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방송 >
회사에서 정해준 커리큘럼의 레슨이 모두 끝난 뒤의 개인연습시간.
유현지는 자신의 매니저가 말해준 솔루션에 따라 재즈와 댄스스포츠를 연습하기로 했다.
‘여기서는 못하겠다.’
연습실 안에는 다른 연습생들도 있었기 때문에, 연습을 제대로 하려면 다른 연습실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거울이 보이는 쪽엔 남은 공간이 없기도 했고, 연습해야 하는 댄스 장르의 특성상 혼자 쓸 수 있을 만한 넓은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유현지는 레슨이 끝난 연습실을 나가, 다른 연습실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여기도 있고··· 여기도 있네···.’
비어있는 곳도 종종 보였지만, 정채희가 자주 사용하는 보컬 연습 전용의 작은 공간들뿐이었다.
YU엔터에 있을 때나 여기 있을 때나 항상 연습실이 모자라서 탈인 건 똑같은 듯했다.
그런데 그때, 안에 사람이 있어 지나쳤던 연습실의 문이 열렸다.
“언니! 혹시 연습실 찾으세요?”
“응. 찾고 있는데 남는 곳이 없네.”
댄스팀으로 있었을 때도 몇 번 마주쳤던 연습생.
그녀의 뒤로 또 낯익은 얼굴들이 쏙쏙 튀어나왔다.
“저희 어차피 조금 남았으니까 여기 쓰실래요?”
“언니, 그런데 혹시 저희 연습 좀 봐주시면 안 돼요?”
레슨을 받을 때 춤으로 지적을 많이 받았던 애들이다.
그 초롱초롱한 눈빛들에 담긴 간절한 마음을 보고 유현지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연습실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럼 그래도 될까?”
유현지의 말에 그녀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요! 당연히 되죠! 언니, 빨리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오래는 안 봐주셔도 돼요!”
YU엔터테인먼트에는 연습생들 사이에서 견제와 텃세가 만연했는데, 여기는 좀 다른 느낌이다.
다 같이 으쌰으쌰 힘을 내며 실력을 높이려는 연습생들.
이 회사가 YU엔터보다는 규모가 좀 작을지라도,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정이 가는 회사라고 느껴졌다.
그렇게 20분 정도의 시간 동안 댄스를 봐주며 꼼꼼히 조언을 해준 현지에게.
연습생들은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이 인사하면서 재잘재잘 여러가지를 물어왔다.
“언니 핸드폰 번호 뭐예요? 다음에 같이 밥 먹어요.”
“집은 어디 쪽이에요? 방향 같으면 이따 같이 가실래요?”
“언니는 댄스팀 얼마나 하신 거예요? 송하연 선배님이랑 친해요?”
유현지는 그녀들의 호의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며 조곤조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모든 질문에 다 대답해줬다.
정이 가는 회사, 연습생들과의 좋은 관계, 기대가 되는 미래, 의지하고 싶은 사람, 모든 게 다 있으니 이젠 자신이 힘을 낼 차례다.
연습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연습실에서 현지는 매니저가 말해준 솔루션을 떠올렸다.
방금 전까지 연습생들에게 조언을 해줬지만, 자신 역시 조언을 듣는 입장인 건 매한가지.
아직 올라가야 할 계단이 너무나도 많았다.
현지는 잠시 굳어진 몸을 다시 풀고는, 연습실 한 켠에 놓인 컴퓨터로 재즈댄스의 음악을 틀었다.
-등이랑 어깨, 골반, 무릎, 발끝에 대한 컨트롤에서 큰 임팩트를 못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등. 어깨. 골반. 무릎. 발끝.’
지적해준 그곳들에 신경을 쏟으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장르이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역시 재즈와 댄스스포츠를 추천해준 이유가 바로 느껴졌다.
재즈댄스를 추다 보니 저절로 등, 어깨, 골반의 움직임에 민감해진 것.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하게.’
지적해준 곳에 집중하면서도 현지는 매니저님이 해준 다른 말들 또한 잊지 않았다.
-보니까 복근의 힘도 충분해서 무슨 동작을 해도 흔들림 없이 쫀쫀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모든 동작들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아이솔레이션도 잘 되고 악센트도 잘 주시는 것 같고요. 거기다 각도 좋고 표정도 잘 살리는 느낌이에요.
