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깐의 휴식 >
강남의 어느 한 아파트.
손에 물컵을 든 송하연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소파로 향했다.
리모컨으로 TV를 켜고는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웠다.
“아쉽네. 오늘이 막방이라니.”
드라마를 평소에 그렇게 즐겨보는 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는 사람들이 저걸 하니 호기심과 흥미에 챙겨본 거였는데.
이렇게 빠지게 될 줄은 몰랐지.
너무 재밌었다.
스토리와 캐릭터, 연출 모두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정채희.
다들 연기를 잘했지만 그녀가 나오는 장면은 하나같이 뭔가 달랐다.
그녀의 푼수끼 넘치는 모습을 알고 있음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몰입하게 되었다.
“시작한다.”
송하연은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언제나와 같이, 또다시 그렇게 열혈 시청자로서 흠뻑 빠져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송하연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분명히 임팩트가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갈 만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박송이와 정채희가 나오고 있는 지금 장면은 어째선지 굉장한 임팩트가 있었다.
뭐라 콕 집을 만한 요소는 없는데 왠지.
“뭐지?”
어느새.
누워있던 송하연의 자세는 앉은 자세로 바뀌어 있었다.
촬영 마지막 날 당시, 정채희와 박송이의 연기력이 폭발했던 그 씬.
참 별 장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위력을 내고 있었다.
***
“야! 너 미쳤어?”
대본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느라 밤낮없이 일하고 있을 때, 소식을 들은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다.
자신의 웹드라마 성공을 누구보다 축하해주었던 친구.
그녀는 이 바닥을 잘 알고 있는 보조작가로서, 조수연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 영화판이 작가들한테 얼마나 불친절한지 몰라서 그래? 네가 뭐가 아쉬워서 영화를 만들어! 그냥 드라마 내라니까? 이제 이것만 되면 다음 작품부터는 고료 높게 받을 수 있어!”
“···.”
대답이 없자,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퍽퍽 치는 친구.
“야, 너 대본 썼던 거 줘봐.”
“왜.”
“대본 잘 안 나왔으면 구선학 감독님 계신 방향으로 절이라도 하려고 한다.”
“···잘 나왔으면?”
“너 정신머리 뜯어고칠 거야.”
조수연도 친구가 이렇게 답답해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영화는 감독예술, 드라마는 작가예술이라 불리우는 것 때문에.
웹드라마로 이미 대성공을 거뒀지만 드라마판에서는 아직 신인 대우를 받는다.
뭐, 완전히 똑같은 대우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고료로 보면 그리 큰 차이는 없다.
“나 영화하기로 이미 결정했어.”
“그니까 대체 왜! 네가 다른 신인 작가들이랑 같아? 너 웹드 대성공했어! 대본도 잘 쓰는 애가 뭐가 아쉽다고!”
“정채희 쪽에서 영화 검토하고 있다고 했단 말이야.”
이미 그쪽에서 시나리오 하나를 검토했다고 들었다.
제작사 대표와 구선학 감독의 얘기를 신중하게 듣고 있던 차에,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물론 정채희 쪽에서 드라마를 원하면 드라마를 할 거였지만.
“정채희가 뭐라고! 너 예술 할 거야? 상업작가 할 거잖아! 돈 벌 거잖아!”
조수연은 친구의 말에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마땅한 이유는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사실 사람의 논리라는 게 대다수 그렇다고 한다.
이미 결정을 내린 뒤에 머릿속으로 짜맞추는 것.
그러한 과정을 거친 뒤, 스스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결정했다고 굳게 믿는다고 들었다.
조수연 작가에게는 이번 결정이 그러했다.
정채희랑 하고 싶어서 웹드라마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대본을 뽑기 시작했다.
그녀가 더 커버리기 전에 작품을 또 하고 싶어서.
그렇게 정채희를 생각하며 글을 쓰니 엿가락 뽑듯 쭉쭉 뽑아져 나왔고, 그렇게 만들어진 게 그 대본이었다.
결국, 조수연 작가가 결정을 내린 이유는 이거였다.
정채희랑 하고 싶은데, 정채희 쪽에서 영화를 검토한다고 들어서.
이유는 빈약하다. 친구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만한 완벽한 논리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이 이상의 대답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너 뭐 해?”
“드라마 봐야지. 이제 마지막회야.”
“...얘 진짜 중증이네.”
“이거 보면 쓰는 데 참고 돼.”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맥주캔을 벌컥 들이켰다.
“크으! 미친년.”
조수연은 친구의 말을 못 들은 척했고, 둘은 그렇게 드라마의 마지막회를 시청했다.
그런데, 거의 막바지 즈음.
