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채희 옆에 있는 한 >
첫 촬영 장소는 세트가 아닌 야외에서 진행되었다.
용인에 위치한 대학교.
우리는 주차를 하고, 촬영이 진행되는 장소로 걸어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윤팀장님의 시선은 계속해서 주변을 훑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살펴보고 있는 거였다.
수업이 없는 주말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꽤 있는 편이라, 윤팀장님의 얼굴에선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나지를 않았다.
분명히 차에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듣고는 안심하시더니, 막상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니 불안한 모양이다.
반면, 채희는 내 옆을 걸으며 옆구리에는 대본을 끼고, 핸드폰으로 팬카페를 열심히 구경 중이다.
“그거 보는 게 그렇게 재밌냐? 촬영 직전이면 대본을 봐야지.”
그냥 심심해서 건네는 말에 채희도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걸으면서 대본을 어떻게 봐요.”
“걸으면서 핸드폰은 보고 있는데, 대본은 왜 못 봐.”
“못 봐요, 못 봐.”
얘도 이젠 내가 심심하면 되는대로 아무런 말을 던진다는 걸 아는 거다.
대답이 성의가 없고 영혼이 없다.
툭, 건들면 툭, 하고 반응이 튀어나는 게 재밌었는데, 적응이 다 됐는지 이젠 받아주지도 않는다.
아쉽게.
그런데 그때.
“어!? 유나현이다!”
정채희의 귀가 쫑긋 움직이는 것과, 고개가 퍼뜩 들려진 건 동시에 이루어졌다.
눈도 커다래졌고, 발걸음도 멈춰졌다.
‘유나현’은 <캠퍼스 낭만이 원래 이런 거야?>에서 채희가 맡은 역할.
그리고 그 웹드라마는 10대와 20대 초반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 이 대학교 안엔 대학생이 아닌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20대 또한 많았다.
그러니 채희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우와!”
채희와 눈이 마주친 저 학생의 입에서 아주 솔직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입이 떡 벌어져 있는데, 채희에게 다가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채희도 가만히 있었다. 걷지 않고. 가만히.
사진을 찍어주거나 사인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먼저 다가가기에도 조금 어색하고 민망해서 이러는 걸 거다.
나는 채희의 시선이 저 학생에게 팔린 걸 틈 타, 몰래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라고.
내 수신호에 그 학생은 가방을 등에 멘 채 후다닥 뛰어왔다.
“정채희 맞죠? 저 사진 한 번만 찍어주시면 안 돼요?”
“찍어드릴게요.”
환하게 미소 지은 채희가 학생의 핸드폰을 받고 함께 셀카를 찍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저 팬카페 가입했어요! 그럼 저기서 촬영하는 게 이번에 들어간다는 그거예요? 헌팅으로 만난 사이?”
채희도 방금 전까지 팬카페를 염탐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팬을 만나게 됐다.
채희는 학생의 질문들에 친절하게 대답했고, 그 학생은 엄청 행복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채희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지경이다.
윤팀장님이 그걸 보고는 말씀하셨다.
“그래! 오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네 팬이라고 생각해라, 채희야. 알겠지? 이따가 촬영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냥 다 팬인 거다?”
글쎄,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
걱정이 참 많으시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촬영장까지 가는 길에 두 명의 팬을 더 만났고.
그 세 명의 팬은 채희의 행복 수치를 최대로 키워 놓았다.
“씬 들어가나 봐요.”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넨다.
촬영장소에 도착하니, 씬이 곧 시작될 모양인지라 우리는 조용히 서서 구경하기로 했다.
“그러네. 씬 끝나고 인사 돌자.”
“네.”
지금 찍으려는 건 박송이의 단독 씬.
준비가 다 됐는지 촬영장이 고요해졌을 때, 문득 박송이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정확히는 채희를 본 거겠지만.
“스탠바이, 액션.”
감독님의 사인에, 박송이의 연기가 시작됐다.
나는 그걸 지켜보며, 리딩 때와는 또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좀 더 캐릭터 분석을 많이 했고, 좀 더 잘하려고 노력을 했다는 게 눈에 보였다.
분명 내 눈은 실물을 보고 있는데, 화면에 어떻게 담길지가 예상이 간다.
‘잘하네.’
역시 구선학 감독님이 연출하는 드라마의 주연배우라서 그런지 잘한다는 게 느껴졌다.
리딩장에서 디렉팅 받은 것들도 다 녹여내고 있었고.
“컷! 좋아요. 좋은데.”
‘좋아요, 좋은데.’라는 말은 늘 그렇듯이, 좋지 않다는 뜻.
