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34화 (34/170)

< 오빠가 제 부적이에요 >

그 어떤 때보다 더욱더 노력을 기울였던 이번 드라마.

박송이는 카메라 앞으로 걸어나오는 정채희를 바라봤다.

‘오늘이 마지막 촬영인데··· 결국 못 이겼어.’

정채희의 연기는 박송이 스스로 하여금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을 끊임없이 자극했고, 경쟁심을 불태우게 만들었다.

감독을 포함한 스텝들의 반응과 분량의 조정 때문에 자존심에 스크레치도 가게 만들었다.

허나, 그 덕분에 얻은 것도 적지 않았다.

아니, 적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확실히 늘긴 많이 늘었어.’

냉정하게 평가해봐도 그렇다.

자신은 이 드라마를 찍기 전보다 확실히 실력이 늘었다.

한동안 답보 상태여서 그렇게 답답했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이런 괴물이 튀어나와서는···.’

마지막 촬영이라고 더 칼을 갈았나 보다.

비장한 얼굴로 선 정채희를 보며 쯧, 짧게 혀를 찼다.

자만하지 않는 게 더 열 받았고, 대놓고 경쟁심을 품는 자신을 항상 깍듯하게 대해서 더 짜증났다.

아니, 사실 정채희가 계속 그렇게 자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야 자신의 실력이 계속 늘 수 있을 테니까.

박송이는 이 드라마가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기회임을 알았고, 정채희나 이 드라마가 논란 없이 쭉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으면 하는 마음에 제작발표회 때도 조언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미워할 수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고.’

하여튼 이렇게 마지막까지 철저한 태도를 보니 배우로서 존중할 만은 했다.

연기력은 뭐···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대체 얼마나 잘하려고 이러는 거야.’

저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 역시 평소보다 훨씬 더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까지 지는 건 너무 싫었으니까.

“스탠바이-”

하지만, 스탠바이 사인이 들어가는 순간.

그동안 정채희를 항상 유심히 지켜봤던 박송이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폼이 잔뜩 올라와서 저렇게 얼굴을 비장하게 굳히고 있는 게 아니라.

불안정하게 흔들려서 그런 거라는 것을.

박송이는 이 순간, 정채희가 매우 작아보였다.

항상 슛 들어가기 직전부터 아주 커다란 존재감을 표출했던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액션!”

하지만 박송이는 이미 여러 작품을 해온 프로.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어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자신이 철저하게 준비해온 연기를 최선을 다해 선보였다.

***

나는 차창에 얼굴을 붙이다시피 하며 채희를 눈에 담았다.

손에 땀이 맺히고, 침이 꿀꺽 넘어간다.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이 번뜩번뜩 떠오르는데, 어째 나쁜 생각이 점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잘못되지는 않을까, 혹여나 공포증이 악화되지는 않을까.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을 심적 불안감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축축한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고 연기가 시작되었을 때.

“···?”

턱과 주먹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이 어색해졌다.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싶어, 눈을 좁히며 채희를 더 또렷하게 살펴봤다.

그런데 역시, 나는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어···?”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채희는 연기를 아주 잘 해내고 있었다.

분명 이럴 리가 없는데, 채희의 연기는 전혀 흔들림 없이 매끄럽게 나아가고 있었다.

“하!”

탄성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튀어나오고.

내 입꼬리는 찢어질 듯이 위를 향해 솟구쳤다.

“왜 잘하냐, 정채희?”

웹드라마를 들어가기 전에도, 우리는 자체적으로 테스트를 해봤다.

내가 있을 때는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연기를 펼치던 그녀가, 내가 없으니 곧바로 특색 없고 밋밋한 연기를 펼쳤었다.

딱 평균적인 신인배우의 수준 정도로.

그런데, 지금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비록 내가 앞에 있을 때만큼은 아니라 해도, 그녀의 연기는 충분히 훌륭하다 할 만했다.

딱, 이번 작품에 들어가기 전 박송이 정도의 수준쯤.

“언제 그렇게 노력한 거야?”

내가 안 보고 있는 사이에도 그녀는 어떻게든 아등바등하며 걸어갔나 보다.

정말 기특하기 이를 데 없지.

공포증을 극복하는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

뿌듯하고 대견했다.

“오늘 정말 잘해줘야겠네.”

나는 차창 너머에서 멋지게 날개를 펼치고 있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

“컷!”

어떻게든 연기를 해냈다.

분명히 한 걸음 나아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환희가 차오르기보다는 아직 마음이 위태롭기만 했다.

