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24화 (24/170)

< 걱정보다는 기대를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

대본 리딩이 모두 끝나고 돌아가는 박송이의 차 안.

리딩을 하러 갈 때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의자에 몸을 파묻은 박송이가 숨을 크게 내뱉으며 말했다.

“걔 뭐하는 애야. 걱정 안 해도 된다며.”

“···.”

실장의 목울대가 침을 삼키며 출렁였다.

대답은 하지 않고 룸미러로 박송이를 힐끗 바라보기만 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고, 리딩장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려서 그런지 머리를 굴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 걔 오늘 디렉팅 하나도 안 받은 거 알아? 감독님이 아예 믿고 맡기는 느낌이더라고. 나랑 다른 배우들은 다 엄청 받았는데. 이게 말이 돼? 고작 웹드라마 하나 찍은 애한테 이렇게 하는 게 말이 되냐고.”

믿기지 않는 건 실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농도 짙은 연기력과 모두를 압도하는 존재감.

연기를 아예 모르는 까막눈이 보기에도, 그녀가 뛰어나다는 건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막대한 재능이었다.

“···송이야.”

“오빠, 작가랑 감독이랑 대표 표정 봤어? 걔 분량 확 늘릴 것 같아. 나 이러다가 조연보다 분량 적어질 수도 있다고!”

“송이야, 진정해.”

실장은 다시 룸미러로 박송이를 바라봤다.

방금 전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지금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눈빛을 하고서는 부라려본다.

“오빠, 걔 진짜 어마어마한 여우 같지 않아? 와, 세상 순수한 척은 다 하더니 완전 뒤통수 맞았네.”

리딩이 시작되기 전에 조언을 해준 게 너무 쪽팔려서, 박송이는 리딩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송이야! 그게···.”

“하! 두고 봐. 그래도 주연은 나야. 나도 예쁘고 나도 연기 잘한다고. 오빠, 촬영 전까지 스케줄 다 비워줘. 그리고 나 연습 좀 도와줘.”

그래봤자 주연은 자신이다.

정채희가 연기를 얼마나 잘하든, 감독님한테 믿고 맡겨지든 말든.

시청자들에게 잘 보여지기만 하면 그만이다.

현장에서 디렉팅을 얼마나 받든지, 결과적으로 방송에 잘 나오기만 하면 된다.

“절대 안 잡아먹힐 거야.”

분량도, 인기도, 화제도.

“현장에선 걔가 다 해먹으라고 해. 다른 건 절대 양보 안 해줄 거니까.”

박송이는 아까 전의 굴욕을 떠올리며 의지를 불태웠다.

마음먹은 대로 될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

누가 봐도 대본 리딩에서 승리를 차지한 건 채희였다.

하지만 채희는 승리의 축배를 들거나 자만하지 않았다.

얘의 성격상 자만이란 건 하고 싶어도 절대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진짜 너무 기대돼요! 다들 연기 엄청 잘하시더라고요!”

심력을 많이 쏟았기 때문인지, 그녀는 리딩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푹 절여져 있다시피 했는데.

몇 시간이 지난 지금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이제 제일 큰 고비는 넘겼다 이거지.

‘사람들은 알까?’

오늘 리딩장에서 보여준 채희의 연기가 실력의 100%가 아니라는 것을.

앞으로의 촬영을 다 포함해서 오늘이 가장 못한 연기를 보인 거란 사실을.

‘기대되네.’

다른 매니저들은 매일같이 걱정이 이만큼이라는데, 나는 어째 매일같이 기대가 이만큼이다.

빨리 촬영이 시작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빨리 방영이 됐으면 좋겠다.

그땐 또다시 우리에게 다른 세상이 펼쳐질 테니까.

“채희야, 오늘 지적 안 받았다고 완벽한 거 아니니까 연습 열심히 해야 된다?”

“네. 오빠가 보기에도 오늘 저 좀 별로였죠.”

“···.”

맞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네.

그냥 연습이나 해야겠다.

“왜 대답이 없어요?”

아니다. 밥부터 먹어야지.

“왜 대답이-“

“떡볶이 먹을래?”

“오! 치즈 떡볶이로?”

“그래. 치즈로 가자.”

배우로서의 미래는 기대가 되는데, 정채희로서의 미래는 좀 걱정이 된다.

이러다가 어디 가서 사기당하는 거 아닌가 몰라.

내가 항상 옆에서 딱 지켜줘야겠다.

***

시간이 흘러, 첫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우리 회사와 인터넷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우리 회사의 에이스이자 대중들의 차세대 솔로 퀸 스타가 컴백했으니까.

[송하연, 1년 반 만에 정규앨범으로 컴백! 트랙 수는 10개.]