분명히 임팩트가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갈 만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박송이와 정채희가 나오고 있는 지금 장면은 어째선지 굉장한 임팩트가 있었다.
뭐라 콕 집을 만한 요소는 없는데 왠지.
“쟤··· 뭐야···?”
함께 보고 있던 친구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튀어나왔고.
조수연은 입꼬리를 씨익 말아올리며 대답했다.
“내 작품으로 뜬 배우. 그리고 내 차기작 주연.”
그렇게 드라마가 완전히 끝이 났을 때.
친구의 눈빛은 그 장면을 보기 전보다 한결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쟤가 네 뮤즈, 뭐 그런 거야?”
“···!”
그 물음에 머릿속이 번뜩였다.
‘뮤즈’라는 두 글자가 콱! 하고 박혔다.
찾았다.
빈약한 논리를 받쳐줄 완벽한 요소.
논리 자체를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그래서 더 완벽한 논리.
“맞아. 내 뮤즈야. 정채희가.”
친구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쟤라면 뭐···.”
친구 또한 은행원이 아닌, 드라마 메인 작가를 꿈꾸는 보조작가.
완벽히 납득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이유를 억지로 덧붙이면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었다.
“길게 보면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해. 쟤가 슈퍼스타 돼 봐. 네 작품으로 데뷔도 하고, 드라마하려는 거 각색하게 된 에피소드도 있고, 또 쟤랑 회사가 널 잊겠어? 다음 드라마 한 방에 대박 터져서 해외 판권 계약하면 그냥 끝이야, 끝. 그때부터 앞길에 레드카펫 쫙 깔리는 거야.”
***
종방연이 끝난 다음날.
나와 한실장님, 채희와 그녀의 부모님까지.
우리는 다 함께 제주도로 떠나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한울아.”
“네, 실장님.”
우리가 나란히 화장실 세면대의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한실장님이 물었다.
“이거 맞냐?”
“···모르겠어요.”
분명히 그녀와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드라마 촬영을 다 마치고, 그 이후의 바쁜 스케줄까지 다 끝난 후에 여행을 가기로.
그때까지만 해도 멤버 구성이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난 그냥 한실장님이나 윤팀장님을 껴서 같이 갈 줄 알았지.
“나름 포상휴가라면 포상휴간데···.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저희도 즐겨요. 사진 잘 찍으면 소소하게 기사는 나겠네요.”
“그래, 그러자.”
우리는 화장실에서 나와 채희와 그녀의 부모님이 함께 계신 곳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내 시야에 잡힌 대부분의 사람들의 고개가 향하고 있는 그곳으로.
막 아이돌처럼 수많은 팬들이 모여드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채희가 공항에 뜨면 적당히 많은 팬들이 몰려들 줄 알았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직접 다가오진 않고 모두 멀리서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으며 제 옆사람들과 호들갑을 떨 뿐이었다.
간혹 중고등학생들이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같이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게 보이다 보니 사람들이 다 자제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반대로 인터넷에선 지금 화제성 최고였지만.
‘하여간 정채희.’
나는 그녀가 제 부모님에게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따뜻하게 사랑받으며 자랐다는 게 한눈에 보인다.
“오빠! 실장님! 방금 검색해봤는데요. 해변가에 뷰 진짜 좋은 카페 있대요. 이거 봐요. 이쁘죠?”
평소처럼 초를 치고 싶은데, 어머님이랑 아버님 앞이라서 차마 그러진 못하겠다.
대신, 나는 입가에 따뜻해 보이는 미소를 억지로 매달고는 부드럽게 돌려 말했다.
“우와. 진짜 이쁘네. 그런데 있잖아. 이렇게 네가 금방 찾을 정도면 다른 분들도 많이 찾아오지 않을까? 사람들 우글우글거리겠다.”
“그런가?”
“그렇지 않을까?”
“그래요?”
“그렇겠지 아마?”
이런 우리를 보고는 어머님 아버님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짝꿍끼리’의 방송을 봐서 그런지, 아니면 채희가 평소에 내 얘기를 많이 했었는지, 표정을 보니 어째 내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시는 듯했다.
“매니저님, 우리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있으세요. 여행 내내 불편해하실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어머님이 다 안다는 투로 웃으며 말씀하셔서, 나는 고개를 홱홱 가로저었다.
“에이! 어머님, 무슨 말씀을요. 하나도 안 불편해요. 오히려 얼마나 좋은데요.”
“풉.”
채희의 웃음에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시나리오가 아직 다 안 나왔기 때문에 준비할 게 없어서 그렇지, 만약 시나리오가 나왔다면 지금쯤 나한테 한창 굴려지고 있을 텐데.
