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49화 (49/170)

< 너 혹시 주머니에 부적 넣고 다니니? >

채희의 집.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해가 다 진 다음에야 연습을 끝낼 수 있었다.

다만, 오늘은 그냥 가지 않고 맥주 한잔을 하기로 했다.

식탁에 포도를 올려놓고 시원한 캔맥주를 꿀꺽꿀꺽.

채희와 나는 “크으!” 소리를 내며 동시에 맥주를 내려놓았다.

내가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이러고 있는 이유는 바로 내일의 일 때문.

내일은 박송이의 제안으로 채희가 그녀와 연습을 하기로 한 날임과 동시에, 유현지의 안무가 완성되어 나오는 날이기도 했다.

채희는 비공식 스케줄이었지만 어쨌든 스케줄이 겹치는 건 이번이 처음.

그녀는 나 말고 추가로 배정받은 로드 매니저와 함께 연습을 가야 했다.

“정 뭐 하면 박송이랑 스케줄 다시 맞춰도 돼.”

내 말에 채희는 포도를 집어먹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에이. 이미 잡은 약속인데 어떻게 그래요. 전 괜찮으니까 내일 안무나 잘 보러 가요.”

“만나서 연기는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저 노력 많이 했거든요? 오빠 없어도 이제 잘해요. 내가 뭐 오빠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아요?”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말았다.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 것도 알고 있었고, 박송이와 함께 연기를 해본 적도 있으니 큰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외부에서 연기할 때 아예 내가 없는 건 또 처음이지 않은가.

나는 그녀의 그 담담한 태도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기특한 마음 또한 함께 들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야.’

차근차근 이렇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비록 내가 옆에 없어서 100%로 실력발휘를 하지는 못 할 테지만, 어차피 내일은 연습이니까.

실제 촬영이 아니니 설령 실수를 한다 해도 민폐가 아니다.

“새로운 매니저랑은 같이 움직이는 것도 처음이지? 나한테 하는 것처럼 어리광 부리지 말고 잘해.”

“와. 이제 막 그냥 왜곡이 술술술 되나 봐요? 제가 언제 어리광 부렸다고 그래요?”

“생떼 쓰지 말라고.”

“생떼도 안 썼거든요?”

방금 전에는 쿨하게 대답해놓고는, 유독 반응이 까칠하다.

역시 마음이 평소와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불안하거나, 아니면 섭섭하거나.

머리로는 받아들인다 해도 마음이 따로 노는 건 누구에게나 비일비재한 일이다.

나도 이럴 걸 예상하고 맥주를 먹고 있는 거지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

“연습하러 가는데 무슨 일이 생길 게 없죠. 오빠나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나야말로 회사에서 안무 보는 건데 일이 생길 리가 없지.”

그녀는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말했다.

“그럼 전화하지 말든가요.”

“생각해보니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기도 하네. 내일 전화할게.”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너스레를 떠니 채희가 피식 웃었다.

우리는 포도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앞으로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오빠, 이렇게 매번 어리광 안 받아주셔도 돼요. 오빠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평소처럼 해요.”

“역시 어리광 부리는 거 맞잖아.”

“꼬투리 잡지 말고요. 아무튼 알겠죠?”

“알았어.”

채희는 올곧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저 이제 정말 혼자서도 연기 잘할 수 있게 해볼게요. 전 오빠 덕분에 이렇게 연기할 수 있게 됐는데, 오빠를 저한테만 묶어둬서 발목 잡으면 제가 너무 염치가 없잖아요.”

“염치없긴 무슨.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인데.”

“대신 저 혼자서도 잘할 수 있게 된다고 절대 소홀해지시면 안 돼요? 전에 약속했던 거 안 잊었죠?”

잊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그런 약속이 아니더라도 소홀히 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네. 무리 안 하는 선에서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

다음날.

박송이는 정채희와 그녀의 로드 매니저를 보자마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매니저로는 당연히 박한울이 올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매니저가 옆에 있었으니까.

“너 부적은 어딨어?”

“놓고 왔어요.”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정채희를 보며 박송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몸소 느껴봤으니 그럴 수밖에.

“너 오늘 부적 없다고 그때처럼 하면 가만 안 둬.”