[가수 송하연, 컴백하자마자 10곡 모두 차트 올 인. 1위 할 수 있을까?]

[차세대 슈퍼스타 송하연, 이번 앨범으로 퀸의 자리 넘본다! 솔로 퀸 비켜!]

송하연이 컴백했다.

선공개 싱글도 없이, 10곡의 정규앨범을 한꺼번에.

그러니까 난리가 날 만하지.

나는 오늘 컴백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아까 발매됐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지금까지 채희와 연습에 매달리느라고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집에 도착한 지금에서야 겨우 여유가 났다.

핸드폰에는 아까부터 읽지 않은 메시지가 톡 상단에 위치해 있었다.

[송하연] [어때요? 괜찮게 나온 것 같아요?]

오후 6시에 발매해놓고 오후 6시 1분에 받은 메시지다.

지금은 오후 10시.

4시간이나 지났지만 답장을 하려면 한 번 봐야지.

원래부터 송하연이라는 가수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얼른 보고 싶기도 했고.

나는 씻고 나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유튜브를 켜니, 역시 유튜브 알고리즘이 알아서 최상단에 송하연의 타이틀 뮤직 비디오를 올려놓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컨텐츠를 즐길 뿐인데, 막상 모니터 화면에 송하연의 뮤비가 올라와 있는 걸 보니 느낌이 사뭇 새로웠다.

채희처럼 촬영 현장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맡은 가수도 아닌데.

아무튼 그 오묘한 느낌이 별로 싫지는 않게 느껴졌다.

가까운 지인, 혹은 친구가 연예인이라는 느낌? 음악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서 더욱 친구 같은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뮤직 비디오를 감상했다.

가장 좋은 화질에, 전체 화면으로.

‘돈 많이 썼네. 착장도 많고, 세트도 좋고, 장치나 미술품도 많이 썼고.’

채희만 담당하게 되기 전까지, 나는 메뚜기처럼 이곳저곳을 옮겨다녀야만 했다.

그때 가수도 맡았었고, 들은 것도 많았지.

이젠 뮤비를 봐도 이런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직업이 관련되면 순수하게 즐길 수 없다고들 하는데, 이렇게 아는 게 많아져서 그러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뮤비는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와도, 즐기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미 들었던 음악은 후작업을 통해 더 귓가에 선명하고 즐겁게 꽂혀왔고.

뮤비에 나오고 있는 송하연은 때로는 귀엽게, 때로는 예쁘게, 때로는 멋지게 나오고 있었다.

“좋다.”

뮤비가 끝나고 댓글을 살펴보니, 역시나 좋은 반응만이 가득했다.

일단 가득한 외국어 댓글들은 차치하고 한국어 댓글들만 봐도 그렇다.

-존버 대성공.

-미친 거 아님? 얼굴, 보컬, 음악, 헤어, 메이크업, 착장, 세트, 색감, 눈, 코, 입, 개미허리 그냥 다 미쳤잖아ㅠ

-진짜 이번에 칼 갈았넼ㅋㅋㅋ 와 이러면 당해줄 수밖에 없짘ㅋㅋ

-역대급. 여러분 타이틀 말고 수록곡도 들어보세요! 진짜 안 좋은 게 하나도 없음! 장담함!!!!!!

이대로 수록곡까지 다 들어볼까 하다가, 뮤비를 한 번 더 본 다음에 듣기로 했다.

한 번만 보기엔 너무 아쉬워서.

게다가, 볼 사람이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너무 좋다.”

간간이 얼굴이 나오고 있는 유현지.

나는 뮤비를 보다가 그녀가 나오는 파트들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그러다 보니 4분짜리의 뮤비를 보는 데 10분이나 걸리고 말았다.

‘직캠 나오면 다 봐야겠어.’

나는 다른 수록곡들까지 모두 듣고는 메시지를 보냈다.

송하연에게, 그리고 유현지에게.

***

[뮤비 잘 봤어요! 다음엔 가수로서 뮤비에 나오면 좋겠습니다. 남은 활동 열심히 하세요! 직캠 나오면 다 챙겨볼게요.]

음악방송 대기실.

방금 받은 메시지를 바라보는 유현지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응원의 메시지를 받아서 그런지, 힘이 나는 느낌이다.

자신은 그렇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 그 사람의 표정과 눈빛, 목소리를 보면 자신이 꼭 재능 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유현지는 자신의 단점을 잘 알았다.

몇 년간이나 연습생 생활을 했으니 모를 수가 없지.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따가운 말들을 매일같이 들어야만 했으니까.

