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40화 (40/170)

<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

‘너무 급이 높아졌어.’

조수연 작가는 불안한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계약 조건은 딱 하나, 정채희를 여주인공으로 섭외할 것.

그렇기 때문에 아직 제작사와 대본 계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조건은 지금으로선 꽤나 달성 난이도가 높아 보였다.

정채희가 높이 올라가기 전에 한 작품이라도 더 하기 위해, 빨리 쓴다고 빨리 썼는데.

그녀는 고작 드라마 하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웹드라마를 찍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치에 올라버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정채희를 생각하며 썼기 때문인지 스스로가 보기에도 대본은 잘 나왔지만, 정채희를 원하는 게 어디 자신뿐일까.

드라마가 완전히 끝났을 때는 훨씬 더 많은 곳에서 러브콜이 들어올 터, 붙잡으려면 딱 지금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였다.

‘꼭 했으면 좋겠는데···.’

버스에 탄 조수연 작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버스에서 막 내려서, 갈아탈 다른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여보세요?”

제작사에서 전화가 왔다.

-작가님, 혹시 지금 바로 오실 수 있으신가요?

“예? 왜요?”

설명을 듣고 있던 조수연 작가는 자신이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음에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평소에 비싸서 절대 타지 않는 택시에 망설임 없이 몸을 실었다.

***

이미 자정이 넘었지만 퇴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니저 일을 하다 보니 이젠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라 생각됐다.

물론 남아있는 이유는 매우 특별했지만.

“그러니까 이 작품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거죠? 채희를 주연으로.”

제작사 ‘시리즈 마스터’의 대표와 직원 한 명, 그리고 구선학 감독과 조수연 작가.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고 우리 모두 편하게 얘기를 하던 사이였다.

허나, 지금 회의실에는 진중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상황을 정리하며 묻는 윤팀장님의 질문에 구선학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수연 작가님도 동의하신 거고요?”

“전 결정나는 대로 따르기로 했어요. 채희 씨가 드라마를 하고 싶어하면 그대로 드라마 할 거고, 영화를 하고 싶다 하시면 그쪽으로 가려고요.”

한마디로 말하면.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왔다는 소리다.

그것도 옵션을 하나 더 가진 채로.

나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한실장님과 윤팀장님 또한 긍정적인 분위기였다.

이영진 감독의 영화가 썩 마음에 들지 않던 차에, 우리가 직접 그 능력을 봐온 두 사람이 뭉쳤으니까.

그런데, 영화화를 한다고 해서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 작업이 얼마나 걸릴 줄 알고?

오래 걸리면 몇 년이 걸리기도 하는 작업이다.

물론 조수연 작가가 매우 능력 있는 작가고, 구선학 감독이 베테랑이기 때문에 기대를 걸 수도 있다.

합이 잘 맞을 수도 있고.

이번 드라마나 뭐로 보나, 구 감독은 시나리오 창작 능력만 좀 아쉬울 뿐이지, 각색을 돕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무튼 결정을 짓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변수는 시간.

그걸 감독도 아는 모양인지, 말을 덧붙였다.

“영화화한다고 하면, 시나리오 나오는 건 석 달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 드라마 끝나기 전에 러프하게 각색하고 드라마 끝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작업할 것까지 계산한 겁니다.”

그렇겠지. 감독이야 방향만 잡아줄 테고, 쓰는 건 조수연 작가가 쓸 테니까.

조수연 작가의 표정을 살폈는데, 이미 얘기가 된 모양인지 그녀의 표정에서 당혹스러움이나 놀라움은 묻어나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간절한 표정이다.

정말 채희한테 확 반한 모양.

나중에 따로 한 번 물어봐야겠다.

아무리 작품이 잘 됐다고 해도 채희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무리 아닐까요?”

한실장님의 물음에 제작사 대표는 말했다.

“시놉시스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당히 정교하게 짜여 있습니다. 인물, 배경까지 구체적이고요. 만약 영화화가 결정되면 시나리오를 짜는 동시에 프리 프로덕션까지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만큼 저희도 확신을 갖고 움직이는 거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한 번 직접 확인해보라며 대본을 손으로 가리킨다.

그래, 아직 가장 중요한 걸 보지 못했지.

다른 것들에 대해선 좀 더 나중에 얘기해봐도 된다.

석 달 안에 못 끝내도 조금은 더 기다려줄 수 있다.

