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볼 것도 없어 >
채희의 분량이 늘어난 5회 대본.
이 대본만 보고 앞으로의 비중을 단정지어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채희의 비중이 높아질 거라는 것.
이 때문에 정채희와 박한울, 그리고 HJ엔터테인먼트는 신이 났으나, 분량과 비중은 제로섬 게임.
조연의 분량이 늘었다면 필히 주연의 분량이 줄어드는 법이었다.
“넌 이 새꺄! 현장에서 하는 게 대체 뭐야!”
“죄송합니다.”
“너 이우진 작가님 한 번이라도 찾아가 봤어?”
“···죄송합니다.”
“일 똑바로 안 해!?”
이사에게 깨지고 있는 건 매니저였지만, 정작 매니저보다도 마음이 불편한 건 박송이였다.
불편하기만 할까, 쪽팔리기도 했다.
정채희의 분량이 늘어난 건 HJ엔터 쪽이 작가에게 찾아갔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좀 그만해요!”
버럭 소리치는 박송이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매니저 오빠가 무슨 잘못이라고 그래요!”
소규모의 배우 기획사.
이 회사에서 다크호스 격인 박송이는 회사의 희망이자 빛과 소금이었다.
이사는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툭툭 때리며 말했다.
“매니저가 돼서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두고 보는 게 말이 돼? 안 되겠어. 내가 항의하든 뭘 하든 확실히 해결할 테니까 송이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하던 대로만 해.”
금방이라도 행동에 나설 것만 같은 이사의 태도에.
박송이는 눈에 불을 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것도 하지 마요!”
이사는 뭔가 말하려다가, 박송이의 눈을 마주하고는 혀 끝까지 나온 말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경쟁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꼭 다시 뺏어올 테니까, 저 쪽팔리게 하지 말아주세요. 이사님이 항의하시면 제가 뭐가 돼요. 걔한테 연기력 딸리는 거 인정하는 꼴밖에 안 되잖아요.”
“그게 어떻게 그런 뜻이 돼? 이건 정당한 권리를 찾아오는-“
“제발요 쫌!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사님은 그냥 가만히 계세요!”
연기력 때문에 분량이 늘어난 걸 아는데, 이쪽에서는 이사가 항의를 한다?
그거야말로 아주 우스워지는 꼴이 되는 거다.
‘내가 이길 거야!’
그 강경한 태도에 이사는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박송이는 이를 앙다물고는 정채희를 떠올렸다.
정채희의 대사처리, 그리고 분위기와 눈짓, 손짓, 몸짓, 호흡 등등의 모든 것들.
총체적인 연기력의 퀄리티.
그 무지막지한 걸 이기려면 시간과 심력, 체력을 모두 아끼고 아껴야 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쓸 여력이 있으면, 연습으로.
그래서 실전에서의 실력으로 나타내야만 했다.
박송이는 재차 굳게 의지를 다졌다.
목표는 실력으로 정채희를 꺾어서 다시 분량과 비중을 뺏어오는 것.
그 목표를 위해, 박송이는 잠도 줄여가며 연습에 몰두했다.
***
이우진 작가는 조연 라인의 분량을 늘리는 걸 결정하는 데 있어 그리 많은 고뇌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는 게, 정채희가 너무나도 확실한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에.
물론 다른 배우들 또한 연기력이 뛰어났지만, 정채희만큼 캐릭터를 생생하고 뚜렷하게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니 고민의 여지가 없지.
허나, 그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만큼은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배우의 역량 문제가 아닌 작가의 영역이니까.
‘이 방법이 먹혀야 할 텐데···.’
이우진 작가는 5회부터 조연 라인의 분량과 비중을 높였지만, 갑작스럽게 비중이 높아지면 시청자들이 혼란스러워할 수도 있을 테니, 한 가지 장치를 넣었다.
진부하지만 잘만 되면 효과 하나는 확실한 방법, 신파와 감동.
4회 마지막에 눈물이 나오는 씬을 넣으며, 정채희의 캐릭터를 매끄럽고 부드럽게 시청자들의 마음속에 더 깊숙히 넣을 생각이었다.
이게 잘만 먹힌다면 비중과 분량이 많아져도 시청자들이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을 테고, 별로 개의치도 않아 할 테니까.
“후우.”
아무튼 대본이 이미 나온 이상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반 사전제작이기 때문에 아직 수정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스튜디오 한 켠에서 생각에 잠기고 있던 이우진 작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아, 네. 안녕하세요, 송이 씨.”
오늘은 정채희의 중요한 씬이 있는 날이기도 했지만, 정채희만 촬영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우진 작가는 이왕 오는 거 그냥 오늘 촬영하는 걸 다 보기로 했는데, 오늘 촬영의 첫 씬은 박송이가 연기하는 씬이었다.
‘좀 어색한데···.’