‘복근. 쫀쫀하게. 부드럽게. 아이솔레이션. 악센트. 각. 표정.’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체크를 해가며 몸을 움직였다.
생각을 하지 않고 추는 것과 생각을 하며 추는 게 완전히 다르다는 건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
이렇게 하는 게 더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빨리 힘들어지곤 했지만.
당장에 보이는 움직임부터가 다르다.
또한 이런 것들이 쌓이다 보면 나중엔 그 차이가 훨씬 더 크게 벌어질 테고.
‘확실히 달라진 느낌이 있어.’
숨을 가쁘게 내쉬며, 춤을 추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눈에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어떤 것들이 약했는지, 어떤 것들이 좋았는지, 그리고 매니저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모든 게 보이고 느껴지고 있었다.
‘등. 어깨. 골반. 무릎. 발끝.’
연습을 하면 할수록, 아주 조금씩이지만 서서히 바뀌고 있다.
지적 받은 부분들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모든 동작들이 좀 더 유기적으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느낌이다.
매니저님이 해주었던 칭찬의 말.
지적해줬던 부분들에서도 똑같은 칭찬의 말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솔루션이 좋아서 그런가.’
솔루션이 너무 좋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장르까지 발을 넓히면서 유현지가 가지고 있던 특별한 재능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거나.
어쩌면 둘 모두에 해당되었을 수도 있었다.
***
“오빠! 빨리 오세요! 빨리요!”
대본리딩 때도, 첫 촬영 때도, 그리고 제작발표회가 있던 어제도 안 했던 회식을 첫 방송을 앞둔 지금에서야 하고 있다.
모든 테이블에 삼겹살이 지글거리며 구워지고 있는 가게 안에 익숙한 얼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구선학 감독님, 이우진 작가님, 카메라 감독님과 조명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들, 그리고 제작사 대표와 그 직원들.
또 박송이, 김기혁, 윤성준 등의 배우들과,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파닥파닥 손짓하는 채희까지.
“오바 좀 하지 마라.”
“오바라뇨!? 이제 곧 방송 시작하는데 흡연하러 가는 게 말이 돼요? 그러다가 시작 부분 놓치면 어쩌려구요!”
채희의 호들갑에 주위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주위 한 번 둘러봐. 지금 너처럼 초조하고 다급한 표정 짓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 진짜 누가 보면 큰일 난 줄 알겠어 아주.”
내 말에 채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불퉁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고기에 쌈장을 찍고는 그 삐죽 튀어나온 입술 앞으로 들이밀었다.
날 째려보면서도 입은 벌려서 잘 받아먹는다.
오물오물 맛있게 먹고 있는 채희를 보며 나는 손가락으로 TV를 가리켰다.
“아직 제목 로고도 안 떴어. 시작하려면 한참 멀었다고.”
“한참까지는 아니거든요?”
사실 벌써부터 잔뜩 긴장한 얼굴이 되어있는 사람들이 몇몇 보이긴 했다.
감독님도 그 중에 하나였고.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우리 드라마는 잘 될 거니까.
제작발표회 전후로 우리 드라마는 노를 아주 힘차게 저으며 홍보에 나섰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다 이렇게 하겠지만, 우리에겐 홍보에 아주 잘 먹히는 유리한 요소가 분명히 있었다.
첫째로, 구선학 감독의 존재.
영화감독으로서 여러 작품들을 성공해온 덕에, 그 영화들의 이름을 파는 것만으로도 대중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 모아졌다.
둘째로는, 우리 채희.
전작으로 웹드라마계에서 대성공을 거둔 덕에 어리고 젊은 시청자층을 열혈 팬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우리가 뿌린 홍보를 여기저기 나르며, 이번 드라마 홍보에 한 팔 거들기까지 했다.
이 바닥에 몸 담은 이라면 그 누구도 바라 마지않는 SNS 화제성, 그걸 방송 시작 전에 우리 채희의 팬들이 알아서 만들어주고 있었다는 거다.
마지막으로, 제작발표회에서 공개된 하이라이트 영상.
감독님께서 직접 작업하셨다는 이 하이라이트 영상은, 한 번이라도 봤다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게끔 만들어졌다.
역시 짬은 무시할 게 못 되고, 명성은 괜히 쌓인 게 아니라니까?
당연히 배우들의 연기가 상당했기에 뽑을 수 있는 퀄리티이기도 했다.
‘쟤는 엄청 좋아하네.’
