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45화 (45/170)

< 시나리오 나왔다 >

유현지 솔로 데뷔에 대한 첫 번째 회의.

A&R팀의 부장이 말했다.

“지금 업계에 솔로 댄스 여가수는 손에 꼽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유현지 가수는 그 솔로 가수들 중에 색깔이 겹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데뷔 싱글부터 그 이후까지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면 대중들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겁니다. 유현지 가수의 장점은 댄스와 보컬 모든 부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방금 전 본 영상에서 보시다시피-“

현재 업계의 트렌드와 상황, 그리고 유현지의 특징들을 모두 포함한 A&R팀의 발표가 길게 이어졌다.

철저한 분석, 그리고 그에 맞춘 효과적인 전략.

데뷔 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레퍼런스를 들며 세세하게 설명했다.

대회의실에 모인 모두는 이를 경청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 발표가 끝나자마자 김본부장은 말했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레퍼런스는 조금 조정해도 될 것 같네요.”

김본부장은 매니지먼트3팀의 윤팀장을 바라봤다.

미리 말을 맞췄던 윤팀장은 손에 USB를 들고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여전히 A&R팀의 부장이 앞에 나와 있는 가운데, 스크린에 새로운 PPT가 올라왔고, 윤팀장은 직접 PPT를 넘기며 설명했다.

물론 그 내용은 모두 박한울이 김본부장에게 전달한 것들.

다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김본부장이 직접 챙긴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A&R팀 부장은 핵심적인 부분만 잘려서 나오는 레퍼런스 음악들과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데?’

납득이 안 되면 좀 더 의견을 나누며 조율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자신과 팀원들이 내놓은 것보다 지금 발표되고 있는 게 좀 더 괜찮은 듯 보였다.

흐름은 무척이나 흡사하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다른 방향.

직원들의 눈이 하나둘 김본부장을 흘끗거리기 시작했다.

정채희의 웹드라마부터 드라마까지, 최근 들어 더욱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더니.

이번에 역시 그러한가 보다.

직원들은 A&R팀 부장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 보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다.

‘3팀은 계 탔네. 특히 그 로드.’

김본부장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 로드에 대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채희에 이어 유현지까지, 그야말로 김본부장의 하드 캐리가 아닌가.

지독히도 운이 좋은 놈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김본부장은 회의를 하나부터 열까지 적극적으로 주도해나갔다.

사실 박한울이 말했던 쪽으로 이끌고 유도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

곡 작업에 매달린 지 고작 3일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곡의 작업이 거의 다 마무리되어가는 중이다.

전문가가 아닌지라 내 설명이 많이 부족했을 텐데.

역시 송하연.

경험 많은 실력자가 내 말을 한마디도 허투루 듣지 않고 따라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한 번 처음부터 다 들어볼까요?”

송하연이 따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3일간 내가 계속 시키는 대로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짜증 한 번 내비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점점 밝아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

그 모습에, 그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최실장의 얼굴에선 금이 쩍쩍 가고 있었다.

“네, 한 번 들어봐요.”

작업실 스피커로 들리는 음악.

우리의 3일 동안의 노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유현지를 떠올리며 음악을 들었다.

가이드 보컬은 당연히 송하연.

그 고퀄리티의 음악이 모두 끝났을 때.

내 입에선 이런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와. 정말 너무 좋네요.”

이미 내 머릿속에서 유현지는 이 음악에 맞춰 수백 번은 무대에 올랐지만.

어째 매번 그렇게 무대를 찢어놓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진짜 신기해요.”

옅은 미소를 지은 송하연은 나를 바라보며 대뜸 이렇게 말했다.

“뭐가요?”

“어떻게 말하는 대로 했는데도 제 마음에 쏙 드는 음악이 나오는지. 제 음악도 아니고, 제 색깔도 아니고, 제 영감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되죠?”

그야, 음악 자체가 좋으니까 그렇지.

그만큼 호불호가 없고 대중적이라는 뜻도 될 거고.

또한, 난 송하연의 앨범 작업을 도와주며 한 번 합을 맞춰본 적이 있으니, 그때 봤던 그녀의 작업 스타일대로 맞춘 것도 그녀가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나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잘됐죠, 뭐.”

“정말 다음에 제 음반 작업할 때도 꼭 매니저님이 도와주셔야겠는데요? 하하.”

농담처럼 말하지만 눈빛은 번뜩이고 있다.