그 점이 사무치도록 아쉬웠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제주도로 1박2일의 짧은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그놈의 ‘해변가 뷰 좋은 카페’에 와야 했다.
“하··· 하···. 흠. 사실요. 여행이란 게 사람들끼리 이렇게 부대끼면서 내적 안정을 찾는-“
“채희야.”
“···네.”
나는 눈앞의 바글거리는 사람들이 전부 이쪽, 그러니까 채희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는 걸 보며 말했다.
물론 목소리와 표정을 최대한 부드럽게 꾸미면서.
“네가 보기엔 있지. 지금 여기서 우리가 오순도순 커피 마시면 내적 안정이 찾아질 것 같아?”
“···.”
채희의 눈이 갈 길을 잃었다.
어휴.
‘아무튼··· 눈으로 인기가 보이긴 하네.’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건 정확히 따지면 인지도겠지만, 눈이 왕방울만큼 커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인기로 판단할 수도 있었다.
“커피만 주문하고 한적한 곳으로 갈까요?”
웬만한 해변가엔 사람들이 있겠지만, 어디를 가든 여기보다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내 안내에 따라 진짜로 뷰 좋은 해변가에 자리잡았고.
채희와 부모님은 그제서야 느긋하고 편안하게 풀어진 얼굴로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매니저님, 우리 채희 때문에 항상 고생이 많지요?”
“아니에요, 아버님. 채희 덕분에 일에 보람이 느껴져서 얼마나 좋은데요. 채희가 연기도 잘하지, 성격도 좋지, 엇나가지도 않고, 말도 잘 들어서 엄청 편해요.”
아버님은 하하!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씀하셨다.
“많이 들었어요. 집에서나, 전화할 때나. 채희가 매니저님 자랑을 그렇게 해서 귀에 딱지가 앉았네요.“
“아빠는 내가 언제 자랑을 그렇게 했다고 그래?”
아버님이나 나나 채희의 말은 한 귀로 흘리며 마저 대화했다.
“우리 채희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무슨 말씀은요. 제가 더 잘 부탁드리죠. 하하.”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채희의 새로운 모습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이나 마음을 푹 내려놓는 모습들.
자주 봤던 거였지만 역시 부모님 앞이라 그런지, 약간은 다른 게 내 눈에는 고스란히 보였다.
그리고 늦은 저녁.
여행의 노곤함에 못 이겨 잠드신 어머님 아버님을 두고, 나와 채희는 숲길을 천천히 거닐었다.
정말 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잡았지.
바람도 따스하고, 낮이나 밤이나 날씨가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심지어 위치도 잘 잡아서 적당히 조용하기도 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귓가에 아스라이 들려오고, 차가 자갈을 밟는 소리 또한 간간이 들려온다.
“그래서 이제 만족해?”
“네! 진짜 최고였어요!”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종일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화려한 연예계 생활의 반대급부로 잃는다는 소소하고도 소중한 일상.
어쩌면 그녀는 이런 일상을 즐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럼 됐지.”
사실 아닌 척했지만 나랑 한실장님도 이번 여행을 상당히 즐겼다.
한 시도 화제가 마를 날이 없고,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약육강식의 연예계에서.
채희와 우리 팀은 아주 평화롭고 행복하게 나아가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가만히 있어도 흙탕물이 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기도 하며, 근거 없는 헛소문이 사실처럼 퍼지는 곳이니까.
내게도 이러한 일상은 무척이나 소중했다.
“우와! 오빠! 여기! 여기 봐요! 반딧불이 있어요!”
반딧불이를 발견하고는 입이 딱 벌어졌다.
저러다 턱이라도 빠질까 걱정되어, 나는 그녀의 감동을 한풀 꺾어주기로 했다.
“그거 도깨비불 같은 거 아니야. 벌레잖아. 밝은 데서 제대로 보면 엄청 징그럽게 생겼다?”
“···어휴, 정말.”
채희는 반딧불이를 향해 다가가려던 발을 슬쩍 다시 뒤로 옮기고 있었다.
“오빠는 감성이 왜 그렇게 메말랐어요? 진짜 그동안 보면서 느낀 건데, 오빠는 감성이란 게 없는 것 같아요.”
“네가 못 봤다고 메말랐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 줄 알아?”
“오만이요? 지금 오만 그 자체이신 분이 저한테 오만하다고 하신 거예요? 와···.”
재잘재잘 티격태격.
우리의 휴가는 이렇게 끝을 맺어갔다.
이제 얼마 후면 또 강행군을 달려야 할지 모르니.
이 정도의 포상휴가 정도는 괜찮잖아?
몇 개월 동안 드라마를 찍느라 수고했다는 뜻으로.
< 잠깐의 휴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