‘끼도 없고, 애교도 없고, 말재간도 없고, 그렇다고 춤을 그렇게 잘 추는 것도 아니고, 노래도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넌 그냥 다 애매해. 아이돌로서 팬들을 사로잡을 만한 게 하나도 없어. 얼굴 이쁘장한 거랑 목소리 깔끔한 거, 그건 무기 치고는 너무 약하지 않겠니?’

아이돌로서 성공하기 힘들 거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며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국 데뷔조에 들지 못했다.

그렇게 접었던 꿈이었는데.

‘YU엔터가 눈이 삐었어요. 그쪽 재능 넘쳐요. 엄청나게.’

그 사람이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손을 내밀어줬다.

나보다 나에게 더 확신과 자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

유현지는 답장으로 보낸 감사하다는 말의 진심이 제대로 전해졌으면 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렇게 대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흐음~ 흐음~”

그때 대기실 안을 울리는 허밍 소리.

송하연이 환한 얼굴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뭐가 그렇게 불만스러운지 핸드폰을 붙잡고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차트 순위가 올랐나?’

송하연의 기분 좋은 허밍을 듣다 보니, 그때 연습실 복도에서 허밍을 부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를 상상하게 됐다.

지금의 이 들뜨는 기분은 느끼지 못했겠지?

그래서 유현지는 송하연이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노래가 너무 좋아서 허밍을 부르게 된 거니까.

매니저와 만나게 된 것도 송하연의 앨범 활동에 참여한 덕분이고, 단체 연습이 끝나고 연습실을 잡아준 것도 송하연이다.

어떻게 보면 송하연 덕분에 그 매니저와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해야지.’

그래서 송하연의 이번 앨범 활동에 더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이번 활동이 댄스팀으로서 마지막 활동이기도 했고.

***

“웹드라마 때보다 스텝들이 훨씬 더 많을 거야. 보조 출연자들도 자주 만날 거고.”

윤팀장님이 걱정 어린 당부의 말을 해주고 있었다.

오늘은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는 날.

우리는 그동안 철저하게 준비하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왔다.

내가 보기에도 채희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연습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이 보이니, 도무지 그만 두기가 힘들었다.

일이 일 같이 느껴지지 않는 나날.

어떻게 연습을 도와주는 게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욱더 완벽을 기하려 했던 건, 지금 윤팀장님이 말씀하시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현장엔 웹드라마 때보다 더 많은 스텝들, 그리고 더 많은 보조 출연자들이 있을 테니까.

심지어 이젠 촬영의 규모도 더 커지고, 얼굴도 어느 정도 알려졌으니, 촬영을 할 때 더 많은 시민들에게 노출이 될 게 분명했다.

‘채희는 그걸 견뎌야 하고.’

그런데 리딩장에서만큼의 부담은 없을 것이다.

거기는 서로 대놓고 평가하고 재보는 시간이었다면, 지금부터는 그런 시선들이 아닐 테니까.

상당수의 배우들은 대사만 내뱉는 리딩보다는 실전이 치러지는 현장이 더 떨리겠지만, 채희는 그 반대.

‘윤팀장님이 리딩 현장이나 그 이후에 연습하는 걸 보셨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걱정도 안 하셨겠지.

나만 봐도 운전대를 잡으며 설렘만 가득할 뿐, 걱정은 전혀 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윤팀장님도 이런 내 상태를 눈치 챈 듯, 걱정 어린 말을 내뱉고 있는 걸 멈추고는 물으셨다.

“한울아, 네가 보기엔 어때?”

“제가 보기에요?”

“그래. 너 보는 눈 하난 정확하잖아. 특히 채희 관련해서는.”

언제부터였지, 윤팀장님이 나를 이렇게 단단한 신뢰의 눈빛으로 보기 시작한 게?

내가 음방 스케줄을 뛰고 있다가 전화를 받고 연습실로 헐레벌떡 뛰어갔을 때였나?

아니면 웹드라마 대본을 분석하고 채희의 연기를 봐줄 때?

그도 아니면 송하연의 매니저 제안을 거절했을 때?

아무튼 윤팀장님도 그렇고 한실장님도 그렇고, 이젠 정말 나를 한 명의 유능한 매니저로 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내 선배들은 아직도 이런 눈빛을 못 받고 있는데.

‘채희를 뽑은 거나 대본을 고른 것도 나라고 하면 아주 기절하시겠네.’

나는 윤팀장님의 물음에, 뒷좌석에 앉은 채희를 룸 미러를 통해 바라봤다.

채희도 나를 보고 있었는지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둘 모두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걱정보다는 기대를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직 내가 옆에 없으면 안 되겠지만.

옆에 있기만 한다면 아주 그냥 여포지, 여포.

< 걱정보다는 기대를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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