박송이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한 순간도 게을리하지 않고 성실하게 연습해왔다.

정채희를 이기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었고, 정채희와 함께 연기를 하다 보면 쑥쑥 성장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노력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신감이 차올랐을 때, 정채희에게 함께 연습하자고 연락을 넣은 것이다.

얘는 지금 어느 정도 올라왔을까?

설마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겠지?

정채희와 함께 연기를 하며 자극을 받으면 더 나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박송이는 오늘의 연습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걸 두고 왔으면서도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

박송이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는 달리 오늘의 연습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네, 선배님. 열심히 해볼게요.”

그런데 박한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여기까지 와서 연습을 안 할 수는 없으니.

박송이는 쯧, 짧게 혀를 차고는 말았다.

“그럼 시작하자.”

“네!”

***

유현지의 안무가 나오는 날이라 회사로 왔는데.

어째선지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어수선했다.

의아해하고 와중에 문득 직원들의 말 소리가 귀에 꽂혔다.

“대리님, 진짜 이성호 배우님 다시 저희 회사로 돌아오는 거예요?”

“맞을걸? 추측성 기사가 이렇게 터졌는데 아직 양쪽에서 아무 말도 없잖아. 홍보팀도 아직 내려온 게 없어서 손도 안 대고 있다니까 확실하지.”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를 손에 꼽자면 늘 들어가는 이름, 이성호.

그분이 우리 회사에 들어온다는 소식에 나는 실소를 지었다.

‘우리 회사에 그 삼촌이 왜 와.’

지금이야 거물이지만 내게는 그냥 우리집에서 아버지랑 허구헌 날 술을 퍼먹는 아저씨였다.

물론 그것도 13년쯤 전이 마지막이었지만.

‘그때 아버지랑 아주 대판 싸우셨지.’

언성을 높이더니 주먹다짐까지 하셨다.

아버지가 몸으로 싸우는 걸 태어나서 처음 봤으니 그만큼 기억이 선명했다.

‘시간 많이 흘렀네.’

그때 당시 아버지는 영세 기획사의 사장이었고, 그 삼촌은 회사의 소속 배우로서 그렇게 잘나가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거물이 되어서 다시 우리 회사로 돌아온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앞으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대판 싸운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저 기사는 아마 근거 없는 찌라시에 불과할 거다.

아니면 새로운 계약을 앞두고 몸값을 높이기 위한 언론 플레이거나.

나는 굳이 기사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사실이 아닐 테니까.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호 삼촌이 내 얼굴은 알아보시려나?’

아니, 아마 아닐 것이다.

그때는 어렸고, 무려 13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으니까.

못 알아보시겠지.

만약 알아본다 해도 조용히 인사하면 되는 거고.

***

회사에서부터 차를 몰고 가, 유현지를 픽업해오는 길.

안무가 기대되어서 그런지 그녀는 보기 드물게도 들뜬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좋아요?”

“좋아 보여요?”

“네, 얼굴에 써 있어요. 기대된다고.”

유현지는 작게 웃고는 대답했다.

“네, 기대돼요. 점점 데뷔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요.”

노래가 만들어지고, 녹음하고, 안무가 나오고, 연습하고.

의상과 메이크업, 헤어가 정해지고, 뮤직 비디오를 찍고, 앨범 아트를 만들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야 데뷔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착착 과정이 진행되고 있으니 실감이 나는 모양.

데뷔를 손꼽아 기다려온 그녀가 들뜨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현지 씨, 이제 정말 데뷔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뮤직 비디오 촬영도 거의 다 준비되고 있잖아요.”

안무도 그렇고 뮤직 비디오 콘티도 그렇고 우리는 시안을 미리 받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정식 매니저로서, A&R팀과 협력하며 수정 요청을 대놓고 할 생각도 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손 댈 곳이 보이지 않아서.

이미 컨셉과 음악의 토대가 잘 잡혀있었기 때문인지, 안무와 뮤직 비디오도 내 마음에 쏙 들게 뽑혔다.

‘역시 이래서 스타트가 중요하다니까.’

물론 그들의 실력이 이 바닥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지 씨가 추는 거 빨리 보고 싶다.’

오늘 그녀는 안무를 창작한 안무팀의 댄서에게 직접 트레이닝을 받을 거다.

