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팀이라도 만들면 >
아버지는 내가 물었던 것들을 바로 알아봐주셨다.
캐스팅의 진행은 역시 내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사정이 안 좋네요.”
“이건 시나리오 뽑히기 전 얘기고, 이제부터는 또 모르지. ‘시리즈 마스터’랑 구선학 감독도 이 바닥 베테랑이야. 또 눈을 조금 낮추면 할 만한 사람들은 널려 있고.”
그래, 여유는 아직 있다는 거다.
아무리 이영진 감독과 붙는다 해도, 시나리오가 이리 잘 뽑혔고, 또한 개봉 시기를 조정한다는 선택지도 있으니까.
그런데.
‘나라면 그렇게 안 하지.’
눈을 조금 낮추면 할 만한 사람들은 널려 있다?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캐릭터들을 잘 살려서, 장면들이 좋게 뽑히고, 그렇게 이 시나리오를 최선의 결과물로 내놓기 위해서는.
또한, 스타들로 군단을 꾸렸을 이영진 감독과 정면에서 맞붙어도 이길 수 있으려면.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노선을 다르게 잡아야 한다.
‘티켓 파워? 중요하지.’
그런데 아무리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이라 해도 지금까지 그쪽 노선으로 시도해봐서 잘 안 됐잖아?
이제 시나리오가 나왔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다른 노선을 타는 게 더 좋아 보였다.
사실, 배우들이 가진 흥행력으로 승부하면 이영진 감독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게 뻔했으니까.
‘아예 기준을 다르게 잡아야 돼.’
이름값 있는 배우들 중에서 이 역할에 그나마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을 고르는 게 아니라.
이 역할을 최대한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들 중에서 그나마 이름값 있는 사람들을 골라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티켓 파워는 단지 부차적인 요소일 뿐.
“아버지.”
“어.”
“조금만 기다려줘요. 금방 짜볼게요.”
“그래. 한 번 시도는 해봐. 많이 고민해보고, 역할에 어울릴 것 같은 배우들 연기도 좀 보고. 그게 나중에 다 재산이 되는··· 야, 어디 가?”
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도중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며칠,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거든.
“1분이면 돼요.”
“···.”
내 머릿속에 이미 다 들어가 있었다.
그저 꺼내기만 하면 된다.
방에 들어가 펜으로 수첩에 끄적끄적.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작성을 완료했고, 찌익! 종이를 찢어서 나왔다.
여전히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서 계시던 아버지가, 내 얼굴과 내 손에 든 종이를 바라봤다.
“미리 생각해놨어?”
“네. 처음부터요.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추천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사정이나 그런 것들 좀 들어봤죠. 다행히 겹치는 배우는 없었네요.”
나는 아버지께 수첩을 찢은 종이를 내밀었고, 아버지는 그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읽어내렸다.
비록 형식은 엉망일지라도, 애초에 지금 이 자리가 형식과는 거리가 무지하게 멀잖아?
중요한 건 알맹이, 그 작은 종이에 수기로 적은 내용이었다.
“각 캐릭터마다 3순위까지 있어요. 당장 판단하기엔 별로더라도 한 번 오디션이라도 보라고 해보세요. 분명히 만족할 테니까.”
“정말··· 얘네가 최선이냐? 아무리 그래도 주연 치고는 급이 좀 떨어지는데.”
난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이 영화가 개봉된 다음에도 급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지.
오디션을 본 뒤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이미 거절 많이 당했다는데, 조금 더 찔러보면 뭐 어떻다고요. 제작사 입장에선 시도해봐서 손해 볼 거 없잖아요.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보라 해보세요.”
“···그래. 손해 볼 게 없긴 하지.”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무시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셨다.
그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잔뜩 차올라 있었다.
마치, 내가 이번엔 과연 어떤 마법을 부릴까,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
아버지가 제작사에게 명단을 건네줬고, 제작사는 흔쾌히 받아들이며 그 배우들에게 오디션을 제의했다고 한다.
3순위까지 모두 오디션을 볼 테니, 주연을 따내려는 경쟁은 엄청 치열할 터.
가뜩이나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걸 본인들 스스로도 느낄 텐데, 경쟁까지 더해지니 다들 칼을 갈고 나올 확률이 높았다.
‘이제 내 손은 떠났어.’
3순위까지 다 추천해주고 오디션까지 치르기로 했으니 이젠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은 배우는 고배를 마실 테고, 철저하게 준비한 배우는 영화 개봉과 동시에 스타가 되겠지.
