 지금 이미 한계야. 조금 더 하면 진짜로 손발 오그라들어서 사고 날 수도 있어.”
채희는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는,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다. 오빠 아니었으면 저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예요. 지금의 저, 오빠가 다 만들어주셨어요.”
“···하지 말라니까.”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가슴이 몽글몽글했다.
손발이 오그라들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다 네가 잘한 거야. 노력도 네가 했고, 재능도 네가 갖고 있던 거고. 애초에 너 아니었으면 아무리 나라도 이렇게까지는 절대 못 했어.”
“알고 보면 오빠가 제일 오글거리는 거 알아요? 누가 뒤에서 몰래 이렇게 하냐구요. 저랑 하루종일 연습한 뒤에도 집에 가서 대본 살피고. 진짜 힘들었겠어요.”
“매일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뭐. 별로 안 힘들었어.”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고, 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으니까.
잠을 줄여서 어느 정도 피곤한 건 감수해야지.
다만, 그것 말고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연습을 도운 것도, 그녀에게 어울리는 작품을 찾는 것도.
나는 채희를 성공시키고 싶었고, 채희의 연기를 보고 싶었으며, 채희가 기뻐하고 열정을 피우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내 노력에 대한 보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오빠, 그런데요. 오빠는 계속 숨기려고 했던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키다리 아저씨처럼 도와주려고?”
분명히 아까 다 말했던 내용이다.
이제 슬슬 밝히려고 했었는데, 성호 삼촌 때문에 다 물거품이 된 거라고.
그때 너무 충격 받아서 제대로 귀에 안 들어왔나?
“아까 말했잖아. 못 들었어?”
“아뇨.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고, 밝혀야 하는 이유 없었으면 계속 티 안 내고 뒤에서 도우려고 했냐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계속 보답이랑 인정도 못 받는 일에 애쓰셨잖아요.”
아버지랑 본부장님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내가 인정받을 만한 일을 했어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런데 보답이랑 인정을 못 받았다니.
‘그건 아니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보답이랑 인정을 왜 못 받아? 과정은 다 안 밝혀졌어도 결과적으로 인정받는 데에 도움은 됐잖아. 나 일 잘한다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그리고 보답은 뭐··· 충분하지.”
“뭐가요? 보답이 뭐가 충분했는데요?”
아, 말실수했다.
뒷말을 괜히 덧붙여서는.
“아무것도 아냐.”
“왜요. 뭔데요.”
대답을 피해도 소용없었다.
채희는 지치지도 않는지, 집에 다 도착할 때까지도 캐묻는 걸 그치지 않았다.
‘아, 젠장.’
곧이곧대로 말하기에는 너무 낯부끄러운 말이다.
네가 성장하고 성공하는 걸 보는 것으로, 네가 좋은 작품을 연기하는 걸 보는 것으로, 네가 기뻐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걸 보는 것으로.
그것들로 내 보답은 차고 넘쳤다고 어떻게 대놓고 말하겠는가.
정말로 오늘은 인정을 너무나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내 낯짝은 이미 한참 전에 한계치에 달했었다.
아까부터 힘들었는데 이 말까지 하면 내일 회사에 나가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네? 뭔데요? 보답이 뭐냐니까요? 안 말해주시면 저 안 내려요? 오늘까지 숨겼던 것도 밝혀졌는데 이렇게 또 숨기는 게 어딨어요. 그러면 안 되죠. 우리는 신뢰가 가장 중요한 사인데.”
허나, 정채희는 끈질겼다.
젠장. 이러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오늘 내 얼굴 위로 덕지덕지 금칠이 너무 많이 됐으니, 먹칠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채희의 눈을 마주하고는,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줬다.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보이면서.
“아버지가 용돈 많이 주시더라고. 보답이 아주 짭짤했어.”
< 말단 직원이 알고 보니 대표님 아들!(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