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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23화 (23/170)

< 대본 리딩(2) >

채희는 신인이기도 하고, 고질병 때문에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오래 주어지는 것이 좋기 때문에 우리는 리딩장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시작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와, 우리가 1등인가 봐요.”

“그러게. 몇 명은 있을 줄 알았는데.”

텅 비어있는 리딩장.

상당히 넓었는데 이 안에는 달랑 우리 세 명만 덩그러니 있었다.

너무 일찍 온 건가?

그런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옆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실장님은 텅 빈 자리들을 만족스럽다는 듯이 훑어보며 말했다.

“지금 다들 꽤나 긴장하고 있을 거야. 구선학 감독님이 엄청 까다롭고 기준이 높으시거든. 성공한 영화감독님이시기도 해서 이번에 잘 보이려고 더 애쓰고 있을 거고.”

“그래요? 미팅에서 봤을 때는 엄청 부드럽게 컨트롤하실 것 같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달라서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때 본 감독님은 능수능란하게 상황을 컨트롤하기도 했고, 긴장하고 있던 채희에게 여유를 주기까지 했었으니까.

물론 대사 몇 줄 읽어보라며 곧바로 바짝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좀 짜증이 난다.

결과적으로 좋게 풀려서 다행이지.

“현장 지휘하는 스타일이랑 기준치는 다른 문제잖아.”

대충 알 것 같다.

기준이 높은 거랑, 현장을 부드럽게 컨트롤하는 건 별개이긴 하지.

반대로, 윽박지르고 과격한 스타일이라고 해서 꼭 기준이 높은 건 또 아닐 테니까.

‘배우들한테는 완전 부담스러운 스타일이겠구나.’

기준이 높기 때문에 항상 어느 정도 연기력이 되는 배우들을 쓰는 것일 테고, 지휘까지 잘하니 씬과 캐릭터의 매력을 한계까지 짜낼 수 있었던 거다.

지금으로선 추측일 뿐이지만 만족할 만한 장면이 안 나오면 계속해서 찍지 않으실까?

‘좋아! 그런데 다시 해볼까?’라거나, ‘좋은데 너무 긴장하네? 하하! 어깨에서 힘 좀 빼고 다시 해볼까?’라거나.

부드럽게, 하지만 기준에 차지 않으면 계속해서.

‘연기 못하는 배우들은 못 견디겠네···.’

내가 배우였다면 무척이나 끔찍할 것 같다.

차라리 화끈하게 혼나는 게 더 나을지도.

아무튼 배우들이 부담을 가질 만하다.

리딩장에 늦게 나타나는 건, 긴장을 풀기 위해서라거나 아니면 차 안에서 직접 말로 내뱉으며 연습을 계속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런데.

‘채희한테는 안 그랬었는데.’

나는 잘 상상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채희를 바라봤다.

미팅 현장에서 채희는 구선학 감독님의 기준을 단 한 번에 채워버렸기 때문에, 구선학 감독님의 그러한 면을 볼 수 없었다.

다시 해보라는 소리도 없었고, 연기에 대해 구태여 보태는 말도 없었지.

그저 허허, 웃으며 박수치기에 바빴다.

한실장님이 왜 이렇게 여유롭게 미소 지으시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입에서도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있거든.

자랑스럽다 정채희.

역시 내 배우.

“일단 앉자. 대본이나 보고 있어.”

“네!”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배우들이 점점 자리하기 시작했다.

역시 모두 비장한 얼굴들이다.

구선학 감독에게 잘 보여서 그의 영화에 캐스팅되기를 바라고 있거나, 아니면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엄청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 게 겉으로 보일 정도였다.

채희는 그들이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꼬박꼬박 웃으며 인사했지만, 다들 제 코가 석 자이기 때문에 살갑게 받아주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처음엔 채희의 비주얼을 보고 움찔하며 감탄하는 듯했으나, 그래도 이성적 관심보다는 제 밥그릇 챙기는 게 우선인 듯했다.

