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48화 (48/170)

< 대박을 위한 만반의 준비 >

제작사 ‘시리즈 마스터’.

얼마 전 HJ엔터의 박대표가 추천하는 캐스팅 보드를 전달받았다.

처음에는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래봤자 손해 볼 거 없지 않겠느냐는 말에 미심쩍지만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 말대로 손해 볼 건 없겠고, 안목 좋다는 박대표가 이러는 게 괜히 그러는 건 아니라는 믿음도 있었다.

‘이중에서 한 명이라도 건지면 이득이지.’

캐릭터 하나당 세 명, 총 9명의 인원들.

그리 인기가 있는 배우들은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연기력으로는 어딜 가나 아쉽다는 소리 안 듣는 이들이다.

그러니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이미지는··· 잘 모르겠네.’

지금까지 그들이 했던 역할들이랑은 너무 달라서.

잘 어울리려나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오디션 당일인 오늘.

시간차를 두고 9명의 오디션을 전부 보기로 했다.

“대표님, 아직 김진우 배우님한테 연락 없어요?”

“하하. 작가님, 아직 이틀밖에 안 지났어요. 조금만 여유 있게 기다려보세요. 분명 연락 올 겁니다.”

“그렇겠죠? 아니면 정연성 배우님은 어때요? 제가 생각해봤는데 정채희 배우랑 비주얼도 잘 맞을 것 같고, 연기도 괜찮던데.”

“정연성이요? 정연성도 괜찮죠.”

아직 감독이 도착하기 전, 조수연 작가와 이대표는 캐스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이 오디션 당일이거늘, 그들의 관심은 이제 곧 마주할 배우들이 아닌 다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쪽도 기대를 하긴 하지만, 다른 쪽에 대한 기대는 더 크기 때문에.

말하자면, 이 오디션은 덤, 혹은 복권 같은 거라고나 할까?

대박이 터질 가능성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적고, 그렇다고 해도 손해 보는 것도 아니고.

그와는 반대로 자신들이 캐스팅 제의를 한 쪽은 시도하며 뚫어야 하니, 관심이 한쪽으로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감독님, 오셨어요?”

“어.”

짧게 대답하며 인사한 구선학 감독은 이미 몇 번이고 살펴본 서류를 재차 살폈다.

서류에는 배우들이 출연했던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그리고 드라마의 제목과 역할이 적혀 있었다.

존재감이 없었던 역할도 있고, 반대로 인상을 강하게 남긴 조연 역할도 있고, 제각각이었으나.

어쨌든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 캐스팅을 시도하고 있는 다른 배우들에는 미치지 못했다.

연기력이 아니라 인지도와 인기가.

‘이미지도 안 맞고.’

조연이라면 모를까, 상업영화의 주연을 맡길 생각이었으니 대중들이 떠올릴 이미지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

애초에 배우가 주연급이라면 어떻게든 이미지를 맞춰보기라도 할 텐데, 이들은 조연급이니 그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감독님, 정연성 배우 아시죠? 그 분은 어때요?”

“어, 정연성 알지. 음. 나쁘지는 않은데 다 애매해. 별로야.”

감독의 관심도 오늘 볼 배우들이 아닌 다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경악스러운 미래는 상상도 못한 채.

***

“후우!”

올해로 서른 줄에 접어든 배우 최종윤.

주차장에 도착한 건 한 시간 전인데,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잡느라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할 수 있다, 최종윤. 할 수 있어.”

배우 생활 10년차.

그러나 어느 제작사도, 어느 감독도 자신을 두고 상업영화 주연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조연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도 있지만 그뿐이었고, 연기력으로 인정받아도 그뿐이었다.

그렇게 언젠가는 꼭 주연으로 성공해보자는 목표를 갖고 달려가고 있었는데.

목표로 잡았던 것보다 훨씬 더 이른 시점에 벌써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작품도 아닌, 구선학 감독의 신작.

더구나 시나리오와 캐릭터 또한 정말 기가 막히게 매력적으로 뽑혔다.

읽는 내내 몸이 뜨거워져서 저도 모르게 대사를 내뱉을 정도로.

“위험 요소 그까짓 거 뭐 어때.”

이영진 감독이라는 암초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 우려의 시선도 있었지만, 자신이나 소속사나 모두 시도해보는 걸 강력하게 원했다.

애초에 자신이 주연급이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니까.

‘아니, 주연급이었어도 난 이거 했을 거야.’

저절로 대사가 튀어나왔을 때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이건 내 역할이야.’

다른 배우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 만큼 이 캐릭터는 내 것이라는 굳은 확신이 들었다.