이미 5회의 대본이 모두에게 전달됐기 때문에, 오늘 이곳에 오며 각오했던 일이기도 했지만.
역시 이렇게 박송이와 직접 얼굴을 맞대니 어떤 얼굴로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면, 어색해하는 이우진 작가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박송이의 표정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박송이는 대본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저 인사만 하고 작가의 곁을 떠났다.
그 모습에, 이우진 작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약간의 항의나 불만 정도는 들을 각오가 돼있었는데, 정작 박송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으니까.
‘뭐지?’
그렇게 의아해하고 있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박송이가 연기하는 오늘 첫 씬의 촬영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촬영을 지켜보던 이우진 작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뭐야. 박송이가 연기를 이렇게 잘했었나?’
정채희만 생각하고 있던 이우진 작가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
“···오늘 촬영장 분위기 평소랑 좀 다른 것 같지 않아요?”
채희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속닥속닥 물었다.
분위기가 좀 어수선한 건 사실이지만, 채희의 표정과 눈빛, 그리고 하는 행동을 보자면 자기가 마치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명탐정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그 정도까지 이상한 건 아닌데.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너 할 거에만 집중해. 지금 중요한 씬이잖아.”
잘만 해낸다면 대중들에게 연기력을 어필하기 아주 좋은 감정씬.
4회의 엔딩 씬이었다.
이런 신파는 대중들에게 연기력을 어필하기에도 좋지만, 잘만 하면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캐릭터에 깊게 빠져들도록 만들 수 있는 씬이기도 했다.
5회부터 분량이 늘어난 건, 채희가 이번 씬을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제작진들에게 충분히 생겨났기 때문일 터.
나는 4회의 대본이 나올 때부터, 채희와 함께 이 장면에 대한 준비를 아주 철저히 했다.
그 덕에 감정씬을 앞두고서도 우리가 이렇게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거였고.
정말 자신 있거든. 이번 씬.
“큼. 채희 씨.”
구선학 감독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채희를 불렀다.
주위를 살펴보니 씬의 준비가 모두 끝난 듯 보였고, 이제 촬영을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번 씬의 중요성이 크다 보니, 평소엔 채희에게 믿고 맡기던 감독님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채희 씨는 가늠이 잘 안 된단 말이에요. 준비되신 거 맞죠?”
“네, 감독님! 준비됐어요!”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눈동자.
감정이 전혀 잡히지 않은 듯한 모습에 감독님이 재차 물으셨다.
“준비된 거··· 확실히 맞죠?”
“네!”
감독님은 미심쩍지만 한 번 믿어보자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시작하죠.”
“네!”
***
스텝들이 전부 숨을 죽이며 정채희의 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도 정채희의 연기에 관심이 많았지만, 특히 이번 씬은 터뜨리는 씬이니 더더욱.
이우진 작가는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카메라 앞에 선 정채희를 바라봤다.
‘어떻게 연기할까?’
으레 그렇듯, 감정씬이라는 것은 연출과 서사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장면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연기가 가장 중요했다.
누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서사를 몰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울컥하는 감정을 일게 만들기도 하고, 서사에 깊게 몰입했어도 몰입을 와장창 깨게 만들기도 한다.
그 유명한 알 파치노의 오열 연기가 그렇다.
<대부>에서의 그 장면은 스토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 사람이 왜 우는 건지 아무런 정보가 없어도 숨을 죽이며 몰입하게끔 만든다.
물론 그 정도 명장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이번 씬에서 ‘억지 감동’, ‘억지 눈물’, ‘한국형 신파’, ‘착즙 클리셰’, ‘K-즙짜기’, ‘K-신파’ 등등의 수식어가 붙는다면 오르던 시청률도 꺾일 수 있었다.
요즘은 대중들이 워낙 신파에 대한 거부감이 크기 때문에.
모 아니면 도.
이우진 작가는 머릿속에서 분주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원래였으면 굉장히 초조한 마음으로, 정채희가 제발 잘 살려내기를 빌고 있어야 했을 테지만.
‘박송이도 엄청 잘했지.’
아까 전, 박송이의 연기를 보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스텝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 때문에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모 아니면 도’ 중에 ‘모’가 나올 것으로 확실시되지 않는다면.
감독님과 상의해 결정을 다시 바꿔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정채희가 잘 살리는 게 베스트야.’
정채희의 연기력을 믿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이고, 설령 그녀가 잘 못 살린다 해도 다시 방향을 바꾸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최고의, 그리고 최선의 방향으로 가는 편이 훨씬 좋다.
어쩌면 드라마의 흥망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분수령이 되는 씬.
사위가 쥐죽은 듯 적막한 가운데, 감독님의 목소리가 스튜디오에 낮게 울려 퍼졌다.
“스탠바이. 큐.”