배우로서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서, 채희에게서는 금세 관심을 거두고 대본에만 시선을 던졌다.

그저 인사 몇 마디 주고받았던 게 끝.

리딩장 안은 마치 도서관에 온 것 같이 적막하기만 했다.

긴장감 없이 풀어진 것보다는 훨씬 기대가 되는 모습이고, 굉장히 모범적이며 훌륭한 그림이었지만.

문제는 채희도 이런 분위기에 조금씩 전염이 되고 있다는 거였다.

당황스럽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도움을 바라는 눈길.

그래서 나는 조용히 채희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닥거리듯이 말했다.

“설마 떨리는 거 아니지?”

“네···? 뉘앙스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설마라뇨. 이런 상황에서 안 떠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저 많이 떠는 거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

“모르는 거 아니지. 근데 너 남들이 긴장한다고 같이 긴장하는 스타일은 또 아니잖아. 공포증은 지금 상황이랑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게 뭔 소리냐는 듯 눈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막상 저런 표정을 짓고 있어도, 눈빛에서는 뭔 말이라도 빨리 내뱉어보라고 재촉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럼 해줘야지. 채희가 나한테 의지하게 됐던 계기도 논리적으로 들어맞지 않는 논리, 궤변이었잖은가.

이미 좋게 평가한 사람한테 똑같은 연기 보여주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오랜만에 화려한 화술을 사용하기로 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렇게까지 심한 궤변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바른 말이기도 하지.

“넌 평가받는 시선이 두려웠던 거잖아. 남들이 긴장하건 말건 그게 뭔 상관이야. 여기 분위기가 파티 분위기건 도서관 분위기건 너한테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채희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너 공포증 핑계 대고 떨고 있는 거라고 지금. 내 말이 틀려?”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눈을 마주하며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얘랑 내가 마치 무언의 약속을 나눈 듯했다.

나는 말을 내뱉고, 얘는 내 말을 무조건 믿기로 하는.

“우리 준비 완벽하게 했잖아. 걱정할 거 없어. 그리고 오히려 우리한테 더 좋은 일이야. 다른 사람들이 널 평가할 것 같아? 제 코가 석 잔데? 다 자기 연기하느라 바쁘지.”

“오. 이건 제법 설득력 있는데요? 그리고요?”

“그리고는 뭘 그리고야. 그게 끝이야. 떨 이유 없다고.”

입이 댓발로 튀어나온 채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런데 눈매가 날카롭지 않고 오히려 살짝 웃음짓고 있다.

하여간 얘는 무슨 표정을 지어도 이렇게 이쁜지.

대본을 보던 남자 배우 한 명이 채희를 힐끗 쳐다봤다가 아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저놈은 특별주의대상으로 지정해야지.

그렇게 채희에게 안정을 되찾아주고, 리딩 시작까지 10분 정도가 남았을 때.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박송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송이.

데뷔한 지 올해로 6년차가 되는 배우.

수수하고 청아한 외모에 더불어 뛰어난 연기력까지 가져, 세 작품 만에 주연 배우 자리까지 올라온 스타.

그녀는 전투태세를 갖춘 다른 배우들과는 다르게 여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기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내가 볼 땐 좀 더 긴장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면 단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무대에 온 게 기분 좋아서 저러는 것일 수도 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신인배우 정채희입니다!”

여배우들끼리 흔히 있는 신경전 따위는 개나 줘버리듯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밝게 인사하는 채희.

박송이도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채희의 얼굴을 보고 흠칫 표정을 굳혔다가, 바로 표정을 풀고 마주 인사해주었다.

“어머! 반가워. TV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이지? 앞으로 잘해보자.”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리고 실물이 훨씬 예쁘신 것 같아요!”

채희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판단하던 박송이는 채희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지는 않았는지, 자기 딴에는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건넸다.