구선학 감독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좀 더 많은 걸 요구했다.
“어머니 전화 끊을 때, 좀 더 까칠하게 해볼까요? 착하게 안 보이는 것도 다 좋았는데 전화 끊을 때 표정에서 좀 더 짜증이 드러났으면 좋겠어서.”
“네!”
기준이 높다.
이게 반 이상 사전제작이라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저렇게 못 찍었지.
아니, 결과적으로 두 번째에 바로 오케이가 나왔으니 상관은 없었으려나.
우리는 씬이 끝나자 바로 인사를 다녔다.
감독님을 비롯한 모든 스텝들에게, 그리고 박송이에게까지.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박송이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저번 리딩장에서 인사했을 때와는 너무 다른 표정.
마치 얄미워하는 것만 같았다.
“연기하는 거 잘 봤지? 나도 연기 잘해. 주연배우고, 나도 열심히 했어.”
아직 씬에서 못 빠져나온 건 아닐 테고, 아마 리딩에서 발린 것 때문에 그렇겠지.
뻔할 뻔 자였다.
저렇게 대놓고 드러내는 걸 보니 애초에 마음을 감출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아··· 네. 되게 잘 봤어요. 정말 멋지셨어요.”
대답을 하는 채희의 동공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박송이가 우리 곁을 떠나자, 채희는 내 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주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선배님이 저 왜 미워하시는 거예요!? 미워하시는 거 맞죠! 저 어떡해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냐구요! 저 이제 어떡해요!”
아주 발을 동동 구른다.
“밉지가 않아.”
도움은 내게 요청했는데, 대답은 윤팀장님에게서 나왔다.
피식 웃으시면서 재밌다는 듯이.
“뒤에서 음습하게 개 짓거리 하는 것보다 저렇게 하는 게 백 번 낫지. 일단 눈에 보이니까 안심이 되잖아.”
그 말을 시작으로 윤팀장님은 다른 촬영장에서 있었던 썰들을 풀기 시작했다.
썰들이 어찌나 드라마틱하고 흥미로운지, 긴 얘기를 듣는데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그 결과 도출된 것은, 채희의 마음의 안정이었다.
“선배님이 되게 착하신 거구나.”
“좀 낫다 뿐이지, 그렇다고 막 착한 건 아니지 않아?”
내 말에 채희가 나를 도끼눈으로 째려봤다.
“오빠가 그 마음을 알아요?”
“넌 알고?”
“그럼요! 제가 오빠 만나기 전까지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듣고 보니까 선배님 마음 다 이해돼요, 저는.”
“...그래. 나만 나쁜 놈이고 나만 속 좁은 놈이네.”
“헐. 진짜 속 좁다. 오빠 설마 삐졌어요? 겨우 이런 걸로? 와. 진짜 쫌생이.”
삐진 게 아니라, 재밌는 반응 좀 보고 싶어서 그런다.
아까는 나한테 적응해서 그런지 잘 안 받아줬으니까.
얘는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게 재밌다니까?
아무튼, 이제 우리 채희의 차례가 됐다.
같은 장소, 다른 캐릭터.
이건 구선학 감독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캐릭터의 다름을 부각시킬 수 있으니까.
“저 갔다 올게요! 진짜 오빠,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쫌생이라고 한 거 취소할 테니까.”
“내가 쫌생이라서-”
부정적인 말을 꺼내며 장난을 치려 했는데, 채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요즘은 좀 다른 사람들 시선에도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아서 장난을 치려 한 건데, 아무래도 아직은 이런 장난까지는 받아들이기가 힘드나 보다.
“쫌생이라서 마음 속으로만 응원할 거야. NG내면 엄청 웃어야지.”
“···진짜 간 떨어질 뻔했네. 오빠, 장난 치려다가 말았죠? 앞으론 그런 장난 치지 마요.”
“그래···. 미안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테니까 마음 놓고 연기해.”
“네.”
채희는 카메라가 향하고 있는 곳에 걸어가며 두 번이나 나를 돌아봤다.
더 미안해지네, 젠장.
그리고 그때, 주변이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이제 시작하려나 보다.”
“정채희가 그렇게 연기를 잘했어요?”
“장난 아니라니까. 한 번 봐. 어떻게 하나.”
스텝들의 목소리였다.
주연배우인 박송이가 연기할 때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다른 데 앉아 있던 스텝들과 어디 안에 들어가 있던 스텝들까지 모조리 튀어나와, 카메라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구경하려 하고 있었다.
그걸 보니 방금 전의 일이 더 후회가 됐다.