‘오케이 사인이 안 나오네.’

평소와 달리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역시 평소랑 다르기는 한 모양이다.

감독님은 미간을 모으고 턱을 어루만지며 방금 찍은 촬영본을 살피고 있었다.

‘어우! 떨려!’

정채희는 숨을 길게 내쉬며 콩닥콩닥 뛰는 심장 어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문득 옆얼굴이 따가워져 고개를 돌려보니.

박송이 선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문제야?”

“네!?”

“너··· 이 정도 아니잖아. 뭐가 문제냐고. 방금 내가 너 이겼어. 너도 느꼈지?”

함께 연기를 하면서 이기고 진다는 표현이 좀 그렇긴 했지만, 선배가 말하는 바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방금은 정말로 연기에서 선배에게 잡아먹혔다.

박송이 선배랑 연기하면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눈을 바닥에 깔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박송이는 쯧! 세게 혀를 차며 말했다.

“똑바로 해. 정신 바짝 차리고. 설마 마지막이라고 대충 하는 거야?”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아무래도 실전에서 이러는 건 너무 민폐인가.

지금이라도 오빠를 불러야 하나.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샘솟는 와중에, 감독님의 목소리가 현장을 귀에 꽂혔다.

“좋은데, 다시 한번만 가봅시다!”

정채희는 여기 있는 많은 분들께 미안한 마음까지 겹쳐, 다시 정신줄을 바짝 잡으려 했다.

물론 주문을 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소의 주문과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행운을 깃들게 해주는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긴 있다!’

있긴 있다.

눈에 안 보일 뿐이지, 있긴 있지 않은가.

정채희는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고, 다시 한번 촬영이 시작되었다.

“음···. 좋은데 딱 한 번만 다시 갑시다!”

감독님은 뭔가를 바라는 얼굴로 숫제 노려보듯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정채희는 아무래도 더 이상은 민폐인 것 같아, 이제 매니저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가끔 꿀밤을 때려주고 싶긴 해도, 역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나 보다.

차 문을 열고 내려오는 박한울.

그의 얼굴 위론 숨길 수 없이 진한 미소가 귀에 걸릴 듯이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정채희의 온몸으로 진한 환희가 퍼졌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나 잘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저 표정을 보고서야 한꺼번에 몰려온 덕이다.

“선배님.”

“왜.”

퉁명스러운 박송이의 목소리.

정채희는 자신감이 뚝뚝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이번엔 정말 잘할 자신 있어요. 방금 전까지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 말 확실히 지켜.”

박송이의 말대로.

정채희는 자신의 말을 확실하게 지켰다.

아주, 아주 아주 확실하게.

“컷! NG! 송이 씨, 왜 갑자기 굳었어요? 지금 채희 씨 흐름 되게 좋으니까 바로 갑시다! 할 수 있죠?”

엄청나게 안타까워하고, 또한 굉장히 흥분한 구선학 감독님의 목소리.

흥분한 건 정채희의 연기 때문이었고, 안타까워한 건 그 앞에서 굳어버린 박송이 때문이었다.

마치 막혀있던 댐이 마침내 폭발한 것처럼.

정채희는 지금 이 순간, 이 드라마를 촬영하는 중 최고의 폼을 내고 있었으니까.

“야··· 너-“

박송이가 경악 어린 눈빛으로 정채희를 바라보고 있는데, 구선학 감독의 목소리가 재차 현장에 울려 퍼졌다.

“송이 씨! 지금 바로 갑니다! 집중!“

박송이는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몇 초 후.

불꽃이 화르륵 타고 있는 뜨거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탠바이- 액션!”

그렇게 촬영 마지막 날에, 이번 드라마 최고의 연기력이 담긴 씬이 탄생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리 임팩트 있거나 중요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많은 드라마가 그러는 것처럼, 나중에 추가 촬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예정되어 있는 촬영은 모두 마쳤다.

스텝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기뻐하고 있는 가운데, 박송이는 방금 전까지 함께 연기를 펼쳤던 정채희의 코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정채희.”

“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헤헤.”

그동안 유심히 지켜봤던 것과 비교해본 바, 이상한 점이 분명히 있었다.

매니저가 나오자마자 갑자기 확 바뀐 표정과 연기력도 그렇고, 계속해서 슛 들어가기 직전에 매니저를 바라보는 것까지.

정황상 단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 매니저랑 사귀니?”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으나, 튀어나온 것은 극렬한 반응이었다.