“신인이니까 당황할 수도 있어서 말해주는 건데, 오늘 리딩에서 감독님한테 디렉팅 들어와도 너무 굳지 마. 이미 미팅했을 때 겪어봤을 거 아냐.”

구선학 감독의 지적, 채희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네, 네!”

“나도 드라마만 찍어서 구선학 감독님이랑 작품하는 건 처음이야. 근데 듣기로 감독님이 완벽주의자라고 하시더라고. 영화가 그렇잖아. 시간이 돈이니까. 처음에 잘 잡아줘야 현장에 들어가서 잘 조율할 수 있어서 좀 빡빡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야. 감독님도 드라마는 처음이라서 스타일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셨을 거고. 이따가 너무 기죽고 겁먹으면 안 된다?”

“아···! 네.”

나는 저 대화를 들으며 웃음을 꾸욱 참았다.

박송이는 미팅 때 지적을 좀 받았었나 보다.

채희는 지적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으면서 연신 미소를 잃지 않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쟤는 나중에 코믹 연기 한 번 시켜봐야겠다.

엄청 잘할 것 같아.

그렇게 박송이에게 격려와 조언을 듣고 자리에 앉았을 때.

미팅이 시작되는 시간에 딱 맞춰, 핵심 제작진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작사 대표와 작가, 카메라 감독, 그리고 구선학 감독.

구선학 감독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인사했다.

아니,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선전포고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감독 구선학입니다. 제가 영화만 찍어봐서 드라마 판을 잘 모르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제가 하던 스타일 대로 한 번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보겠습니다. 다들 잘 따라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좋은 작품 만들어보죠.”

극소수의 몇을 제외한 대부분이 긴장과 투지를 함께 다지고 있는 리딩장.

리딩은 모두가 차례대로 인사를 마친 뒤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

여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친구, 그리고 남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친구까지.

이 네 명이 주가 되는 로맨틱 코미디이기 때문에, 이들이 만들어내는 호흡과 시너지, 그리고 캐릭터 소화력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니까, 이 네 역할에 한해서 구선학 감독은 더욱더 까탈스럽게 요구했다는 뜻이다.

말투와 표정은 온화하게. 그러나 오늘 안에 리딩을 끝내야 해서 그런지 진지한 분위기로.

“잠깐만요. 대사 처리랑 연기까지 다 좋으신데, 제가 저번 미팅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캐릭터가 살짝 무거운 감이 있어야 하거든요. 살짝이라도 부산스럽거나 경망스러운 면모가 보이면 안 돼요. 그럼 잠깐 호흡 좀 주고 다시 한번 대사 받아볼까요?”

“네, 알겠습니다.”

남자 주연배우, 김기혁 또한 감독의 지적과도 같은 디렉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김기혁과 남자 조연배우, 윤성준이 함께 나오는 씬은, 둘 모두 몇 번이나 디렉팅을 받은 끝에 겨우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채희와 박송이가 함께 나오는 씬.

먼저 대사를 한 건 박송이였다.

“수아야. 오늘 둘이 술 한잔 할까? 좀 특별한 곳에서. 내가 오늘 너한테 아주 신세계를 보여줄게. 가면 껌뻑 기절할 거다 아마. 흐흐.”

능글맞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치는 대사.

구선학 감독의 입이 무슨 말을 내뱉으려고 벌어지다가, 채희에게 시선이 닿고서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감독님이 보는 눈이 있으시네.’

존재감 혹은 아우라.

채희는 자신이 나오는 씬이 시작됐을 때부터 이미 완벽하게 ‘신수아’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대사 한마디 없이 그저 듣는 것뿐이었는데도, 그녀의 재능은 가만 있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와 꿀렁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고 대사를 시작했을 때.

구선학 감독의 입꼬리는 오늘 중 가장 깊게 말려 올라갔다.

< 대본 리딩(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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