그 싸인이 울려 퍼지기 전까진, 씬의 난이도에 걸맞지 않게 정채희의 얼굴에는 여유가 묻어져 나왔는데.
싸인이 울린 뒤엔, 그녀가 어째서 여유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모두에게 깨닫게끔 만들었다.
“올 거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엄마는 왜 말도 안 하고 올라와서 사람 미안하게 만들어!”
딸을 보기 위해 시골에서부터 김치와 반찬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서울로 올라온 엄마.
길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자정이 다 되어서야 딸의 자취방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와보니 딸 ‘신수아’는 집에 없는 상황.
업무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정이 될 때까지 그녀는 회사에 발이 묶여 있어야만 했다.
실제로 방영되는 드라마에서는 ‘너 회사 일로 힘든데 방해될까 봐 말 안 했지. 엄마는 괜찮으니까 비밀번호 좀 알려줘. 냉장고에 반찬들이랑 김치 빨리 넣어놔야 돼.’라는 어머니의 대사가 흘러나오겠지만.
지금 촬영장에서는 어떠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홀로 연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서러움과 직장 스트레스에 의한 짜증,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
여러 감정이 뒤섞여, 미간은 찌푸려져 있고 턱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여러가지를 내포한 눈빛으로 입술을 꾹 깨물며, 목소리로는 울고 있다는 티를 꾸역꾸역 숨겨낸다.
“비밀번호는 내 생일. 그리고 나 좀 늦게 가. 먼저 자고 있어. 괜히 기다리지 말고. 응. 알았어. 오늘 일이 특히 많아서 그래. 알아서 잘할 테니까 괜한 걱정하지 말고.”
완전히 망가진 얼굴과는 달리 목소리만큼은 태연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 억지로 물기를 참아내는 목소리가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더 마음을 꽉 조여오게 만들었다.
전화를 끊고 주저앉아, 참아왔던 울음을 마음껏 쏟아내며 엉엉 우는 ‘신수아’.
“···하아.”
이우진 작가의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보이는 건 슬픈 장면이지만 온몸으로는 희열이 느껴지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최선의 장면보다 족히 열 배 이상은 뛰어난 장면이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침이 꿀꺽 넘어가고,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고 있다.
눈이 번뜩이며 머릿속에 영감이 팍팍 떠오르고 있다.
모두 다, 정채희가 만들어내고 있는 캐릭터를 마주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대본은 자신이 썼지만 그 캐릭터를 최종적으로 만들고 살리는 건 배우의 몫.
가뜩이나 생생하고 뚜렷했던 ‘신수아’에 신파가 더해지며, 이젠 입체감까지 굉장히 진해져버렸다.
이우진 작가의 뇌리에, 정채희가 빚어내고 있는 캐릭터가 콱! 하고 박혀 멋대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더 볼 것도 없어.’
구선학 감독의 입에서 나지막한 ‘컷’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이우진 작가는 몸을 돌려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작업실로 가서, 캐릭터가 저 스스로 날뛰며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을 풀어내야만 했다.
되도록이면 빨리.
***
모든 스태프들의 얼굴에서 감탄과 슬픔이라는 감정이 뒤섞이며 나타나고 있었다.
입은 연신 ‘와’하는 모양만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나는 연기가 끝난 채희에게 황급히 다가가 휴지를 건네주었다.
“잘했어. 수고 많았다, 채희야.”
우리가 함께 철저하게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연기하며 준비하지는 않았다.
감정의 소모가 막대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일까, 이번 연기를 보며 내 가슴도 먹먹해지고 목도 까끌까끌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 동시에 감동과는 결이 다른 뜨거운 감정도 일어났다.
자부심, 그리고 기대감.
나는 이 순간, 우리 회사에 오디션을 보러 와준 채희에게 감사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채희의 어깨를 살포시 토닥여주며 그녀가 감정을 다 추스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채 휴지로 얼굴을 덮고 있던 채희에게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저 코에 콧물 엄청 찬 거 같아요.”
“···풀어.”
“소리 대박일 것 같은데, 화장실 가서 풀래요.”
“···그래.”
하긴 콧속에 콧물이 가득 차면 풀 때의 소리가 좀 더럽게 들리긴 하지.
스멀스멀 열정에 더 불을 지피고 있는 스태프들의 여운도 깨질 테고.
“저 부축하면서 바래다줘요. 앞이 안 보여요.”
“눈에서 휴지를 떼. 휴지로 막고 있으니까 앞이 안 보이지.”
“저 지금 얼굴 완전 엉망이라서 창피하단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를 화장실 앞까지 부축해줬다.
스태프들의 여운은 무사히 지켜냈지만, 내 여운은 완전히 바스라지고 말았다.
“어휴. 하여간에 연기할 때랑 아닐 때랑 느낌이 너무 다르다니까.”
복도 벽에 등을 기대며, 나는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더 볼 것도 없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