배우들 공백이 어디 하루이틀인가.

좋은 작품을 놓치는 것보다 좀 더 기다리는 게 훨씬 더 낫다.

다른 작품을 하는 게 더 시간 낭비가 되는 셈이지.

예를 들면, 이영진 감독의 작품이라거나.

“그럼··· 한 번 읽어보고 마저 얘기 나눠보죠.”

윤팀장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시놉시스로 시선을 옮겼다.

‘···우연인가.’

이건 재벌과 범죄, 경찰을 다루고 있었다.

만약 영화화를 한다면 이영진 감독의 영화와 개봉시기가 겹칠 수도 있는데, 장르까지 겹치면 관객들이 둘 중에 하나로 확 쏠릴 위험이 있다.

화제성 또한 그렇고.

‘일단 그건 차치하고.’

시놉을 살펴보니 대표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한 이유를 알겠다.

배경, 구성, 인물, 스토리까지.

그대로 영화화를 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재밌겠는데···. 엄청.’

그래도 드라마를 목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수정은 불가피하긴 하지만, 약간일 뿐.

구선학 감독과 함께라면 영화화를 하는 편이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미 여기서 무게추가 반쯤 기울어졌다.

작가와 감독의 스타일을 워낙에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시놉이 굉장히 정교하고 자세하게 잘 짜여 있어서.

그리고 대본을 펼쳐 인물들의 대사를 보고는.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대사빨이 죽여주네.’

조수연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캐릭터.

비로소 무게추가 완전하게 기울었다.

틀린 적 없던 내 직감이 다시 또 강렬하게 머리를 울렸다.

이건 된다.

이 작품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채희가 들어가기까지 하면 완벽하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딱 채희를 생각하고 썼다는 게 티가 났으니까.

***

정말 다행히.

채희는 얘기를 다 듣고, 시놉과 대본까지 보고는 말했다.

“해보고 싶어요, 이거. 해볼래요. 그래도 되죠?”

되지. 얼마든지 되지.

더구나 이건 우리에게 굉장히 큰 기회다.

영화와 드라마.

티는 잘 안 나지만 이 둘 사이에 놓인 벽은 꽤나 높고 견고했다.

요즘은 OTT도 있고 드라마판의 환경이 좋아진 곳들도 간혹 있기 때문에, 그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가는 추세지만,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여전히 영화에만 출연하곤 한다.

또한 다는 아니나, 대개는 영화배우들의 연기가 좀 더 섬세하고 뛰어난 편이기도 하고.

그 때문에, 영화에서 주연을 맡는 것은 바늘구멍에 낙타 넣기만큼 어렵다.

아무리 드라마판에서 인기를 얻더라도, 커다란 스크린으로 봤을 때 관객들에게 커다란 몰입감이 느껴지도록 만들 줄 알아야 하니까.

TV를 틀면 나오는 게 아니라, 직접 돈을 지불하고 영화를 보게 할 만한 티켓 파워도 있어야 하고.

채희는 영화에 출연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드라마판에서 연기력을 입증했더라도 영화에서 단번에 주연을 맡는 건 어려운 일.

그런데 함께 일해본 구선학 감독님과 조수연 작가님이 우리 채희를 주연으로 쓰기를 원하고 있다.

TV드라마에서의 주연도 아닌, 상업영화에서의 주연으로!

‘이건 못 참지.’

회사에서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덕분에 저쪽에 앉은 구선학 감독님도 밝은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오빠, 오늘 시청률 몇 퍼 나올 것 같아요?”

“글쎄. 마지막회니까 23퍼는 되지 않을까?”

해마다 탄생하는 커다란 화제작들의 시청률을 보면 정말 헉,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낮지만, 우리의 시청률도 낮은 편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아주 높은 편이지.

‘내가 이걸로 고른 이유가 있다니까.’

드라마의 성공도 성공인데, 일단 채희의 인지도가 엄청 높아졌다.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콱! 박히도록 인상이 깊게 남겨졌고.

짤방이나 SNS에서의 화제성도 두말하면 입 아프지.

웹드라마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채희는 두 작품만으로 ‘믿고 보는 정채희’라는 말이 뜨문뜨문 나오고 있었다.

“저기요, 겉바속촉 씨.”

박송이의 목소리.

주변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로 쏠렸다.

“큭큭.”

“방송 잘 봤습니다!”