나는 그동안 정채희와 유현지에만 신경을 쏟는 나날을 보냈다.
대부분은 채희와 함께 분석과 연습을 하는 데에 시간을 할애했는데.
데뷔곡에 맞는 보컬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유현지에게도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물론 트레이닝은 모두 트레이너가 해주었기 때문에 내 손길이 그리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듣고 나서 피드백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배우들의 오디션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오늘 유현지와 함께 녹음에 참여하기로 했다.
매니저 겸 작곡가로서.
“오셨어요?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유현지를 픽업하고 녹음실에 들어가니, 송하연이 제일 먼저 밝은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반면, A&R팀의 부장과 직원, 녹음 엔지니어는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부담스럽네.’
눈길이 유현지가 아닌 나에게 고정되어 떠날 줄을 모른다.
정말 내가 작곡한 거 맞냐고, 어떤 부분을 어떻게 한 거냐고 자세히 캐묻고 싶어하는 속마음이 얼굴 위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차마 면전에서, 그리고 송하연 앞이라서 묻지 못하고 있을 뿐.
‘뭐 어차피 잠깐일 뿐이니까.’
이런 관심도 잠깐이다.
녹음이 시작된 순간, 유현지는 그들의 관심을 후욱! 강제로 빨아들일 테니까.
“좋은 곡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에이, 그렇게 딱딱하게 하기예요? 우리 같이 얼마나 활동했었는데.”
유현지와 송하연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눴다.
그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은지, 내 광대는 저절로 들썩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저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내 옆얼굴이 시선으로 따끔거렸지만.
“목은 풀었어요?”
“네, 오면서 풀었어요.”
매니저 겸 작곡가로서 나도 이 자리에 있지만, 나는 프로듀싱을 할 줄 모른다.
그 덕에 나는 프로그램과 장비를 조작하는 송하연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그럼 바로 시작해볼게요.”
“네.”
송하연의 말에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가는 현지.
헤드셋을 끼고 가사지를 보며 마이크 앞에 섰다.
본격적으로 본인의 노래를 녹음하는 건 처음일 텐데, 표정은 시종일관 느긋하기만 했다.
어쩜 채희랑 달라도 이렇게 다른지.
나는 평소와 다른 편안함을 만끽하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가볼 테니까, 중간에 실수해도 끊지 말고 부르세요.”
“네, 선배님.”
이윽고 송하연과 내가 만든 유현지의 데뷔곡, <구름 위의 꿈>의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꿈.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었던 꿈.
어느 날 갑자기 불어온 바람으로 인해 구름이 완전히 개고, 꿈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유현지는 직접 작사한 가사를 노래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
“미련하게 달렸어 닿지 않을 걸 모르고.”
단 한 소절.
박부장은 첫 소절을 듣자마자 숨이 딱, 끊어졌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반주.
송하연의 목소리로 가이드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유현지의 목소리로 상상을 할 수는 있었다.
그때 들었던 감상은 ‘엄청 잘 어울리겠다’는 것.
A&R팀에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몸담아오면서, 보컬을 상상으로 덮어씌우는 작업을 숨쉬듯이 해왔는데.
지금의 느낌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잠시도 그치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음악들 중에, 명곡으로 불리우게 되는 것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명곡들 가운데서도 가수의 대표곡을 넘어 아이덴티티. 즉, 거의 가수의 정체성과도 같은 음악이 종종 탄생하곤 한다.
인생곡이라 부르곤 하는 것.
주인이 아닌 그 누가 불러도 절대 원곡 이상의 느낌을 낼 수 없는 곡.
따라해보려 해도 절대 따라해지지 않는 노래.
박부장은 첫 소절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지금 이 노래는 유현지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 인생곡이 되리라는 것을.
‘이걸 대체 어떻게···.’
유현지의 보컬이 시작되며 홀린 듯이 빼앗겼던 시선이, 다시 그의 등에 꽂혔다.
자신과 직원, 그리고 엔지니어, 심지어 작곡을 한 당사자인 송하연마저 깜짝 놀라고 있는 가운데.
박한울은 홀로 미동도 없이 태연자약하게 앉아있었다.
마치, 마땅히 일어나야 했을 일이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처럼.
박부장은 생각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생각이 조금 이어지려고 하면 다시 유현지가 정신을 빼앗았고, 충격에 빠지면 다시 박한울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찼으니까.
그렇게 혼란과 경악의 반복이었던 3분 30초.