눈매가 진한 호선을 그린 채 핸드폰을 보는 박송이.
이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모든 이들이 수혜를 봤지만, 그중에서도 박송이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굉장히 좋았다.
짧지 않은 배우 활동으로 인해 이제 신선할 것 없다는 평가를 받곤 했었는데, 이 영상의 반응에서는 그녀가 한 번 더 레벨업을 했다는 얘기마저 곳곳에 떠돌기 시작했으니까.
어쨌거나 성공할 수밖에 없는 작품에 여러가지 청신호까지 걸렸으니, 내가 이렇게 여유로울 수밖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걱정 없이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끌벅적했던 소리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간혹 가다 한두 마디 정도씩만 들릴 뿐이었다.
위에 걸린 TV를 보니, 고기를 구울 때 뜨기 시작했던 프로그램 로고가 사라져 있었다.
이제 마지막 광고가 나오고 있다는 의미.
치이익- 치이익-
나는 고기를 뒤집으며 채희의 표정을 살폈다.
‘얼씨구···?’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실눈으로 TV를 보고 있다.
안 보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고.
내가 뭐라 말한다고 한들 저 상태가 풀리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테니 나는 그냥 익은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채희의 접시 위에 올려두었다.
“먹으면서 봐. 이거 잘 구워졌다.”
내 말은 아주 한 귀로 흘리는 모양···은 아닌 듯했다.
안 듣는 척하면서 바로 집어먹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기를 더 올려줬고, 우리는 다 같이 입을 다물며 첫 방송을 조용히 시청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니까.’
드라마가 아주 기가 막히게 뽑혀졌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채희의 표정도 시시각각 바뀌었다.
입술을 모으며 감탄을 하기도 하고, 픽 웃기도 하고, 만족스럽게 은은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냥 드라마를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촬영 때를 떠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다 긍정적인 감정들이었으며, 실망과도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한 톨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
누구는 TV엔 시선도 주지 않고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살피며 소리 없이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시청자들의 실시간 반응 또한 괜찮은 모양.
하긴 이걸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안 좋아할 리가 없지.
그렇게 드라마가 끝이 났을 때, 고깃집 안에는 훈훈하고 뜨거운 열기가 은은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다들 다음 순서를 기다리듯, 기대감을 잔뜩 담은 얼굴로 제작사 대표를 바라봤고.
제작사 대표는 핸드폰에 전화가 오자마자 곧바로 귀에 붙이며 말했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모두가 숨죽인 채 대표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대표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담기자, 금방이라도 터질 듯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치 버저가 울린 상황에서 골대를 향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농구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다들 기쁨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인 모습이다.
우리가 바라는 시청률은 3~4%.
주말드라마나 일일드라마라면 모를까, 이 시간대의 월화 미니시리즈라면 1회에 시청률이 높게 나오기가 쉽지 않다.
간혹 가다 10퍼센트 이상, 혹은 15퍼센트 근처까지 나오는 것도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간혹 있는 일이지.’
어차피 우리의 드라마는 회차가 쌓일 때마다 시청률이 높아질 터.
첫 회의 시청률이 낮게 나온들 우리 드라마가 망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시청률은 이 바닥 사람들이라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 요소였다.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지표.
대표의 표정을 보아, 목표로 했던 3~4%를 달성하긴 했나 보다.
제작사 대표는 귀에 핸드폰을 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육 프로!”
목표를 크게 웃도는 수치에 1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와아아아!”
“육이요? 육 맞아요!? 육!?”
“우와아아! 대박!”
사람들은 모두 크게 열광했다.
진짜 이 바닥 사람들이란.
“오빠! 육 프로래요! 육 프로! 꺄아아!”
채희는 내 팔을 붙잡고 흔들며, 기쁨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물론 나 또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나도 이 바닥 사람 맞네.’
저들과 다를 바 하나 없었다.
시청률 6%, 대중들이 볼 땐 고작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우리가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 벅찬 희열을 느끼며, 해냈다는 기쁨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쭉쭉 치고 올라가는 일밖에 안 남았어.’
아직 시청자들의 반응을 제대로 살피지는 못했지만.
첫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나는 100% 장담하듯 말할 수 있었다.
점점 회차가 쌓일수록, 우리 또한 대중들처럼 6프로라는 수치를 우습게 여길 만큼 시청률이 올라가기라는 것을.
< 첫방송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