“네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격하게 손사래를 치며 고개까지 홱홱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오해세요, 선배님! 정말이에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도 있던데.”

“정말이에요! 진짜예요!”

박송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런 가십거리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야. 사랑에 의지해서 연기력이 바뀐다는 게 문제지. 배우로서 바람직한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앞으로도 배우 활동 계속 하고 싶으면 하루 빨리 고쳐.”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정채희의 얼굴에선 억울함이 진득하게 묻어날 따름이었다.

“···진짜 아니야?”

“정말 아니에요!”

“그럼 뭔데? 내가 분명 봤는데.”

그 물음에, 정채희의 표정이 또 스르르 풀렸다.

정말 감정을 알기 쉬운 아이였다.

“오빠가 제 부적이에요. 효과가 엄청 좋아요.”

박송이는 방긋방긋 웃는 정채희를 바라보며, 실소를 지었다.

“부적?”

“네!”

박송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았다.

이쪽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의아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정채희의 매니저.

‘매니저라면 뭐···.’

“좀 낫긴 한데, 그래도 좋은 건 아니야. 빨리 고쳐.”

“감사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그럼 됐고.”

고개를 끄덕인 박송이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런데··· 확실히 효과가 무지막지한 수준이긴 하더라.”

정채희의 얼굴에 더욱 화사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까요.”

***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신나고 들뜬 분위기가 넘치는 차 안.

나는 운전을 하며 물었다.

“언제 그렇게 연습했대?”

“다 안 보이는 곳에서 했죠. 진짜 아까 심장 쪼그라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구요.”

윤팀장님은 큭큭, 웃으며 말했다.

“어이구, 고생 많이 했네. 잘했어! 그렇게 조금씩 고쳐나가면 되는 거야!”

내가 없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면 채희의 이 연기력도 사라질까 봐 걱정이 많으셨나 보다.

한실장님이나 윤팀장님 모두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엄청 좋아하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기특하네, 기특해. 오늘 파티라도 해야 하나? 촬영 무사히 마친 기념까지 더해서.”

한실장님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실장님, 쟤한테 최고의 파티는 떡볶이랑 맥주만 있으면 돼요.”

“난 그 괴상한 조합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한울아, 넌 그 조합이 괜찮냐?”

묻는 건 나한테 물었지만 대답한 건 채희였다.

“실장님은 먹어보지도 않으셨잖아요! 먹어보셨어요?”

“그런 건 아닌데 딱 봐도 알지. 내가 비운 술병이 몇 갠데.”

그 부정적인 대답에 채희는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먹어보지도 않으셨으면서.”

“한실장아, 아무래도 오늘 메뉴는 정해진 것 같은데? 그러게 왜 애를 자극해, 자극하기는.”

“얼씨구? 팀장님도 괴랄하다고 뭐라 했었잖아요. 이러면서 자기만 쏙 빠져나가려고.”

“야! 나는 적어도 얘 앞에서 말은 안 꺼냈어! 그리고 그건 또 왜 말해, 인마!”

언성이 커져도 여전히 차 안에는 즐거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이런 분위기는 고스란히 우리의 조촐한 회식 자리까지 이어졌고.

메뉴는 결국 맥주와 치즈 떡볶이로 결정되었다.

“먹어보니까 맛있네! 맛있다, 채희야.”

“그쵸!? 팀장님은요?”

“와, 나도 너무 맛있는데?”

실장님과 팀장님이 연신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곧이어 다른 말도 내뱉었다.

“그런데 여기에 소주랑 닭발까지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

“채희야, 우리 소맥이랑 떡볶이 조합도 궁금한데 소주도 먹을까? 그리고 닭발도 맛있으니까.”

내 눈엔 이 조합이 먹기 싫어서 닭발과 소주를 먹으려 하는 게 훤히 보이거늘.

“콜! 저도 좋아요!”

채희는 그저 떡볶이와 맥주 조합이 맛있다는 평가를 듣고는 기분이 좋을 뿐인 듯했다.

‘정말로 단순하기는.’

그렇게 우리는 맥주에서 소주로, 소주에서 다시 소맥으로.

치즈 떡볶이에서 닭발로, 닭발에서 다시 보쌈으로.

우리는 배가 터지도록, 그리고 진탕 취하도록 먹고 마시며 기쁨을 나누고 즐겼다.

아무튼 내 마음에 굉장히 쏙 드는 좋은 팀이었다.

< 오빠가 제 부적이에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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