유현지라면 분명 순식간에 익히겠지.

우리는 차에서 내리고 나란히 걸음을 옮겨 연습실로 향했다.

확실히,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빨라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유현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연습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댄서에게 다소곳하고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유현지.

잠깐의 대화를 더 나누고는 바로 연습이 시작됐다.

음악 없이, 입으로 박자를 세며 하나, 둘.

댄서가 먼저 천천히 보여주면, 유현지도 거울을 보며 그대로 따라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지.

유현지는 얼마 안 가 안무를 모두 익혔고, 곧이어 음악과 함께 안무를 해보기로 했다.

“하아.”

드디어 제대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내 입에서는 기대와 흥분이 섞인 숨이 새어나왔다.

유현지는 음악이 나오길 기다리며 거울을 한껏 진지한 눈으로 바라봤다.

나 또한 거울 속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우리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진지하게 가라앉았던 그녀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옅은 미소를 띠운다.

“음악 틀게요?”

댄서의 말에 마주쳤던 시선이 흩어졌다.

“네.”

이제 막 안무를 익혔을 뿐, 아직 연습이 되지 않았고,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 등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쨌든 완성형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볼 수 있게 됐다.

둥- 둥-

베이스 소리와 함께 기대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나와 송하연이 함께 만든 음악이 흘러나오며, 그녀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또렷하게 눈에 담았다.

내가 머리로 그렸던 무대가 지금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방금 전에 분명 안무를 여러 번이나 봤었는데도, 음악에 맞춰 댄스를 하니 완전히 다른 느낌.

매끄럽고, 강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화사하고, 청량하다.

모든 좋은 수식어를 마구 때려부어도 부족할 만큼의 희열이 내 속을 가득 채워갔다.

단점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그녀가 꽃피운 재능의 틀 안에서 최선의 모습.

더불어 자신감까지 더해져 무대장악력까지 갖추었다.

내가 말하고, 그녀가 깨달았던 본인의 장점이 최대한으로 키워진 결과물.

그녀는 마치 안무도 본래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그녀만의 개성과 느낌을 온전히 담아냈다.

웬만한 컨텐츠는 모두 섭렵한 내게도 커다란 자극이 느껴질 만큼 멋지게.

숨이 얕게 쉬어진다.

나는 이 황홀한 장면을 찰나라도 놓칠 새라, 그녀의 무대에 온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1초 같았던 3분 30초가 흐르고,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내 입매는 어느새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말려올라가 있었다.

“하.”

전신에서 진하게 휘몰아치는 여운.

유현지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매니저님, 저 어땠어요?”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이었으니.

나는 기꺼이 그 물음에 응답해줬다.

“최고였어요. 몇 번이나 더 보고 싶을 정도로.”

나는 인정했다.

배우를 키우는 것과 가수를 키우는 것.

그 과정과 느낌은 서로 너무나도 다르지만.

벌써 그 두 가지에 완전히 중독되어버렸다는 것을.

천재들의 재능을 매일마다 목도하고 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에요. 매니저님이 보고 싶다고 하시면 얼마든지 보여드릴 수 있어요.”

천재가 조곤조곤 말한다.

또 한 번 무대를 보여주겠노라고.

“그럼 다시 한번 보여주실래요?”

“네.”

나에겐 그러했다.

연습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무대를 감상하는 것.

그녀는 내 앞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땀방울을 흘려가며 멋진 무대를 보여주었다.

***

박송이와 정채희가 함께 연습하고 있는 연습실.

연습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박송이는 아주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오늘은 자극 못 받을 줄 알았는데···.’

눈앞에 있는 담담하기만 한 얼굴이 무척이나 얄밉게 느껴졌다.

분명히 부적 없이는 이렇게 못 했었는데.

“너 혹시 주머니에 부적 넣고 다니니?”

“네?”

이곳에 부적이랑 같이 오지도 않았으면서, 함께 연기를 하고 있노라면 마치 부적이 곁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정채희가 아주 멀쩡하게, 그것도 숨쉬듯이 어렵지 않게 연기를 펼쳐냈으니까.

“···아니다. 됐다. 연습이나 계속 하자.”

“네, 선배님.”

둘의 연습은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 너 혹시 주머니에 부적 넣고 다니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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