그 장난 때문에 긴장하고 두려워하면 어쩌지?
하지만 나는 이런 불안한 마음과는 다르게, 얼굴 위로는 태연자약한 표정만을 드러냈다.
채희의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서.
그렇게 남몰래 속을 끓이고 있을 때.
구선학 감독님의 큐 사인이 촬영장을 울리며, 촬영이 시작됐다.
그리고.
내 걱정은 나를 완전히 배신했다.
“컷! 오케이! 와, 채희 씨 진짜 너무 좋은데요?”
구선학 감독님은 디렉팅 없이 단 한 번에 오케이를 외치며, 함박웃음을 지으셨고.
조용히 구경하던 스텝들도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었다.
“확실히 잘하긴 하네요. 그런데 그렇게 소름 돋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야, 일상 씬인데 그럼 소름까지 돋겠냐? 나중에 봐라. 진짜 장난 아니야. 그리고 화면으로 보면 저 일상 씬도 죽여주게 나올걸?”
“아! 그렇겠네요. 빨리 감정 씬 연기하는 거 보고 싶다.”
아무래도 내가 채희의 곁에 있는 한, 앞으로도 걱정은 아예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잘하나 보자’하고 구경하는데 하나도 떨지 않았으니.
“오빠! 저 어땠어요? 잘했어요?”
활짝 웃으면서 묻고 있는 게 칭찬을 바라는 것 같아서.
나는 미안한 마음까지 듬뿍 담아 칭찬해줬다.
“응. 진짜 엄청 잘했어. 스텝들 반응 보이지? 감독님도 대만족하셨고. 그리고 자세히 보니까 오늘 특히 더 예쁜 것 같다? 방송에 엄청 잘 나올 것 같은데?”
내가 무슨 마음으로 칭찬을 하는지 아는 것 같은 눈빛이다.
입매와 눈매가 모두 미소를 그리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근데··· 왠지 나를 귀엽다는 듯이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착각이겠지? 이거 등허리가 너무 간지러운데.
***
“컷! 오케이! 너무 좋았어요!”
구선학 감독이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일수록 박송이의 눈빛은 더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감독님이 일부러 더 그러시는 것 같았다.
저 베테랑 감독님이 배우들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참 요상한 사람이야.’
마음에 드는데 마음에 안 든다.
어쨌든 저렇게 해서 박송이의 연기가 더 좋아진 건 맞으니까, 막 뭐라고 할 수가 없기는 했다.
그냥 좀 탐탁지 않을 뿐이지.
“오빠, 저 지금 갈까요? 지금은 괜찮겠죠?”
채희가 묻는다.
지금은 점심시간.
제작진들은 시간과 돈을 아끼기 위해 식당이 아닌 도시락을 주문했고.
채희는 도시락을 막 받은 박송이에게 다가가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건넬지 말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갈려면 지금 가는 게 맞지. 얼른 다녀와.”
“네!”
감독의 의도가 보여도 꼭 맞춰줄 필요는 없다.
채희는 그럴수록 더 마음이 불편해질 테니까.
나와 윤팀장님은 박송이에게 쭈뼛쭈뼛 다가가는 채희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날 선 박송이의 눈이 채희를 향하고 있었고, 채희는 두 손 공손히 모아 허리를 아주 깊게 숙였다.
“선배님! 맛있게 드세요!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박송이는 날 선 눈빛을 바꾸지 않은 채로,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주억거렸다.
이에, 채희는 그대로 몸을 돌려 후다닥 도망 나오듯 우리 쪽으로 걸음을 빠르게 옮기기 시작했다.
근데 그 표정이 너무 불쌍하고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내가 웃는 걸 본 채희의 표정이 울상으로 바뀌었고, 나를 향해 거의 달려오다시피 걸음을 빨리 했다.
퍽퍽! 내 팔을 때리며 말한다.
“뭐가 웃겨요! 전 지금 떨려 죽겠는데 이게 재밌어요!? 매니저님 친구 없으시죠! 그쵸!? 왜 사람이 공감을 못해요, 왜!”
나는 그 모습이 더 웃겨서 아예 배를 잡고 웃었다.
“아니 진짜 웃지 말라니까 왜 더 웃냐고요! 이게 재밌냐고요! 빨리 웃음 그쳐요! 선배님이 이쪽 보시잖아요! 오해하시면 어쩌려고···!”
“큭큭··· 프흐하하하하!”
“아니 진짜 웃지 말라고요!”
첫 촬영은 이렇게 아주 좋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 내가 채희 옆에 있는 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