드라마의 촬영이 다 끝나고 나서, 스태프와 배우들이 처음으로 모인 종방연 자리라 그런지.

아까부터 나를 향하는 눈빛들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그걸 박송이가 대놓고 부르며 방아쇠를 당긴 거고.

“···.”

입술을 입 안쪽으로 모으며 내 눈치를 살피는 채희를 흘끗 바라봤다가 다시 박송이를 바라봤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소주잔을 들고 와 앉은 그녀.

“겉바속촉이 아니라 박한울입니다, 제 이름.”

전에는 ‘부적 씨’라고 부르더니.

“네, 아무튼 겉촉속촉 씨.”

“놀리려고 왔어요?”

“아뇨, 확인해보려고요.”

“뭘요.”

내 옆에 앉은 채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쟤 다음에 뭐 들어가요?”

주위의 귀 때문에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어째 다 알고 있는 눈치다.

하긴 이 드라마의 제작사에서 만들기로 했으니까 그녀의 귀에도 들어갔을 수 있겠다.

“글쎄요. 아직 확정된 게 없어서.”

난 시치미를 뗐다.

이미 채희의 얼굴에서 다 표가 나긴 했지만, 겉바속촉이니 겉촉속촉이니 말해대니 내 입에서 진실이 나올 리 없다.

“···.”

박송이의 눈이 가늘어지고, 난 거기다 대고 말했다.

“박송이 씨 연기도 계속 화제 되고 있는데 이 참에 영화나 도전해보시죠. 아직 송이 씨도 영화는 안 찍어보셨잖아요.”

“하! 저 보고 거기 들어가라고요? 얘 밑으로?”

거 봐. 역시 다 알고 있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아꼈다.

‘싫으면 말고.’

얘처럼 영화 주연으로 단번에 들어가는 건 아주 큰 욕심이다.

설령 그런 기회가 있다고 해도, 그 작품이 과연 아주 좋은 작품일까?

그랬으면 박송이를 주연으로 안 쓰지.

“종방연이니까 얼굴 찌푸리지 마시고요. 다른 사람들 보니까. 누가 보면 우리 드라마 망한 줄 알겠네.”

“···후.”

그녀는 자기 잔에 소주를 가득 채우곤 우리에게 내밀었다.

나와 채희는 그 잔에 같이 잔을 부딪히곤 한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선배님, 이거 드세요. 오빠가 고기 진짜 엄청 잘 구워서 맛있을 거예요.”

채희는 맛있게 익은 고기를 집어 박송이 앞에 놓인 그릇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박송이는 그 고기를 거칠게 입에 집어넣고 성질머리답게 씹었다.

그래도 맛은 있는 모양인지, 김치도 입 안에 집어넣는다.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선배님.”

“···어휴.”

한결 수그러져서 다시 잔을 채우고 비웠을 때.

스태프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이제 마지막회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는 커다란 삐걱거림 없이 그렇게 드라마의 마지막을 다 함께 지켜봤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와아!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마지막회 시청률 23%.

다들 홀가분하고 시원섭섭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 때.

잠시 가게 밖으로 나갔다 온 박송이는 구선학 감독님이 있는 테이블에 가 앉았다.

난 그걸 보곤 피식 웃었다.

‘결국 할 거면서.’

그렇게 자리가 슬슬 마무리되어갈 즈음.

잠시 가게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막 붙였는데.

어느새 박송이가 내 앞에 와 있었다.

“뭐야. 언제 따라온 거지?”

“왜 반말이에요.”

“혼잣말한 거예요.”

“···유치하긴.”

아무리 박송이가 멋대로 따라왔다곤 해도 비흡연자 앞에서 담배를 피긴 좀 그러니, 난 한 입밖에 흡입하지 못한 담배를 털어 껐다.

“그래서 왜요? 저한테 뭐 말씀하실 거 있으세요?”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짝꿍끼리’ 촬영할 때, 제가 말했었죠? 여기서도 분량 뺏기면 언젠가 다른 작품에서 만날 때 조금도 양보 안 하고 다 뺏어버릴 테니까 각오하시라고요.”

“···.”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근데 영화는 시나리오로 다 정해져 있는데 분량을 뺏기도 하고 그러나?”

박송이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영화도 편집되거든요!?”

막 끈 담배가 아깝게도, 그녀는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몸을 돌려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난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큭큭, 웃었다.

“자기는 더 유치하면서.”

<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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