그 뒤로.

최종윤은 밤낮을 잊고 이 역할에 미친 듯이 매달려왔다.

마치 처음 연기를 할 때로 되돌아간 것처럼.

주변에 모든 이들이 쉬엄쉬엄하라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정말 이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면 앞으로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안녕하세요. 최종윤입니다.”

자신을 크게 원하는 표정이 아닌 제작진들.

최종윤은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느꼈던 확신을 담아, 영혼을 쥐어짜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연을 펼치기 시작했다.

***

오늘 오디션을 보기로 한 배우들 중 마지막 차례가 막 끝나고, 배우가 문을 닫으며 나갔을 때.

실내는 정적으로 가득했다.

멍한 얼굴의 이대표.

넋이 나간 채로 배우가 나간 문을 바라보는 조수연 작가.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구선학 감독.

그렇게 정적이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며 직원 한 명이 환하게 밝은 얼굴로 들어와 말했다.

“연락 왔습니다!”

세 명은 심상치 않은 표정 그대로 시선만을 직원에게로 옮겼다.

그 직원은 몸을 움찔하는 것도 잠시, 세 명이 모두 오디션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재빨리 희소식을 입에 담기로 했다.

아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만세를 부르겠지.

“저희 1순위, 김수철 배우가 하고 싶다고 연락 왔습니다!”

그런데.

“···.”

“···.”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만세를 불러야 할 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직원의 귀로 구선학 감독의 콧방귀 소리가 들려왔다.

“늦어도 한참 늦었어. 주연 캐스팅 다 끝났다고 전해.”

“···예?”

그 되물음은 들리지 않는지.

감독과 대표, 작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표정을 변화시켰다.

텅 빈 것 같았던 눈동자에 생기가 일렁였고.

얼빠진 듯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으며.

반쯤 벌어져 있던 입은 오므려졌다 펴졌다 하며 미소와 감탄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이대표.”

“네, 감독님.”

“언제 한 번 박대표님한테 크게 한 턱 쏴야겠어.”

“언제 한 번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매일매일 대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정말.”

이대표는 오늘 본 연기들을 떠올리며 크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진짜 박대표님 안목 끝내준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네요.”

조수연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HJ엔터에 정채희 배우가 있는데요.”

***

HJ엔터의 대표실.

이제 막 퇴근을 준비하던 박대표는 기다리던 전화를 받고는 바로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박대표님.

“예.”

-정채희 배우부터 시작해서 대표님께는 몇 번을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담담하게 시작된 어조는 점점 말을 이어갈수록 빠르게 격해져갔다.

그리고 그에 따라, 박대표의 얼굴은 흐뭇하게 미소 지어졌다.

다들 미친 듯한 열연을 펼쳤다는 둥, 온몸에 소름이 쫙쫙 돋아서 진이 다 빠졌다는 둥, 기존의 이미지랑 다른데도 어쩜 그리 싱크로율이 잘 맞느냐는 둥.

아무튼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을 만큼 대만족했다는 걸 길게도 풀이했다.

그 말이 곧 아들의 칭찬으로 들렸기 때문에 박대표는 그 긴 말을 들으면서도 전혀 지루해하지 않고 신명이 났다.

“하하! 알겠습니다. 바쁜 일만 끝내시면 바로 자리 만들죠.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박대표는 퇴근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 대신 김본부장에게 연락했다.

“어, 퇴근 안 했지? 아, 잘됐네. 그럼 올라와 봐. 급하게 할 말 있어서 그래.”

소속 배우가 들어가는 영화의 주연 캐스팅이 모두 완료됐다는 소식을 전달하는 게 물론 중요하기도 했지만.

김본부장을 곧장 부른 건, 자랑할 사람이 김본부장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 가장 주효했다.

“이놈의 자식, 이거.”

박대표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췄다.

어차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

“이제 어느 정도 익혔지?”

“···음.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대답한다.

이제 분석이 어느 정도 다 끝나서 연습을 시작할 때인데.

“내가 너 연기하는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뭘 망설여.”

“망설이는 게 아니고요. 조금도 연습 안 했는데 바로 보여주기가 좀 그래서 그렇죠.”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이왕이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다.

설령 분석이 제대로 되지 않은 걸 연기하더라도 나는 박수를 칠 수 있을 것이다.

억지로 그러는 게 아니라, 이젠 정말 실력이 물이 올랐으니까.

뭘 해도 다 기본은 할 거라는 말이지.

“조금도 연습 안 했으니까 이제부터 같이 하자는 거잖아.”