곡이 모두 끝나고 난 뒤, 어째선지 박부장은 미약한 탈력감마저 들었다.
A&R, 작곡, 프로듀싱.
비록 각각의 역할은 다를지라도, 공통적으로 가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작업들이다.
그런데, 지금 목격한 이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가수에게 곡이 완벽하게 맞아들어가니, 이런 세분화된 작업들이 전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만약···.’
이런 곡을 뽑아낸 게 우연이 아니고, 앞으로도 몇 번이고 뽑아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박부장은 한동안 박한울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불렀을 뿐이거늘, 녹음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현지의 노래가 끝난 뒤로는 그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뒤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내 옆에 앉은 송하연은 고개를 완전히 내게로 돌려 힘이 들어간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
왠지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말을 꺼냈다.
“···왜요?”
대답은 곧장 튀어나왔다.
“이게 뭐예요?”
“네? 같이 만들었으면서-”
“아뇨. 전 이럴 줄 몰랐어요. 매니저님이 오케이하면 넘어가고 바꾸라고 하면 바꾼 거지.”
그렇게 말해도 이거 외에는 할 말은 없었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이렇게 만들었던 거예요. 본부장님 지시도 그랬고.”
내 말에 그녀는 대놓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뒤에 덧붙인 말 때문이었다.
눈빛만 보면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매니저님, 저는 왜··· 이렇게 안 해주셨어요?”
이것에 대해서도 대답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땐 하연 씨가 앨범을 거의 다 만드신 다음에 제가 도와준 거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만들면요?”
송하연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며, 번들거렸다.
심지어 말끝도 떨리고 있다.
‘이거 왠지···.’
고개를 끄덕이면 바로 작업하자고 달려들 것 같은 느낌인데.
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녹음 부스 안에 있는 유현지와 눈이 마주쳤다.
부스 유리를 경계로 땅이 갈라진 듯, 그녀는 이곳의 분위기와 완전히 대비되게 맑고도 따스한 미소를 얼굴에 띠우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하시죠. 지금은 현지 씨 작업 중이잖아요.”
“···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송하연.
그녀는 토크 백 스위치를 누르며 유현지에게 말했다.
“코러스 들어갈게요.”
전설 같은 가수들의 히트곡에는 종종 이런 일화들이 따라붙곤 했다.
다시 부르는 것 없이, 녹음을 단 한 번의 시도만에 끝냈다는 것.
물론 그때 그 시절과는 달리, 요즘은 날것으로서의 아름다움보다는 좀 더 완벽을 기하려 하기 때문에 그런 일화들이 잘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유현지의 녹음은 시작한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끝이 나버렸다.
손댈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보통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부터 지우는데, 지금은 그저 몸을 뉘이고 싶을 뿐이었다.
풀썩, 두꺼운 이불이 깔린 침대 위로 드러누운 송하연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젠 물어봐도 되죠? 처음부터 같이 앨범 만들면요? 그땐 어떻게 되는데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앨범 만들기 시작하면 알 수 있겠죠.
속 시원한 대답이 아니었다.
적극적인 스탠스의 대답도 아니었다.
그냥 얼버무리면서 넘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 매니저가 아니라서 그런 건가?”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담당 매니저는 아니다.
유현지의 데뷔, 그리고 정채희의 영화를 앞두고 있어서 바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자기보단 그녀들이 우선일 수밖에 없겠지.
그 벽을 멀리서 인지하고는 있었는데, 오늘은 그 벽이 갑자기 훅! 하고 다가와 만져지기까지 했다.
꺼끌꺼끌 거친 표면.
송하연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직도 귓가엔 유현지의 보컬로 녹음된 음악이 맴돌았고, 꼭 감은 눈앞으로는 유현지와 박한울이 마주보며 웃고 있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내 매니저 하면 안 되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어느 지점에 다다라 그녀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매니저 하면서 실수 정도는 할 수 있지! 배우면 되잖아. 어차피 매니저 시작한지도 얼마 안 됐으면서!”
미간이 팍 구겨졌다.
“내가 어디가 그렇게 모자란데? 혹시 내 팬이라는 것도 거짓말 아냐?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거기까지 말하다가 뚝, 말을 멈췄다.
문득, 자신이 너무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에이 씨.”
다시 몸을 침대에 뉘인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부럽다 진짜···. 어떻게 방법 없나? 새로 팀이라도 만들면 바로 들어갈 텐데.”
작업을 성공적으로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송하연의 마음은 착잡하고 복잡하기만 했다.
< 새로 팀이라도 만들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