그래, 그걸 바라고 있어서 이렇게 아주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거구나.

“얼마든지요.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정말 약속하신 거예요? 바쁘셔도 꼭 도와주셔야 돼요?”

“알겠어요.”

최실장의 입이 작게 벌어져 있는 게 문득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이 광경이 믿기지 않는지, 소리없이 헛바람을 내뱉기도 하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하연 씨, 그런데 디테일한 부분 조금만 더 만졌으면 좋겠는데.”

“어느 부분이요?”

“저기 훅이랑 댄스 브레이크 연결되는 부분 있잖아요. 지금 너무 매끄러운 것 같아서, 오히려 좀 더 경계가 갈리면서 집중시킬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거든요. 그 부분에서는 드럼 킥 소리를 좀 더 둔탁하고 크게 만들어봐도 될 것 같아요. 별로면 임팩트 있는 다른 효과음도 한 번 넣어보죠.”

“아! 네네, 어떤 건지 알겠어요. 해볼게요.”

이젠 아예 최실장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내 말을 잘 듣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볼 때마다 새로운 모양이다.

“이렇게요? 음. 전 괜찮은 것 같은데.”

“네, 저도요. 너무 괜찮네.”

우리는 이제 거의 척하면 척,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손발이 점점 더 잘 맞아가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쉽게 곡 작업은 다 끝나갔지만.

우린 모니터를 보고 있던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봤다.

그녀의 입에서는 시원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 또한 그러겠지.

“매니저님, 그럼 이제 끝난 거예요?”

“네, 이걸로 믹싱 맡기면 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수고하셨습니다.”

송하연의 눈매가 진한 호선을 그렸다.

“저도 만족했어요. 그리고 역시 매니저님은 음악을 했어야 했어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역량이 대단하시더라고요. 역시 제가 도움을 괜히 요청했었던 게 아니라니까.”

“직접 만드는 거랑은 이게 또 다를 거예요. 그리고 전 매니저에 만족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훈훈한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을 때, 최실장이 도중에 끼어들며 내게 물었다.

“식사는 하고 갈 거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매우 친근한 어조로 부드럽게 묻는다.

순간 한실장님인 줄 알았잖아.

“그냥 아무거나 잘 먹어요.”

“다음에 하연이도 도움받을 텐데 미리 좋은 거 대접해놔야지. 정말 괜찮으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

송하연이 옆에서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아요. 드시고 싶은 거 말씀해보세요. 초밥? 장어? 스테이크? 한우?”

최실장의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미 최실장님이 전에 나를 데려가려 했던 것도 알고 있으니 뻔하지 뭐.

나를 데려가려고 조금씩 작업을 치는 거거나, 아니면 송하연의 일로 나중에 나한테 뭐 부탁하려고 하는 거거나.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는 얼마든지 도와줄 용의가 있었다.

물론 송하연을 위한 쪽으로.

저번처럼 그녀가 출연하기 싫어하는 프로그램에 출연시키려 할 때 같은 경우엔 못 도와주지.

“그럼 초밥 먹을까요?”

비싼 걸 먹는다고 최실장에게 빚진다는 생각을 갖지는 않는다.

어차피 회사 돈이라서.

“맛있게 드세요, 하연 씨. 며칠 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

송하연과 내가 함께 만든 음악을 A&R팀에 보내고, 점심까지 든든하게 먹었다.

이제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할 때.

그렇게 운전을 하고 회사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윤팀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 팀장님. 지금 회사 거의 다 왔어요.”

-아, 그러면··· 음. 그래, 일단 들어와.

“···? 네.”

목소리가 살짝 들뜬 것 같은데.

나는 의문을 접어둔 채 사무실로 올라갔고, 올라가자마자 윤팀장님이 내 가슴께로 두툼한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시나리오 나왔다.”

“벌써요!?”

시나리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나왔다.

물론 시간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보다 퀄리티가 더 중요한데.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윤팀장님의 상기된 얼굴만 보고도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최소한 나쁘게 뽑히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지금 읽어봐도 될까요?”

“빨리 읽어.”

난 곧장 시나리오를 받아들고 비어있는 소회의실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읽으면 중간에 흐름이 끊길 수도 있잖아.

그렇게 자리에 앉아 한 장 한 장 넘겨 읽어보는데.

눈동자가 점점 더 빨리 움직이고, 손은 계속 다음 장을 넘기기 위해 미리부터 준비를 하게 되었다.