채희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본격적으로 하는 첫 연습이라서, 머릿속으로 우리가 분석했던 것들을 쭉 담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캐릭터 몰입. 감정 몰입.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줬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눈을 뜨고 시선을 마주했을 때.

내 목울대는 나도 모르게 움직이며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저 무표정일 뿐인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약간의 눈빛 변화와 미세한 표정 변화로 인해.

나는 잔뜩 기대감을 품은 채로 시나리오를 들어올렸다.

“아! 연서 씨! 여기서 이렇게 뵙네요?”

채희가 맡은 연서가 아닌, 또다른 주연의 대사를 입에 옮겼다.

담대하게 재벌3세에게 사기를 치려는 일당 중 한 명.

내가 이렇게 기본도 안 된 연기로 대사를 내뱉었음에도, 채희는 연서 그 자체가 되어 나를 바라봤다.

차가운 냉기가 풀풀 풍기는 분위기, 고압적이면서도 귀찮은 눈빛, 그리고 이건 뭔 개수작이냐는 듯이 비웃는 입가.

“아. 그제 봤던 분? 이름이 뭐였더라?”

“···방···천수..요. 저, 빵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원래 이렇게 더듬으며 내뱉는 대사가 아닌데.

“아하! 빵천. 근데 그쪽이 여기엔 어쩐 일로···? 진짜 우연 맞아요? 내 경험상 이런 만남은 무조건 의도된 만남이던데···. 예를 들면, 뭐 뜯어먹을 거 없나 군침 흘리는 뭐 그런 거?”

드라마 마지막 촬영 당시, 박송이가 NG를 냈던 이유를 이제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거대한 것을 예고도 없이 마주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등허리의 솜털이 쭈뼛거리는 것을 느끼며, 눈앞의 사람을 똑바로 바라봤다.

채희가 아닌 연서.

마치 빙의라도 한 것처럼, 그 껍데기만 빼고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녀는 내가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과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위화감이 들 정도로.

‘언제 이렇게···.’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게 느껴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견고한 확신이 차올랐다.

빗나간 적 없던 직감이 또다시 찌르르- 울리며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오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연서가 아닌 채희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걱정스럽게 묻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피곤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야. 그냥 좀··· 놀라서.”

“놀··· 아, 혹시-“

걱정으로 물들어있던 그녀의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제 연기 보고 놀라신 거예요? 너무 잘해서?”

장난스레 고개를 옆으로 비틀면서 묻는 채희.

기쁨으로 단번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나는 그 푼수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려 했는데, 핸드폰이 진동하며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아, 잠깐만.”

“왜요. 대답은 해주시지? 저 그렇게 연기 잘했어요? 오빠가 깜짝 놀랄 만큼?”

발신자는 윤팀장님.

나는 채희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핸드폰으로 들려오는 윤팀장님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움과 마뜩잖음, 그리고 아쉬움이 진득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팀장님의 말은 내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게 만들기에 차고도 넘쳤다.

“예, 알겠습니다. 네.”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채희가 물었다.

“무슨 전환데 그렇게 좋아해요? 다른 주연이라도 결정났대요?”

“응. 결정났대. 한 명이 아니라, 나머지 세 명 전부.”

“어? 진짜요!? 누구요? 누구라는데요?”

흥행력 있는 다른 배우를 끼지 않고 그 세 명이 모두 나란히 합격한 걸 보면, 누구 하나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무렴, 그럴 수밖에 없지.

가뜩이나 포텐 넘치는 배우에게 딱 맞는 옷을 입혀줬으니.

나는 채희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 영화 대박 나게 만들어줄 배우들.”

“진짜요!? 김수철 선배님이라도 나오신대요?”

흥행수표 김수철보다 더 이 영화에 알맞는 사람들.

나는 그들과 채희의 조합을 다시 한번 떠올려봤다.

역시나, 대본을 마지막으로 만드는 건 배우라고.

시나리오의 퀄리티가 더 높아졌다고 착각이 들 정도로 시너지가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중에서 최고는 우리 채희지.’

첫 연습인데도 이 정도면.

연습을 다 끝마쳤을 때는 어느 정도일까?

나는 의욕에 불타올라 말했다.

“우리 이제 게으름 부릴 틈 없겠다. 다 쟁쟁한 분들이라서.”

“저 게으름 부린 적 없어요. 어제도 복습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근데 그분들이 누구냐니까요?”

“말했잖아. 쟁쟁한 분들이라고.”

“···아, 그렇군요? 알겠어요. 진짜 내가 안 듣고 말지.”

채희는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고.

나는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대박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다 끝나서.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 대박을 위한 만반의 준비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