펄럭, 페이지를 다 읽으면 재빠르게 다음 장으로.

아무래도 구선학 감독과 조수연 작가의 궁합이 꽤 잘 맞는 모양이다.

둘의 장점이 시나리오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어떻게 영화를 하지도 않았는데 영화의 틀에 이렇게나 잘 맞춰?

재벌과 경찰이 주축이 되는 범죄 영화.

채희가 여기서 맡게 되는 역할은 이영진 감독에게 제의받았던 것과 같은 병풍 조연이 아닌, 이 작품의 핵심이 되는 여주인공이었다.

재벌가의 차녀.

총 네 명의 주연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다.

영화화를 하며 좀 더 진하고 생동감 넘치는 대사와 지문, 그리고 장면.

내 머릿속에서는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쭉 재생되었다.

“하!”

거장 이영진 감독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하는 같은 장르의 영화.

개봉시기가 겹칠 확률이 높아서, 관객들이나 화제성이나 두 영화 중에 하나로 확 쏠릴 위험이 있었지만.

두 시나리오를 모두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리스크는 모두 이영진 감독이 떠맡게 생겼다.

‘이게 망할 리는 없으니까.’

마지막까지 전부 읽고는 나는 소회의실을 거의 박차고 나왔다.

마음이 너무 급해서.

빨리 채희에게 이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

기뻐하고 흥분하며 열정으로 들끓는 그 표정과 눈빛을 일 초라도 더 빨리 눈에 담고 싶다.

“어때? 재밌어?”

미리 대답을 알고서 묻듯, 웃으면서 묻는다.

내 표정에 이미 대답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을 테니까.

나는 대답하는 대신 말했다.

“채희 보여주러 갈게요.”

“그래. 거기서 분석 좀 해주다가 알아서 퇴근해.”

“네.”

나는 곧장 뒤돌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채희의 집으로 가는 내내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도통 내릴 수 없었고, 들썩거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른 배우들까지 다 세팅되어야 성적을 얼추 짐작할 수 있겠지만, 채희와 이 시나리오, 그리고 구선학 감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중박은 확정이다.

거기에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머릿속에 콱! 박는 것.

아마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채희의 캐릭터, 채희의 대사, 채희의 장면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아 잊히지 않으리라.

나는 채희가 현관문을 열어주자마자 곧장 채희의 눈앞으로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윤팀장님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아마 윤팀장님도 내게 빨리 보여주고 싶으셨나 보다.

“자, 여기 시나리오 나왔어.”

“오! 벌써 나왔어요?”

냉큼 시나리오를 받은 그녀가 물었다.

“오빠는 읽어봤어요? 어때요? 재밌어요? 괜찮아요?”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니까 가져왔지. 빨리 읽기나 해. 다 읽고 시나리오 분석하게.”

말을 마치고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가려 했는데.

“뭐야. 왜 막아? 들어가면 안 돼?”

채희가 현관을 막아서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시나리오는 품에 꽉 안은 채로.

곧이어, 그녀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오빠, 이제 제 차례예요. 아셨죠?”

송하연과 함께 작업했던 곡까지 넘겼고, 본부장님께 내가 그리는 것들을 모두 설명했으니.

이제 급하게 해야 할 건 없었다.

-저 이런 말하기는 좀 그런데, 아니··· 이런 말은 꼭 해야겠는데요.

-···뭔데?

-저한테 소홀하지 마세요. 알겠죠?

난 고작 며칠 전에 했던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

비록 유현지에게서 완전히 손을 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 던진 질문에 이 대답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 네 차례다, 그래.”

깔끔한 대답에 채희는 배시시 웃으며, 거실 소파를 향해 살랑살랑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채희가 소파에 앉아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기대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뻐하고, 흥분하며, 열정으로 들끓는 얼굴.

내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넘긴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고 내게 말했다.

“오빠, 분석 시작해요. 다른 일 없죠? 분명히 제 차례라고 했어요?”

“알았다고 했잖아. 근데 목마르다. 마실 음료 같은 거 없어?”

“오렌지 주스 있는 거 알잖아요. 냉장고에서 꺼내 드세요.”

“그건 너무 달아. 다른 건 없나?”

점심이 조금 지난 한낮.

거실 창문에서 불어오는 선선하고 상쾌한 바람을 맞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바로 분석을 시작했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해가 질 때까지.

< 시나리오 나왔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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